우리의 계절은 달랐다

너는 이미 다음 계절에

byHelia

박정우가 이엘리야를 처음 본 것은 영화제 리셉션장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전에도 그녀를 알고 있었다. 아역배우로 시작해 성인이 된 뒤에도 꾸준히 작품을 이어온 배우. 데뷔한 지 오래됐다는 것과 몇 편의 대표작, 얼굴과 이름 정도는 알고 있었다. 업계에 있으면서 이엘리야를 모른다는 게 오히려 이상했다.

그런데 아는 것과 실제로 눈에 들어오는 것은 달랐다.

그날 리셉션장에는 사람이 넘쳤다. 배우와 감독, 제작사 관계자와 기자들이 쉴 새 없이 오갔다. 누군가는 더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 했고, 누군가는 자기 얼굴을 한 번이라도 더 알리려고 웃었다. 정우 역시 그 틈에 섞여 있었다.

그때 멀리서 엘리야가 보였다.

화려한 드레스를 입어서가 아니었다. 그녀보다 더 화려한 배우도, 더 많은 카메라를 몰고 다니는 배우도 있었다.

엘리야는 난처해하는 어린 스태프와 이야기하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배우님 좌석을 제가 잘못 확인해서…….”

“괜찮아요. 저기 앉으면 되죠.”

“그래도 원래 배우님 자리가…….”

“거기도 의자잖아요.”

엘리야가 웃었다.

“제가 앉으면 제 자리되는 거죠, 뭐.”

스태프가 연거푸 죄송하다고 고개를 숙였지만 엘리야는 정말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자리를 옮겼다.

조금 뒤에는 술잔을 권하는 사람을 웃으며 거절하고 있었다.

“한 잔만 하지.”

“저 술 잘 못해요.”

“영화제까지 와서 슬롯생활을 해야지.”

엘리야가 잠깐 상대를 바라봤다.

“못 마시는 술 억지로 마시는 게 슬롯생활이면 저는 슬롯생활 조금 못할게요.”

말은 부드러웠다.

그런데 물러서지는 않았다.

그날 정우는 몇 번이나 엘리야를 찾아봤다.

사람들 틈에서 그녀가 어디 있는지, 누구와 이야기하는지 자꾸 눈이 갔다. 몇 번 눈이 마주쳤고 엘리야가 먼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정우도 따라 인사했다.

그게 전부였다.

번호도 몰랐고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눠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 집에 돌아온 뒤에도 생각났다.

이엘리야.

정우는 그녀의 인터뷰를 찾아봤고 오래된 작품까지 다시 봤다.

첫눈에 반한다는 말을 별로 믿지 않던 사람이 처음으로 그 말을 이해했다.


몇 년 뒤 정우는 자신의 소속사를 차렸다.

배우를 모으고 직원을 뽑고 제작사를 찾아다녔다. 회사는 조금씩 자리를 잡았다.

그 와중에도 엘리야의 소식은 유난히 잘 들렸다.

새 작품에 들어갔다는 기사.

광고 계약.

영화 개봉.

업계에 있으니 자연스럽게 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른 배우의 소식까지 그렇게 챙기지는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엘리야의 오랜 소속사 대표였던 설아가 건강 문제로 대표직을 내려놓는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엘리야 역시 회사를 나오게 됐다.

정우는 그 소식을 듣자마자 움직였다.

엘리야가 자신을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

정우가 먼저 찾아갔다.

카페에서 마주 앉은 엘리야는 조금 의아한 얼굴이었다.

“저를 왜 보자고 하신 거예요?”

“계약 제안하려고요.”

“저 아직 어디 들어갈지 결정도 안 했는데요.”

“그러니까 지금 왔죠.”

엘리야가 웃었다.

“성격 급하시네요.”

“다른 회사에서 먼저 데려가면 안 되니까.”

농담처럼 말했다.

사실이었다.

엘리야가 계약서를 넘기다가 고개를 들었다.

“조건이 너무 좋은데요?”

“그만한 배우니까요.”

정우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차마 말하지 못했다.

영화제에서 당신을 처음 본 날부터 좋아했다고.

당신이 혼자가 됐다는 말을 듣자마자 내가 먼저 생각났다고.

며칠 뒤 엘리야에게 연락이 왔다.

계약하겠다고.

정우는 직원들 앞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그러나 대표실 문을 닫은 뒤 한참을 웃었다.

좋았다.

같이 일할 수 있다는 것이.

전화할 이유가 생겼다는 것이.

작품을 함께 고르고 매일 얼굴을 볼 수 있다는 것이.

그렇게 둘은 대표와 배우가 됐다.

그리고 시간이 더 흐르면서 오빠와 동생이 되었고, 어느 순간 연인이 됐다.


엘리야는 정우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단단한 사람이었다.

생활력이 강했다.

누가 챙겨주지 않아도 자기 일은 자기가 했고, 돈이 많아도 함부로 쓰지 않았다. 스태프에게 잘했고 신인배우에게 친절했다.

그러면서도 아닌 것은 아니라고 했다.

누가 목소리를 높이면 엘리야는 오히려 목소리를 낮췄다.

“왜 제가 그래야 하는데요?”

“그건 제 잘못 아니잖아요.”

“싫어요.”

“안 할게요.”

조곤조곤 말했다.

하지만 결국 자신의 뜻을 지켰다.

정우는 그 부분을 사랑했다.

부조리한 세상에서 자기를 지킬 줄 아는 여자.

누구에게도 함부로 끌려가지 않는 여자.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 사랑 안에 다른 것이 섞이기 시작했다.

질투였다.

불안이었다.

정우는 엘리야가 전화를 받지 않으면 계속 연락했다.

어디 있는지 물었고 누구와 있는지 확인했다.

남자배우와 단둘이 밥을 먹었다는 말을 들으면 기분이 상했다.

처음에는 엘리야도 웃어넘겼다.

“오빠 또 시작이네.”

그 한마디에 정우는 안심했다.

엘리야가 받아주는 줄 알았다.

괜찮은 줄 알았다.

엘리야가 자신을 사랑하니 결국 이해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대표라는 자리까지 이용했다.

“스캔들 관리하는 거야.”

“배우 이미지도 회사가 관리해야지.”

“전화는 받아야 내가 확인을 하지.”

엘리야는 점점 말을 줄였다.

정우는 그것을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엘리야는 익숙해진 것이 아니었다.

지쳐가고 있었다.


결정적인 싸움이 벌어진 날 정우는 또 같은 말을 했다.

“내가 너 여기까지 만들었어.”

엘리야가 그를 한참 바라봤다.

“그거 진짜 그렇게 생각해?”

“내가 최근 3년 동안 너한테 가져온 작품이 몇 개인데.”

“오빠.”

엘리야가 차분하게 말했다.

“나 이 바닥에서 25년 했어.”

정우가 입을 다물었다.

“그중에 오빠랑 같이 일한 건 3년이고.”

“그 3년 동안 네 커리어가 얼마나 올라갔는데.”

“그건 알아.”

엘리야는 부정하지 않았다.

“오빠가 작품 봐주고 계약하고 일정 잡고 좋은 작품 가져온 거 알아. 그래서 고마운 것도 있고.”

잠깐 멈췄다.

“근데 같이 일한 거지, 오빠가 나를 만든 건 아니야.”

정우의 표정이 굳었다.

엘리야는 계속 말했다.

“내 커리어 대부분은 설아 언니랑 만들었어.”

“걔는 지금 네 옆에 없잖아.”

“없다고 그 사람이 해준 일이 없어지는 건 아니잖아.”

그리고 엘리야가 말했다.

“그거 알아?”

정우가 쳐다봤다.

“설아 언니가 안 아팠으면.”

“…….”

“그래서 대표에서 사임하지 않았으면.”

엘리야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나 오빠랑 계약 안 했어.”

그 말은 생각보다 깊게 박혔다.

정우는 엘리야를 자신이 얻었다고 생각해 왔다.

자신이 더 좋은 조건을 제시했고, 더 큰 작품을 가져왔고, 그녀를 더 높은 곳으로 끌어올렸다고.

그런데 시작부터 달랐다.

엘리야가 정우를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

정우가 찾아갔다.

엘리야를 원한 사람이 정우였다.

엘리야가 필요해서.


엘리야는 계약 만료 후 재계약하지 않겠다고 했다.

배우도 그만둘 수 있다고 했다.

정우는 화가 났다.

“25년을 했는데 그걸 그냥 버려?”

“버리는 거 아니야.”

“그럼 뭔데.”

“끝내는 거지.”

정우는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엘리야가 배우를 그만두면 자신이 붙잡을 수 있는 마지막 명분까지 사라졌다.

그리고 엘리야는 마지막으로 말했다.

“그리고 오빠.”

“또 뭐.”

“우리 연애도 끝내자.”

정우의 머릿속이 멈췄다.

“뭐?”

“헤어지자고.”

“너 지금 화나서 그러는 거잖아.”

“안 화났어.”

“그럼 왜.”

엘리야가 잠시 생각했다.

“오빠랑 있으면 피곤해.”

그 말이 가장 아팠다.

미워한다는 말도 아니었다.

상처받았다는 말도 아니었다.

그냥 피곤하다고 했다.

사랑이 소진됐다는 뜻이었다.

정우는 마지막까지 물었다.

“다른 남자 생겼어?”

엘리야는 고개를 저었다.

“끝까지 다른 남자가 있어야 내가 오빠를 떠날 수 있다고 생각하네.”

“그럼 왜 떠나.”

“내가 이제 오빠를 안 좋아하니까.”

정우는 그 말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하지만 엘리야는 이미 오래전부터 받아들이고 있었다.


다음 날.

엘리야는 정우를 보자 자연스럽게 말했다.

“대표님.”

정우가 굳었다.

어제까지 오빠였다.

화가 나도 오빠.

싸워도 오빠.

그런데 하루가 지나자 대표님이었다.

“왜 그렇게 불러.”

엘리야가 오히려 이상하다는 듯 쳐다봤다.

“그럼 뭐라고 불러요?”

“…….”

“헤어졌잖아요.”

그뿐이었다.

엘리야는 인터뷰 질문지를 펼쳤다.

“오늘 11시 인터뷰 맞죠?”

정우는 그녀를 바라봤다.

후회하는 얼굴도 아니었다.

억지로 괜찮은 척하는 얼굴도 아니었다.

정말 괜찮아 보였다.

그게 미칠 것 같았다.

차라리 울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욕을 하거나 미워했으면 나았을 것이다.

분노도 감정이었다.

그런데 엘리야에게 정우는 이미 지나간 사람이었다.

“나 다른 여자 만나도 상관없어?”

정우가 물었다.

질투를 끌어내려고 한 말이었다.

엘리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진짜?”

“좋은 분 만나세요.”

정우는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었다.

자기는 못할 것 같았다.

다른 여자를 만나도 결국 엘리야를 생각할 테니까.

엘리야는 이 음식 좋아했는데.

엘리야는 이런 농담 싫어했는데.

엘리야라면 지금 뭐라고 했을까.

모든 길 끝에 이엘리야가 있었다.


인터뷰가 시작됐다.

정우는 유리문 밖에서 엘리야를 바라봤다.

기자의 질문에 대답하다 그녀가 웃었다.

정우는 그 얼굴을 처음 영화제에서 봤던 날을 떠올렸다.

그때도 이렇게 멀리서 보고 있었다.

그때의 엘리야는 아직 자신의 여자가 아니었다.

지금의 엘리야는 더는 자신의 여자가 아니었다.

그 사이에 몇 년이 있었다.

정우는 그 몇 년이 너무 길어서 영원이라고 착각했다.

엘리야를 사랑했고.

여전히 사랑했고.

어쩌면 앞으로도 오랫동안 사랑할 것 같았다.

그런데 이제 엘리야의 사랑에는 자신이 없었다.

정우는 뒤늦게 깨달았다.

자신이 엘리야보다 덜 사랑했던 것이 아니었다.

사랑받고 있다는 확신 때문에 자기 사랑을 함부로 다뤘던 것이다.

엘리야는 계속 옆에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래서 붙잡지 않았다.

잘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사랑받는 사람의 오만이었다.

그리고 사랑을 잃고 나서야 알았다.

어쩌면 더 놓지 못하는 사람은 처음부터 자신이었다.

먼저 반한 것도 정우였다.

먼저 찾아간 것도 정우였다.

먼저 함께 일하자고 손을 내민 것도 정우였다.

그리고 끝난 사랑을 혼자 계속하고 있는 사람도 정우였다.

엘리야가 인터뷰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열고 나오며 정우를 발견했다.

잠시 눈이 마주쳤다.

“대표님.”

정우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다음 일정 어디예요?”

정우는 대답하지 못하고 한동안 그녀를 바라봤다.

엘리야는 기다렸다.

재촉하지도 않았다.

예전과 같은 얼굴이었다.

다만 자신을 바라보는 마음만 달랐다.

“대표님?”

그제야 정우가 말했다.

“차 준비됐어.”

“네.”

엘리야는 고개를 끄덕이고 먼저 걸었다.

정우는 조금 뒤에서 그녀를 따라갔다.

예전에는 같은 속도로 걸었다.

때로는 손을 잡고.

때로는 어깨를 맞대고.

하지만 이제는 몇 걸음의 거리가 있었다.

엘리야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정우만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한때 두 사람은 같은 계절 안에 있었다.

같이 웃고, 사랑하고, 서로를 내일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사랑이 시작된 날이 같다고 해서 끝나는 날까지 같은 것은 아니었다.

엘리야에게 이별은 오래전부터 천천히 찾아온 계절이었다.

기다리고, 실망하고, 마음을 접으면서 이미 겨울을 지나왔다.

그래서 이제는 다음 계절로 걸어갈 수 있었다.

정우에게 이별은 달랐다.

어제까지 여름이었던 세상에 하루아침에 눈이 내렸다.

떠날 준비를 할 시간도 없었다.

아니.

사실 시간은 충분했다.

정우가 보지 않았을 뿐이었다.

엘리야는 먼저 계절을 건너갔다.

정우는 아직 그 자리에 남았다.

같은 사랑을 했던 두 사람이었지만.

끝내 그들의 계절은 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