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절 뒤에 남은 진실과 마음
“싫습니다.”
서하람의 대답이 스튜디오에 떨어졌다. 짧고 분명했다. 그런데 제임스 카터는 그 말을 인터뷰의 끝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탁자 위에 놓인 성인용 소품을 손가락으로 굴리며 웃었다. BCS의 간판 앵커가 수백만 시청자 앞에서 짓는, 상대를 안심시키는 데 익숙한 미소였다.
“거부하실 수 있습니다. 그건 작가님 권리니까요. 다만 여기서 거부하시면 작품 속 장면을 실제로는 전혀 모른다는 뜻이 되지 않겠습니까?”
방청석에서 웃음이 터졌다. 앞줄에 앉은 남자 몇 명은 몸을 앞으로 숙였다. 카메라의 붉은 불빛은 꺼지지 않았다.
하람은 소품이 아니라 제임스를 바라봤다.
“작품에 살인이 나온다고 작가에게 사람을 죽여보라고 하지는 않죠.”
웃음소리가 잠시 끊겼다.
“전쟁소설을 썼다고 총을 쥐여주지도 않고요. 그런데 여성 작가가 성적인 장면을 쓰면 왜 그 사람의 몸부터 증명대에 올립니까?”
제임스의 눈가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는 곧 웃음을 되찾았다.
“작품의 현실성을 묻는 겁니다.”
“아니요. 제 사생활을 묻고 계십니다. 작품에 관한 질문이라면 등장인물의 선택이나 문장, 서사의 맥락을 물으셨겠죠. 지금까지 앵커님이 궁금해하신 건 제가 누구와 무엇을 해봤는지뿐이었습니다.”
객석의 분위기가 갈라졌다. 웃음을 거둔 사람들이 생겼고, 못마땅한 표정으로 팔짱을 끼는 사람들도 있었다. 제임스는 진행자 특유의 침착한 목소리를 유지하려 했지만, 손은 탁자를 일정하지 않은 박자로 두드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작품 이야기만 하죠. 소설 속 여성은 거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신체 반응을 보입니다. 그건 공포입니까, 흥분입니까?”
“사지에 몰린 사람도 심장이 빨리 뛰고 피부가 붉어집니다. 앵커님도 지금 목과 귀가 붉어지셨네요. 제가 앵커님께 흥분하셨느냐고 물으면 의학적인 질문이 됩니까?”
스튜디오 뒤편에서 느린 박수가 시작됐다. 제임스는 물을 마셨다. 병을 쥔 손이 떨려 물이 턱을 타고 흘렀다.
하람은 마이크를 풀어 탁자 위에 놓았다.
“저는 오늘 존경했던 앵커를 만나러 왔습니다. 독설적인 질문 뒤에도 사람에 대한 예의는 있을 거라고 믿었거든요. 팬으로서 기대했습니다.”
제임스의 표정이 잠시 풀렸다. 그러나 이어진 말에 입꼬리가 굳었다.
“그래서 더 실망스럽습니다. 앵커님은 열다섯 해 동안 쌓아온 권위를 질문하는 데 쓰지 않고, 게스트가 어디까지 참는지 시험하는 데 쓰셨습니다.”
잠시 뒤 메인 방송의 연결이 끊겼다. 생방송이 끝난 줄 알았던 하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인터뷰 코너의 카메라 한 대는 계속 돌아가고 있었다.
조정실에서 총괄 프로듀서 제이슨 홀리데이가 지시했다.
“메인은 끊고 코너는 살려. 끝까지 잡아.”
하람이 퇴장하려 하자 제임스가 그녀의 등을 향해 말했다.
“도망치시는 겁니까? 질문에 답하지 못하니까 방송을 끊은 거잖아요.”
하람은 돌아보지 않았다.
“방송을 끊은 건 제가 아닙니다. 그리고 자리를 떠나는 사람을 따라가며 모욕하는 건 토론이 아니라 퇴장 사유를 증명하는 일입니다.”
그날 밤, 짧게 편집된 영상들이 온라인을 뒤덮었다. BCS는 ‘격앙된 토론’이라는 표현으로 상황을 정리했고, 제임스는 시청자의 알 권리를 위한 질문이었다고 해명했다. 하람이 여러 차례 거부했다는 사실과 코너 송출을 계속하라는 조정실의 지시는 공식 입장에서 빠졌다.
방송이 끝난 뒤 열린 백스테이지 면담에서 제이슨은 하람에게 공동 입장문을 제안했다.
“BCS가 진행자의 부적절한 발언에 대해 사과하겠습니다. 대신 작가님도 재발 방지 노력을 인정한다는 코멘트를 남겨주십시오. 서로 체면을 세우자는 겁니다.”
“아직 조사도 시작하지 않았는데 무엇이 재발 방지됐다는 건가요?”
“조사하겠다고 말씀드렸잖습니까.”
“누가 무엇을 승인했고, 제가 거부한 뒤에도 왜 촬영을 계속했는지부터 확인하십시오. 그 결과를 보고 판단하겠습니다.”
클레어가 날카롭게 끼어들었다.
“십오 년 된 메인 앵커를 생방송에서 공개적으로 망신시킨 건 작가님이잖아요.”
방 한쪽에 서 있던 법무팀장 데이비드가 서류에서 눈을 들었다.
“게스트가 앵커를 망신시킨 게 아니라, 앵커의 질문이 생방송으로 송출된 겁니다. 둘은 다릅니다.”
제이슨이 그를 노려봤다.
“당신은 누구 편입니까?”
“지금은 사실관계를 확인하는 자리입니다. 편을 고르는 자리가 아니고요.”
면담은 합의 없이 끝났다. 하람은 모든 원본 영상과 조정실 교신, 제작 회의 기록을 보존해 달라는 문서를 남기고 돌아갔다. BCS는 내부 자산을 외부인에게 내놓을 의무가 없다며 반발했다.
하람은 문 앞에서 한 번만 돌아봤다.
“공개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조사 전에 없애지 말라는 말입니다. 제가 요구하지 않은 것까지 거절하는 척하면, 정작 답해야 할 요구를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녀가 나간 뒤에도 데이비드는 한동안 닫힌 문을 바라봤다.
한 달 뒤, 그는 하람에게 개인적인 사과 메시지를 보냈다. 당시 회의에서 BCS의 이름을 앞세워 압박한 태도는 잘못됐다고 적었다. 용서를 요구하지 않겠으며 답장할 의무도 없다고 덧붙였다.
메시지는 읽혔지만 답장은 오지 않았다.
답장할 의무가 없다고 쓴 사람은 데이비드 자신이었다. 그런데 며칠 동안 알림이 울릴 때마다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그는 그런 자신이 우스웠다. 서른일곱이 되도록 일 이외의 일에 마음을 빼앗긴 적이 드물었다. 그런데 제이슨이 회의에서 하람을 언급할 때마다 그녀의 표정과 목소리가 떠올랐다.
한국 출장 중 우연히 들어간 카페에서 하람을 다시 만난 날에는, 준비했던 법률 문장들이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두 사람은 BCS 사건 대신 글과 사진, 런던의 날씨에 관해 이야기했다.
하람은 한참 데이비드의 얼굴을 보다가 웃었다.
“데이비드 씨의 그 눈, 렌즈는 아니죠? 그냥 깊어요. 보고 있으면 빠져들 것 같달까. 호수 같아요. 그냥 그렇다고요.”
데이비드는 대답보다 먼저 시선을 내렸다. 법정에서도 흔들리지 않던 남자가 빨대 포장지만 만지작거렸다.
하람은 그 모습을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만나는 사람 있으세요? 아, 이런 질문은 실례겠죠. 못 들은 걸로 해주세요.”
“없습니다.”
대답이 너무 빨랐다. 하람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데이비드는 뒤늦게 물을 마셨다.
그날 헤어지기 전 하람은 말했다.
“데이비드 씨, 좋아요 눌러놓고 취소하지는 말아요.”
그녀가 떠난 뒤 데이비드는 카페에 한참 더 앉아 있었다. 그러나 런던으로 돌아오자 다시 BCS의 변호사가 되어야 했다. 그는 하람과 개인적으로 만난 사실을 보고하고 사건의 직접적인 연락 업무에서 스스로 물러났다. 마음이 생겼다는 이유로 원칙을 버리고 싶지는 않았다.
독립 조사가 시작되면서 제작진의 진술은 갈라졌다. 클레어는 성인용 소품을 자신이 제안했다고 인정했다. 현장 프로듀서 마이클은 하람이 퇴장하려던 순간 제이슨이 코너 송출을 유지하라고 지시한 조정실 교신을 제출했다. 제이슨은 세부 내용을 몰랐다고 주장했다.
그때 여성 출연자들을 외모와 신체 부위로 나눠 점수를 매긴 이른바 ‘게스트 품평 파일’이 외부로 유출됐다. 파일에는 하람의 이름이 없었고 작성 날짜도 달랐다. 제이슨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서하람 사건과 무관한 자료야. 법무팀에서 공식적으로 선을 그어.”
데이비드는 파일의 작성자와 수정 이력, 공유 대상을 확인하다가 고개를 들었다.
“직접 증거가 아니라는 것과 무관하다는 것은 다른 말입니다.”
“날짜도, 대상도 다르잖아.”
“이 파일만으로 하람 씨가 출연한 방송의 바카라임을 입증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같은 제작 조직이 여성 게스트를 어떤 기준으로 다뤘는지 확인할 자료는 됩니다. 관련자가 겹치는지도 조사해야 하고요.”
“또 그 작가 편을 드는군.”
데이비드는 노골적으로 한숨을 쉬었다.
“파일을 만든 것도 BCS 직원이고, 보관한 곳도 BCS 내부입니다. 그런데 확인된 사실을 건너뛰고 외부에 있는 서하람 씨부터 의심하겠다는 겁니까?”
“유출로 가장 이득을 보는 사람이 누군지 생각해 보라는 거야.”
“가능성이라는 말은 근거 없는 의혹을 퍼뜨리는 면허가 아닙니다.”
데이비드는 자료보존 및 독립 조사 확대 권고안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관련 서버와 계정의 삭제 권한을 제한하고, 품평 파일은 기존 사건과 분리해 조사하되 인적 연관성이 확인되면 범위를 넓히겠다는 내용이었다.
제이슨의 얼굴이 굳었다.
“이러고도 BCS에 남을 수 있을 것 같아?”
“그 질문은 저도 오래 생각했습니다.”
데이비드는 준비해 둔 사직서를 서류 위에 올렸다. 날짜와 서명까지 채워져 있었다.
“제가 BCS의 잘못을 말했기 때문에 떠나는 것과 BCS를 배신해서 떠나는 것은 다릅니다. 그 둘을 구분하지 못하는 조직이라면 남아 있을 이유도 없습니다.”
그는 사직서가 아니라 권고안을 먼저 감사위원회에 제출했다. 증거 보존 조치가 완료됐다는 통지를 확인한 뒤에야 사원증을 반납했다.
건물 밖으로 나오자 비가 내리고 있었다. 데이비드는 우산을 펴지 않은 채 한동안 BCS 본사를 올려다봤다. 미련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자신이 쌓아온 경력의 대부분이 저 건물 안에 있었다. 그러나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휴대전화가 울렸다.
서하람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공식 문서 잘 받았습니다. 조사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는 별도의 입장을 내지 않겠습니다.’
업무적인 문장이었다. 데이비드는 짧게 답했다.
‘확인했습니다.’
곧 두 번째 메시지가 도착했다.
‘그리고 한 달 전에 보내신 사과도 읽었습니다. 답장이 늦었네요.’
데이비드의 손이 화면 위에서 멈췄다.
‘답장하실 의무는 없었습니다.’
하람의 답은 금방 왔다.
‘그 말, 진심이긴 했어요?’
데이비드는 빗속에서 처음으로 웃었다.
‘처음에는 진심이었습니다.’
‘지금은요?’
그는 한참 고민하다가 솔직하게 적었다.
‘조금 서운했습니다.’
잠시 후 하람이 웃는 표정의 사진 한 장을 보냈다. 런던의 어느 거리였다. 사진 뒤편으로 붉은 이층 버스가 지나가고 있었다.
‘저 지금 런던이에요. 여행 왔어요.’
데이비드는 반사적으로 BCS 건물을 돌아봤다가 다시 화면을 내려다봤다.
‘사건과 관련된 만남은 곤란합니다.’
‘알아요. 그래서 전직 BCS 변호사에게 커피를 마시자고 하는 거예요.’
메시지 아래로 카페 위치가 도착했다. 한국에서 우연히 만났던 곳과 같은 이름을 가진 작은 카페였다.
데이비드는 우산을 펼쳤다. 몇 걸음 옮기다 하람의 사진에 좋아요를 눌렀다. 이번에는 손가락을 떼고도 화면을 오래 들여다보지 않았다.
취소할 생각이 없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