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인상은 참 당황스럽다

끝을 안다는 것과 모른다는 것

byHelen

본인상은 참 당황스럽다. 말기 암 판정을 받고 나서도 평소와 다름없이 SNS 활동을 하며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던 나보다 두 살 어린 후배의 이야기다.


그를 마지막으로 만난 건 2년 전쯤, 암 진단을 받기 직전이었다. 거의 10년 만의 만남이었다. 같은 온라인 게임을 다니다가 그와 나는 각자 다른 시점에 계열사로 이동했는데, 내가 먼저 프리랜서가 되었고 그도 얼마 후 퇴직했다. 아무 준비 없이 퇴직한 나에 비해 그는 나름대로 철저히 준비한 듯, 퇴직하자마자 새롭게 시작한 일들을 SNS를 통해 적극적으로 알리곤 했다.


그날의 만남은 둘 다 외로운 프리랜서라는 연대감이 계기가 되었을 뿐, 그와 내가 친한 사이여서 만난 것은 아니었다. 서촌의 경치 좋은 카페에서 차를 마시고 만두로 유명한 중국집에서 점심을 먹고 헤어지며 앞으로 자주 연락하고 가끔 만나자고 했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위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는 글을 SNS에 올렸다. 서촌 카페에서 보았던 호리호리한 체격과 조용한 말투, 아이의 진로를 걱정하던 얼굴이 떠올랐다.


그 후 그는 SNS를 통해 계속해서 전과 다름없이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가끔은 움찔하게 만드는 글도 올라왔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그는 기도문을 올리기도 했고 반쪽이 된 얼굴에 비니를 쓴 모습을 영상으로 올리며 자신이 죽어가고 있다는 제목을 붙이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댓글로 응원의 메시지를 남겼지만 나는 그때부터 이미 당황하고 있었던 것 같다.


댓글로 뭐라고 써야 할지 고민스러웠다. 아무 일도 없는 듯 살고 있는, 아니 그렇게 보이고 싶어 하는 그에게 “힘내라”는 말을 하기도 어려웠고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예전처럼 “열심히 일하는 모습이 보기 좋아”라고 말하기에도 이상했다. 그래서 그의 글을 그냥 흘려보내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가 2주 전쯤, 이 포스팅이 마지막일 것 같다는 글이 올라왔다. 불길한 느낌이 들었지만 2년 전 만남 이후로 SNS로만 그의 소식을 접하던 터라 그 글만으로는 상황을 알 수 없었다. 나보다 더 그와 가까운 사람들이 뭔가 알고 있을까 하고 댓글 반응을 살폈지만 그래도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지난 5월 2일, 그의 부고가 전해졌다.


나라면 어땠을까.


예전에 읽었던 『인생수업』이라는 바카라에는 시한부 선고를 받은 사람들은 가족과 매우 끈끈해지지만 그게 오진이거나 기적적으로 삶이 연장되면 오히려 관계가 깨지는 경우도 많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었다. 끝을 알면 그 끝을 향해 최선을 다할 수 있지만 끝을 모르면 혼란이 생기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효과가 있을지 없을지 알 수 없는 치료를 받아야 하는 것이 가장 힘들 것 같다. 매 순간 나의 전문분야도 아닌 사항에 대해 어려운 결정을 해야 하고 그때마다 희망과 절망 사이를 오가는 불확실성을 생각하면 정말 끔찍하다. 분명한 것은 나 역시 많은 사람들처럼 치료를 열심히 받기 위해, 오로지 병상에 누워 병과 싸우다가 죽고 싶지는 않다는 점이다. 그래서 아마도 가능한 한 일상을 유지하려고 애쓸 것 같기는 하다.


그러고 보면 별것 없는 무료한 일상이라서 참 다행이다. 매일 하는 산바카라을 계속할 것은 분명하다. 아니, 지금보다 더 열심히 걸을 것이다. 산바카라 중 등줄기를 따라 흘러내리는 햇살이 너무나 따뜻하거나 살갗에 닿는 바람이 청량하게 느껴지면 세상이 무척 아름답게 느껴지는 짜릿한 경험을 하곤 한다. 그럴 때마다 이 느낌은 죽을 때 떠오르겠다 생각한다. 죽는 순간 아쉬움이 남지 않도록 최대한 햇살을 쬐고 바람을 맞는 것은 나에게 너무나 중요한 죽음 준비다.


그다음에는 평소처럼 바카라을 읽고 글을 쓸 것 같기는 한데 이것은 특별한 의미가 없다. 그저 일상의 습관일 뿐이다. 몇 년 전, 오빠의 부탁을 받고 돌아가신 아버지의 유작을 정리한 적이 있는데 그 글에는 아버지가 평생을 매달렸던 구약성경에 대한 연구내용과 함께 아버지의 어린 시절 이야기와 내가 몰랐던 인간관계, 취미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그때 내가 몰랐던 아버지를 처음 만난 것 같은 느낌이 들면서 회한과 후회의 감정이 밀려왔던 기억이 난다.


나는 자식이 없다. 남편은 내가 글을 남겨도 볼 사람이 아니다. 그러니 글을 남긴다고 해도 별 의미가 없다. 남편이 나의 글을 본다 한들, 굳이 죽은 아내에 대해 회한이나 후회를 느끼게 하고 싶지도 않다. 그러니 글이든 물건이든 안 남겨야 한다. 내가 죽은 후 뒤처리가 편하도록(남에게 폐가 되지 않도록)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다.


아마도 나는 엑셀을 열고 목록을 만들 것이다. 내 물건, 내 돈, 관계, SNS 등을 카테고리로 만들어 세부항목을 나누어 정리하고 각각 어떻게, 언제까지 처리할지 방법을 적어둘 것이다. 버릴 것, 나눠줄 것, 남길 것을 구분하는 일만으로도 꽤 시간이 걸릴 것 같다.


여기까지 생각이 이르니 생각보다 바쁘게 지낼 것 같아서 갑자기 마음이 조급해진다. 평소에도 매뉴얼 만들기를 좋아하니, 이왕이면 나처럼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을 위한 체크리스트나 매뉴얼을 만들어 전자출판을 해볼까 하는 생각도 든다. 괜찮은 아이디어 같다. 무엇보다도 가장 나답지 않은가!



바카라 제목 후보!

『죽음준비, 엑셀로 한방에 정리!』『의외로 아무도 안 알려주는 죽음 준비』

『죽은 사람 99%가 모르는 죽음 준비법』『전문가도 놀란 죽음 준비 방법』

『이거 하나로 죽음 준비 끝』『단 10분 만에 끝내는 죽음 준비』..... 추천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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