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필요한 관찰의 기록
어린이집 담임선생님과 긴 상담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솔이를 씻기고, 읽어달라고 가져온 바카라을 펼쳐 읽어주었다.
잠자리에 들면서 녹음해 둔 자장가를 틀어주니 아이는 금세 잠이 들었다.
그런데 나는 쉽게 잠들 수 없었다.
잠든 솔이를 바라보고 있는데 선생님에게 들었던 한 장면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벽에 붙어 있던 종이가 떨어져 있던 날.
선생님이 물었다고 했다.
"누가 떨어뜨렸어?"
솔이는 "누가 떨어뜨렸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 어떤 친구도 만진 적이 없었다.
왜 `누군가`라고 말했을까.
나는 잠든 솔이를 바라보다 그동안의 일들을 다시 떠올렸다.
선생님과의 대화가 필요하다고 느낀 건 그보다 며칠 전이었다.
그래서 먼저 알림장에 글을 적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솔이가 어린이집을 옮긴 지 한 달 반 정도 되어가는데, 최근 솔이의 어린이집 생활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알고 싶어 연락드립니다.^^
집에서는 어린이집 이야기를 물어보면 "재밌었어" 정도로만 이야기하고 자세한 표현은 잘하지 않는 편이라, 어린이집에서의 모습을 선생님께 여쭤보고 싶었습니다.
평소 솔이는 친구들과 어떻게 지내고 있나요?
주로 어떤 친구들과 놀이를 하나요?
놀이에 자연스럽게 참여하는 편인가요?
친구들에게 먼저 다가가는 편인지, 기다리는 편인지 궁금합니다.
친구 관계에서 어려워 보이는 부분이나 반복적으로 관찰되는 모습이 있을까요?
혼자 놀이하는 시간이 많은 편인지도 궁금합니다.
최근 제가 하원 후 놀이터에서 친구들과 만나는 모습을 보면서 문득 솔이가 새로운 환경에 잘 적응하고 있는지 궁금해졌습니다.
혹시 선생님께서 보시기에 솔이가 어린이집 생활이나 친구 관계에서 특별히 신경 써야 할 부분이 있다면 함께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바쁘신데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생님의 답장에는 전화 상담이 제안되어 있었다.
하지만 전화조차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목소리에 감정이 들어가 상담을 흐릴까 봐 걱정됐다.
그래도 고민 끝에 전화 상담을 하기로 했다.
그런데 약속한 날, 결국 나는 펑크를 내고 말았다.
울렁이는 감정을 도저히 다스릴 수가 없었다.
결국 선생님께 죄송하다고 말씀드리고 다시 통화할 것을 약속한 뒤, 그날 나는 햇살어린이집으로 향했다.
햇살 원장님과의 사이가 나빴던 것은 아니다.
어린이집마다 사정은 다르겠지만, 당시에는 무리를 이루는 엄마들로 인해 아이들까지 문제가 될까 염려되어 결국 원을 옮기게 되었다.
그럼에도 원장님은 솔이를 누구보다 오래 보았고, 잘 알고 계시는 분이었다.
그래서 염치 불구하고 용기를 내어 찾아갔다.
솔직히 그게 솔이를 위한 건지, 나를 위한 건지는 모르겠다.
햇살로 가는 동안에도 마음 한쪽에서는 그냥 다시 이곳으로 옮겨버리고 싶었다.
머리로는 그것이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마음은 자꾸 그쪽으로 향했다.
원장님을 만났다.
원장님은 솔이를 반갑게 맞아주셨다.
"솔아, 친구들도 있는데 만나러 갈래?"
"네~."
솔이는 원장님의 손을 잡고 교실로 갔다.
돌아오신 원장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누구에게도 쉽게 할 수 없었던 이야기라고 말하며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염치없지만 솔이를 잘 아는 곳이, 편견 없이 바라봐 주실 곳이 이곳뿐이라 말씀드려 봐요. 저도 엄마다 보니 휘몰아치는 감정을 다루기가 너무 힘들어서 도움을 받고자 왔습니다."
원장님은 말씀하셨다.
"잘 오셨어요, 어머님."
그 한마디가 너무 감사했다.
그렇게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말씀드렸다.
원장님은 한참 이야기를 들으신 뒤 말씀하셨다.
"어머님도 아시다시피 솔이는 시간이 많이 필요한 아이잖아요. 그러니 기다려주셔야 할 것 같아요. 물론 모두가요."
그리고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본인보다 타인을 먼저 바라보는 아이들은 속마음을 말하기 어려울 수 있다고.
자신도 그런 아이였기에 솔이를 보며 이해되는 부분이 있다고 하셨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말씀하셨다.
"어머님이 무너지시면 안 돼요. 옆에서 솔이에게 힘이 되어주세요."
이야기를 마치고 나니 크게 부풀어 있던 불안이 조금은 잦아들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글이 아니라 직접 만나서 이야기해야겠다고.
피하지 말고, 지금 솔이를 보고 있는 선생님과 마주 앉아 이야기해야겠다고.
그렇게 다시 상담 약속을 잡았다.
이번에는 전화가 아니라 직접 만나서 상담하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약속한 날.
마음을 진정시키는 일이 좀처럼 쉽지 않았다.
나는 말을 잘하는 엄마가 아니다.
글로 쓰면서 생각을 정리하고, 그것이 내 것이 되었을 때 비로소 말할 수 있다.
머리로만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가슴에 새겨졌을 때.
나는 준비해 둔 질문지를 계속 들여다보며 어린이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선생님 앞에 앉았다.
내가 그동안 보아온 솔이의 모습들을 최대한 그대로 설명했다.
실제로 있었던 상황을 하나씩 예로 들어 말씀드렸다.
내 이야기를 듣던 선생님은 꾹꾹 참으셨던 눈물을 흘리셨다.
내 설명이 끝난 뒤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어머님 말씀을 들으니, 그동안 '으응?' 하고 조금은 튀었던, 다른 아이들과는 달랐던 부분이 왜 그랬는지 이해될 것 같아요."
그리고 선생님은 그동안 어린이집에서 보아온 솔이의 모습들을 하나씩 들려주셨다.
친구들이 인형 놀이를 할 때면 솔이는 조금 떨어진 자리의 의자에 앉아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고 했다.
혼자 인형을 안고 인형에게 말을 거는 시간도 많았다고 했다.
그리고 선생님이 들려준 이야기는 내가 그날 밤까지 붙잡고 있게 될 그 장면으로 이어졌다.
선생님께서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벽에 붙어 있던 종이가 떨어져 있었다고 했다.
솔이는 조그만 손으로 그 종이를 다시 붙이려는 듯 애쓰고 있었다.
"솔이 뭐 하고 있어?"
"붙이고 있어요."
"떨어뜨렸어?"
"누가 떨어뜨렸어요."
하지만 이후 아이들에게 물었을 때, 누가 만진 것이 아니라 바람에 날려 스스로 떨어진 것이었다고 했다.
또 놀다가 친구의 손이 살짝 스친 순간에는,
"쟤가 나 때렸어요."
라고 말했다고 했다.
선생님이 그 장면들을 하나씩 들려줄 때마다 내 머릿속에는 그 모습이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는 것처럼 그려졌다.
나도 울컥했다.
그리고 문득 한마디가 떠올랐다.
'다행이다...'
내가 보지 못하는 시간에도 선생님이 솔이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이제 혼자 추측하며 불안해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상담을 끝내고 나오면서도 정답은 없었다.
솔이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앞으로 친구들과 어떻게 지내게 될지.
아직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달라졌다.
전처럼 불안만 남아 있지는 않았다.
이제는 솔이를 바라볼 수 있는 공간이 조금 생겼다.
집으로 돌아와 솔이와 저녁 시간을 보냈다.
"솔아, 오늘 어린이집에서 기분이 어떤 하루였을까? 어떤 마음이 많이 들었어?"
"어... 어... 놀자고 했는데 싫다고 했어."
"이런, 친구가 싫다고 했구나. 그럴 때 기분이 어땠어?"
"속상했어."
"그래, 속상했겠다. 그래서 솔이는 친구에게 뭐라고 말했을까?"
"음... 음..."
아무 말도 못 했던 것 같았다.
나는 웃으며 말했다.
"솔아, 그럴 때는 '나랑 놀기 싫은 거야? 왜?'라고 물어보면 좋을 것 같아."
"응."
"그러면 친구가 왜 싫다고 했는지 이유를 알 수 있겠지? 그것부터 해보자."
"응."
"그래, 우리 용기 내어보는 거야."
말하며 솔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리고 다른 날처럼 장난치며 놀기 시작했다.
동물 흉내를 내다가 이번에는 마녀가 되었다.
"으하하하, 나는 마녀다. 그걸 나에게 다오."
솔이가 들고 있던 예쁜 인형을 빼앗을 것처럼 손을 뻗었다.
"안 돼~."
솔이가 도망갔다.
나는 뒤를 쫓아갔다.
"소용없다. 나는 그 인형이 좋아! 내 거야!"
인형을 빼앗으려는 시늉을 하자 솔이가 나에게 뽀뽀를 했다.
"엄마, 내가 구해줄게. 엄마로 돌아와~."
쪽.
"이런, 큰일 날 뻔했군. 소용없다 ㅡ아ㅡ"
이번에는 내가 끄떡도 하지 않자.
"어... 어... 히... ㅇ."
솔이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하는 것처럼 잠시 멈췄다.
나는 웃으며 입술을 쭈 ㅡ 욱 내미는 시늉을 했다.
내 표정을 본 솔이는 무언가 알아차린 듯 다시 나에게 다가왔다.
"쪽쪽 쪽쪽 쪽."
뽀뽀 공격이 시작됐다.
키키키킥.
웃음이 터졌다.
"어! 혹시 또 엄마가 마녀로 변했던 거야?"
"응, 엄마 돌아왔네."
솔이가 나를 꼬옥 끌어안았다.
그리고 늘 그렇듯 상상 친구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누가 이렇게 했고, 누가 저렇게 했고.
그중에서도 악어 친구는 자주 솔이의 이야기 속에 등장했다.
악어가 말을 안 듣기도 하고, 누군가와 놀기 싫어하기도 하고, 때로는 엄마에게 혼내달라고 하기도 했다.
예전 같았으면 그저 아이의 상상놀이라고 생각하며 함께 장단을 맞췄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날은 조금 더 귀를 기울였다.
악어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솔이는 그다음 이야기를 어떻게 이어가는지.
나는 가만히 들었다.
마지막 바카라을 읽고 스르륵 잠이 든 솔이...
조용히 흐르는 자장가 소리에
나는 잠든 아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그 말이 떠올랐다.
'누가 떨어뜨렸어?'
아무도 만지지 않은 것을 솔이는 왜
"누가 떨어뜨렸어요."
라고 말했을까.
솔이에게는 내가 모르는 다른 이유가 있었던 걸까.
그날 나는 답을 알지 못했다.
다만 이제는 그 말을 그냥 지나치고 싶지 않았다.
EP13. 서윤이가 보고 싶어 | 어린이집 ①
https://fishingproductfr.com/@haven-flower/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