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치고 기세라이팅

불안형 인간에게 꼭 필요한 인생의 필살기

by호사


오늘은 뭔가 다리가 무거운데? 습도가 사우나 수준인데 이런 날 뛰다가 쓰러지는 거 아니야? 벌써 4일째 연속으로 뛰고 있는데 하루쯤은 쉬어도 되지 않을까? 휴대전화가 뜨거워질 정도로 일 때문에 통화하느라 진을 다 빼서 손 하나 까딱할 힘이 없는데 쉴까? 여름에는 기온과 자외선 때문에 해가 떠 있을 때 뛰지 않는다. 달리기로 빼놓은 저녁 7시가 가까워지면 머릿속에서 자기 합리화 대잔치가 시작된다. 저녁 6시 30분 무렵부터 7시 언저리까지 뛰지 않아도 될 이유를 영혼까지 끌어모은다. 해야 할 이유보다 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100배는 더 많아도 ‘뛰지 않으면 찜찜해서’라는 거대한 이유 하나가 100가지 이유를 덮어 버린다. 결국 퍼진 정신과 몸뚱이를 주워 담고 꾸역꾸역 러닝화를 신으며 생각한다.

“에이 그래,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30분만 뛰자!”


무거운 엉덩이를 일으켜 운동복을 입고 집 밖을 나서는 순간, 이미 걸려든 거다. 러닝화를 신고 집 밖을 나서면 게임 끝. 무를 수가 없다. 슬렁슬렁 20분 정도 뛰면 몸이 풀리기 시작한다. 얼굴에 부딪히는 바람에 몸속에 쌓인 탁한 기운까지 환기되는 기분이다. 저들도 나처럼 매번 유혹과 씨름하다 겨우 나왔겠지, 싶으면 내적 웃음이 터진다. 처음 약속했던 30분이 가까워지면 다음 단계 가동이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최소 40분은 뛰어야 운동 효과가 있다는데 ‘딱 40분만 뛰자! 이 정도 컨디션이면 뛸 수 있잖아?’라고 밀어붙이고 달리면 신기하게 탄력이 붙는다. 평소 1시간 정도 뛰니까 20분만 더 뛰면 목표 달성이니 조금만 더 뛰자 하고 달린다. 몸은 점점 무겁고, 숨은 차오르지만 저 다리까지만, 저 나무까지만 하면서 나를 달래며 뛴다. 목표했던 다리나 나무에 도착하면 ‘에이 바보! 또 속았지? 다리 말고, 나무 말고, 더 멀리까지 뛸 거다 이놈아!’ 하며 나를 놀린다.


그렇게 평소 달리던 거리를 완주하고 나면 매일 이게 무슨 뻘짓인가 싶다. 매일 나를 달래고, 매일 나를 속이고, 매일 나를 독려하는 이상한 시간이다. 오늘 그랬던 것처럼 내일도 이 기묘한 시간은 반복될 거다. ‘다 뛰고 집에 가면 시원한 보리차가 기다리고 있다.‘ 땀 제대로 흘리고 마시는 보리차가 그렇게 달 수가 없다. 그런 생각으로 나를 꼬드기며 달리다 보면 기세가 얼마나 중요한지 몸으로 느낀다.


평생 ’하기 싫어, 귀찮아, 지겨워 3종 세트‘를 달고 살았다. 내향형 체력 거지에게 미라클 모닝은 개뿔! 내가 멀쩡히 살아 숨 쉬는 자체가 미라클인 인간이었다. 뭔가 하기도 전에 해야 한다는 생각만으로도 지쳤고, 해봤자 안될 거야라는 마인드가 일상이었다. 그러다 보니 될 일도 안 됐고, 몇 번의 부정적인 경험은 새로운 시도마저 두렵게 만들었다. 남들이 하자고 해야 겨우 침대에 달라붙은 몸뚱이를 일으키고, 자발적으로 하는 거라고는 집에 틀어박혀 뒹굴거리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어쩌면 인생은 ‘기세라이팅’인지도 모른다. 가스라이팅은 남을 속이는 거지만 기세라이팅은 나를 속이는 거다. 나는 원래 뭐든 시작하기 전에 안 될 이유부터 찾는 사람이었다. 해봤자 안 될 것 같고, 괜히 시작했다가 지치기는 싫고, 잘하지도 못하면서 애쓰는 것도 피하고 싶었다. 그렇게 생각만 하다 보면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지쳐 버리는 게 일상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조금 달라졌다. 잘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일단 기세로 시작부터 한다. 뛰기 싫으면 ‘딱 30분만 뛰자’ 정도의 가벼운 목표를 가지고 시작한다. 30분 뛰고 힘들면 ‘저 나무까지만’ 나무에 도착하면 ‘여기까지 왔는데 조금만 더’ 이런 식으로 나를 속이며 달리다 보면 어느새 목표 거리가 끝난다.


어쩌면 나는 의지가 약한 사람이 아니라 시작하기 전에 생각이 너무 많았던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이제는 생각이 많아질수록 생각에 잡아먹히기 전, 기세부터 낸다. 근거 있는 자신감은 그나마 갖기 쉽다. 진짜 어려운 건 근거가 없어도 자신감을 끌어내는 일이다. 그러니까 더 기세를 쥐어짜 내야 한다. 근거가 없다? 자신감도 없다? 그럼 일단 기세로 나부터 속인다. 한 발 내딛게 만들고, 그다음은 그때 생각한다. 나에겐 그게 기세라이팅이다.


그래서 오늘도 나에게 최면을 걸 듯 나를 속인다.


해보면 될 것 같아!

이 정도는 할 수 있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아.


늘 그렇듯 근거는 없다. 하지만 일단 기세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