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 한 꼬집의 마법

쓴맛 가득한 날들을 구원할 인생의 짠단 밸런스

by호사


여름의 필수 3대 요소가 있다. 콩국수, 냉면 그리고 팥빙수. 지루한 더위를 견디기 위해 이 음식들을 돌아가며 최소 일주일에 한 번은 먹어야 살 수 있다. 푹푹 찌는 무더위 속 오아시스 같은 그 한 그릇을 마주하면 불구덩이 같은 여름을 버틸 힘이 난다.

지방 소도시로 여행을 갔던 그날도 팥빙수를 먹기 위해 동네에서 유명하다는 시장 귀퉁이 팥빙숫집으로 향했다. 보란 듯이 가게 앞에 쌓아 놓은 팥 자루 기세만 봐도 이 여름을 팥빙수에 기대 여름을 견뎌 보려는 사람들의 간절함이 느껴졌다. 피크시간을 피해 간 덕에 들어가자마자 자리를 잡았다. 메뉴판을 보지도 않고 “난 팥빙수! “를 외쳤다. 동행은 가게를 이리저리 둘러보더니 호박죽을 시켰다. 이 더위에 죽이라고? 의아했지만 평소 몸이 찬 동행에게 팥빙수보다는 호박죽이 필요했나 보다. 패스트푸드 보다 빠르게 팥빙수와 호박죽이 도착했다. 까만 팥빙수 옆에 있어서인지 호박죽이 유독 샛노래 보였다.

속 놀라지 않게 팥빙수 먹기 전에 호박죽으로 따뜻하게 시작하라는 지인의 권유에 호박죽을 한 수저 떠 입에 넣었다. 호박죽은 되직하고 따끈했지만 맛은 다소 밍밍했다. 동행과 나는 물음표 가득한 표정으로 주고받는 당황스러운 동공을 눈치챘던 걸까? 독립 자금을 소매 넣기 하는 독립군처럼 사장님은 테이블 위에 작은 갈색 단지를 스윽 밀어 넣고 말했다.

”소금을 살짝 쳐야 단맛이 올라와요. “


사장님이 시키는 대로 호박죽 위에 단지 안 소금을 한 티스푼 넣고 휘휘 져었다. 커다란 호박죽 그릇에 겨우 이 정도 넣는다고 무슨 변화가 있을까? 의아했지만 전문가의 말을 거역할 수 없었다. 기대 반, 의심 반 마음으로 다시 호박죽을 한 수저 떠 입에 넣었다. 신기하게도 곧 입안에 은은한 단맛이 퍼졌다. 이건 일반 소금이랑은 다른 마법 소금인 건가? 내가 넣은 건 설탕이 아니라 소금이었는데도 신기하게 단맛이 느껴졌다. 팥빙수를 먹으러 갔는데 정작 감동받은 건 호박죽이었다.

설탕을 들이부은 듯 기분 나쁜 단맛이 아니라 짠단 밸런스가 은은하게 녹아 있는 호박죽의 여운은 팥빙숫집을 나와서도 한동안 사라지지 않았다. 왜 소금을 넣으면 단맛이 더 느껴질까? 궁금해 찾아봤다. 소량의 소금이 단맛을 극대화하는 일종의 '맛의 대비 효과(Contrast Effect)' 덕분이었다. 소금 자체가 단맛을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단맛을 더 잘 인식하도록 도와주기 때문이라고 했다.

살다 보면 인생의 쓴맛에 삶이 도배될 때가 있다. 실패, 이별, 탈락, 좌절, 배신, 사고 등등 불행은 다정하게 여럿이 손을 잡고 들이닥친다. 예상치도 못한 순간 다가오는 인생의 쓴맛에 정신이 아찔해지는 순간, 단맛이 간절해진다. 그럴 때 설탕, 꿀, 알룰로스 같은 즉각적인 단맛보다 더 효과적인 건 땀, 눈물 같은 짠맛이다. 많이도 아니다. 딱 한꼬집의 소금 정도면 된다. 운동이나 사우나처럼 땀을 내거나 탈수기에 돌린 것처럼 눈물을 탈탈 털어 몸 밖으로 배출하고 나면 신기한 일이 벌어진다. 좀처럼 느낄 수 없었던 삶의 단맛이 희미하게 느껴진다. 사우나 같은 폭염 속에서도 1시간 넘게 달리며 땀을 빼고 마시는 시원한 물 한 잔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게 된다. 슬픈 영화를 보고 눈물을 펑펑 흘리고 극장을 나왔는데 이상하게 기분이 맑아지고 머릿속이 정리된 후련함에 몸과 마음이 가벼워진다. 모호한 괴로움보다 선명한 쾌감이 나를 압도한다.

땀과 눈물이 피할 수 있으면 피해야 하는 시련이라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땀과 눈물은 삶의 단맛을 느끼게 해주는 꼭 필요한 존재들이었다는 걸 호박죽이 말했다. 인생의 단맛을 느끼려면 땀이나 눈물 같은 짠맛은 필수다. 호박죽 덕분에 땀이 폭발하고 눈물이 터지는 순간이 오면 이제 초연히 받아들일 수 있게 됐다. 땀+눈물범벅 개고생 파티가 임박한 순간이면 이제 이렇게 생각해 버린다.


”내 인생, 얼마나 달콤해지려고 이렇게 소금을 치는 거야? 제법 흥미진진한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