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틋한 시차를 건너며

친구의 전화

by해피가드너



40년 절친 J에게서 전화가 왔다. 마침 느긋한 일요일 오후라 핸드폰에 뜬 익숙한 얼굴을 보고 반갑게 전화를 받았다. “어, 웬일이야?” 그런데 아무 대답이 없었다. 수화기 너머로 훌쩍거리는 숨소리만 들렸다. 늘 유머러스하고 밝은 친구였기에 가슴이 철렁했다. 짧은 순간에 오만 가지 불길한 상상이 머릿속을 훑고 지나갔다.


한참 뒤, 잠긴 목소리가 겨우 새어 나왔다.

“우리 딸이 이제 정식으로 일을 시작했어.” 호주에서 약사가 된 딸의 첫 출근 소식이었다. 축하할 일인데 친구는 말을 잇지 못했다. 내 목소리를 듣는 순간, 애써 참고 있던 울음이 먼저 터진 모양이다.




친구를 처음 만난 것은 대학 1학년 때였다. 피아노를 전공하던 나는 성악과 친구들의 음악회 반주를 종종 하곤 했다. 그날 그녀는 푸치니의 오페라 《잔니 스키키》에 나오는 아리아 ‘오 미오 바비노 카로’를 불렀다. 신입생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깊고 풍성한 목소리였다. 영혼을 울리는 노래에 반해 가까이 지내고 싶었다. 그러나 쾌활하고 인기 많은 그녀는 늘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있어 멀리서만 지켜보며 선뜻 다가가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등교하려고 집 앞에서 7번 버스를 기다리는데 그 친구가 정류장 앞에 서 있었다. 세상에 같은 동네에 살고 있다니. 그날부터 우리는 급속도로 친해졌다. 아침마다 학교 가는 버스를 타고 수다떠는 시간은 어찌나 빨리 가던지 기사 아저씨가 버스 정류장을 그냥 지나가나 생각할 정도였다. 그 친구 덕분에 나의 대학 시절은 별의별 사건과 재미있는 추억으로 가득할 수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그녀는 여고 음악 교사가 되었다. 학생을 가르치고 연주하는 재미에 빠져 결혼은 뒷전이었다. 가끔 걱정이 되어 물으면 "하긴 해야지"라는 대답뿐이었다. 친구는 조금 늦은 나이에 가정을 꾸렸고 마흔이 다 되어서야 기적처럼 딸아이를 품에 안았다. 젖병을 물리던 밤에도 콧노래를 흥얼거렸다는 그 아이는 친구에게 세상에 단 하나뿐인 아름다운 악보였다.


그 딸이 자라 대학생이 되었고, 2학년 무렵 잠시 영어 연수를 한다며 호주로 떠났다. 우여곡절 끝에 그곳의 약학대학에 입학했고 모든 과정을 마친 뒤 약사가 되었다. 자랑스럽고 대견한 일이었다. 하지만 은퇴한 친구가 딸과 가까이 지내려던 소망은 이루어지기 어려워졌다. 딸이 외국에서 자리를 잡을수록 친구에게 돌아올 가능성은 멀어지니 말이다. 가끔 한국에 가서 만나면 많이 외로워했다. “딸이 씩씩하게 잘 지내면 됐지”라는 위로는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했다. 자식이 잘 사는 것과 보고 싶은 것은 다른 문제니까.


나에게 전화를 걸고 울음을 삼키는 그녀를 보자 25년 전의 엄마가 떠올랐다. 그때도 내가 미국으로 떠난 후 수화기 너머로 이런 침묵을 느꼈다. 가끔 통화라도 할 때면 엄마는 우시느라 말을 잇지 못하셨다. 마음속은 슬픔이 가득하셨을 텐데 나에겐 늘 같은 말이었다. "밥 잘 먹고 건강만 해라. 너는 잘할거다."


친구의 마음을 다독여주었다.

"딸이 잘하고 있는 건 네가 지극정성으로 키워낸 예쁜 훈장이니 너무 서운해하지 마."

수화기 너머로 길게 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이내 늘 보던 그녀답게 맑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게 말이다. 건강하고 열심히 살아가는 아이 두고 내가 괜히 주바카라이지.” 신입생 시절 강당을 가득 채우던 그녀의 깊었던 목소리처럼 들렸다.


전화를 끊고 어두워진 창밖을 바라보았다. 아침저녁으로 찬 바람이 불어서일까. 한국에 계신 엄마가 그립고, 풋풋한 청춘을 함께 보낸 그 시절이 그립다. 멀리 애틀랜타에 가 있는 딸의 얼굴도 눈앞에 아른거린다. 그렇게 우리는 누군가를 떠나보내고 또 누군가를 그리워하며 살아간다. 저마다의 애틋한 시차를 건너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