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쾌한 2센티미터

by해피가드너



오랜만에 미용실에 갔다. 내 머리카락은 반곱슬에 숱도 많아 자주 손을 댈 필요가 없다. 그날도 상한 머리끝을 다듬고 당당하게 자리 잡아가는 흰머리나 얌전히 덮어줄 생각이었다. 적어도 미용실 의자에 앉기 전까지는.


“손님, 오늘 머리는 어떻게 해드릴까요?”

원장님의 형식적인 질문에 생각지도 않던 엉뚱한 말이 툭 튀어나왔다.

“글쎄요… 이번엔 머리를 아주 싹둑 자르고 쇼트커트를 해볼까요?”


아차 싶었다. 내가 언제부터 쇼트커트를 하려 했던가. 얼마전에 만난 친구의 한마디가 무의식적으로 떠올랐기 때문일 것이다. “얘, 나이 들면 얼굴선도 처지는데 긴 머리 고수하면 더 늙어 보인다? 짧게 잘라야 산뜻해 보여.” 그렇지, 이 나이에 주바카라맞게 긴 머리라니. 남들이 뒤에서 나잇값 못 한다고 손가락질하진 않았을까. 그녀의 말대로 쇼트커트를 하면 처진 볼살도 올라붙어 보이고, 단정한 중년 여성으로 거듭날 것만 같았다.


“어머, 쇼트커트요? 진짜 자르시게?”

미용실 원장님이 잘 어울릴 거라며 커트 가위를 들었다. 그런데 막상 거울 속 내 모습은 전혀 딴판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깨 아래로 굽이치는 머리카락은 여전히 윤기가 흘렀고 풍성함도 근사해 보였다. 솔직히 말해 나는 내 긴 머리가 좋았다.


“아, 아니요! 잠시만요. 그냥 긴 머리로 두어야겠어요.”

원장님이 빗을 든 채 내 머리와 거울 속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가위는 출발도 못 한 채 내 머리 위에서 갈 길을 잃었다. 나의 갈팡질팡을 눈치챈 원장님이 웃으며 타협안을 제시했다.

“염색부터 할 테니까 약 바르는 동안 천천히 결정하세요.”


진한 갈색 염색약이 정수리부터 관자놀이까지 촘촘하게 발라졌다. 미용실 거울 속에는 먹구름을 머리에 뒤집어쓴 낯선 여인이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세상에나. 이게 무슨 국가 중대사라고 머리카락을 두고 고민에 빠져 있는 꼴이라니. 스스로 생각해도 참 가관이었다. 하지만 머릿속은 여전히 긴 머리와 쇼트커트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했다.


젊은 시절에는 이렇지 않았다. 마음에 드는 옷은 망설임 없이 입었고, 단발머리가 하고 싶으면 미련 없이 잘랐다. 얌전한 외모와는 달리 남들이 어떻게 보든 내가 좋으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대체 언제부터였을까. 사소한 선택을 할 때조차 ‘남들의 시선’과 ‘나이에 맞는가’라며 스스로를 검문하곤 했다. 철없는 어른으로 비치지는 않을까 하면서. 머리속은 스무 살의 나까지 분주히 오갔고 어느새 이마 가장자리에는 염색약이 세월의 흔적처럼 말라가고 있었다.


“손님, 이제 머리까지 헹궜으니 커트할게요. 어떻게 할 건지 정하셨어요?”

자리로 돌아와 앉아 젖은 머리끝을 천천히 쓸어내려 보았다. 손가락에 감기는 머리칼의 촉감은 어색하지 않고 여전히 좋았다. 어떤 모자를 눌러써도 멋스럽게 어울리고. 무엇보다 이 여성스러운 분위기를 포기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 남들이 나를 산뜻하게 보든 나잇값을 못 한다 한들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원장님, 상한 끝부분만 딱 2센티미터 잘라주세요. 쇼트커트 말고 다듬기만요.”

“어머, 쇼트커트 안 하시고요?”

“네. 저 아직 이 긴 머리가 좋거든요. 조금 더 즐겨볼래요.”

원장님은 기다렸다는 듯 “사실 손님은 긴 머리가 훨씬 잘 어울려요!”라며 영업용 멘트를 던졌다. 나는 그 친절한 변심을 너그럽게 모르는 척해주었다.


싹둑, 싹둑. 가윗 소리가 경쾌하다. 어깨 위로 떨어져 내리는 머리카락 조각들을 바라보는데 알 수 없는 쾌감이 느껴졌다. 고작 머리카락 2센티미터를 잘라낸 것뿐인데 어떤 검문소도 거치지 않고 국경을 넘어선 기분이 들어서다. 쇼트커트를 한다고 해서 흘러내린 얼굴선이 다시 스무 살처럼 팽팽해질 리 없고, 긴 머리를 고수한다고 해서 지나간 청춘이 돌아올 리도 만무하다. 하지만 뭔가 당당한 기분이 들었다.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내 마음이 가는 대로 살겠다는 나름의 표현 같달까.


미용실 문을 열고 나서자 사르르 바람이 다가와 머리카락 사이를 간지럽히며 지나갔다. 어깨를 스치는 긴 머리칼이 정답고도 가벼웠다. 비실비실 웃음이 나왔다. 때로 남의 눈치를 보고 주눅 좀 들면 어때. 이렇게나 경쾌한 마음이 드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