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전반기에는 유독 바쁜 시간을 보냈다. 첫 개인 바카라과 두 권의 공저를 출간하느라 집중을 한 데다 한국에 두 번이나 다녀왔다. 중요한 결정을 해야 했고, 집안일까지 겹쳐 하루하루가 정신없이 흘러갔다. 꾸준히 해오던 운동과 독서, 소품 만들기도 더 급한 일을 하느라 미뤄질 수밖에 없었다. 매년 이른 봄이면 빠뜨리지 않던 씨앗 파종마저 건너뛰었다.
철저히 지켜오던 일상이 하나둘 흐트러지자 끝내지 못한 숙제가 남아 있는 듯 마음 한쪽이 불편해졌다. 많은 일을 해냈는데도 무언가를 놓치고 있다는 허전함은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정원이 말을 걸었다. 내가 놓칠 뻔한 계절을 보여 주면서.
가장 먼저 장미가 나를 불렀다.
오월 어느 날, 무심코 창밖을 내다보았다. 연분홍 덩굴장미가 어느새 창가의 아치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짙은 자줏빛 장미도, 겹겹의 분홍 장미도 저마다의 자리에서 한창이었다. 그제야 오월이 깊어졌음을 알았다. 하던 일을 멈추고 밖으로 나갔다. 장미는 묵은 가지에서 새 가지를 뻗어 올리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한껏 피어난 얼굴을 보여 주었다. 흐드러진 장미의 달큰한 향이 나를 감싸자 몸 속 어딘가에 있던 긴장이 스르르 풀리는 듯했다.
유월이 되자 탐스러운 수국이 피기 시작했다.
손바닥만 한 묘목으로 시작한 수국을 해마다 조금씩 늘려주었더니 어느새 정원 한쪽을 가득 채웠다. 땅의 기운에 따라 해마다 꽃 색도 조금씩 달라지는데, 올해는 푸른빛과 보랏빛, 분홍빛이 한데 어우러져 몽실몽실한 꽃구름을 만들었다. 작은 꽃들은 서로 기대어 하나의 커다란 꽃송이가 되었다. 초봄 파종을 건너뛰어 정원이 허전할까 걱정했던 마음이 무색할 만큼 풍성했다. 내가 잠시 손을 놓은 사이에도 정원은 제 방식으로 자라고 있었다.
조금 지나니 배롱나무의 시간이 왔다.
칠월의 배롱나무가 뜨거운 햇살 속에서 천천히 꽃을 피웠다. 장미와 수국의 시간이 지나도록 서두르지 않더니 한여름이 깊어져서야 가지마다 진분홍 꽃을 올렸다. 넓고 길게 퍼진 가지 아래 작은 의자를 놓고 꽃그늘에 앉아 바카라을 읽고 커피를 마셨다. 소나기라도 쏟아지는 날이면 테이블 위에 떨어진 분홍 꽃잎마저 한 폭의 풍경이 되었다. 배롱나무에게 칠월은 늦은 시간이 아니라 이제 막 시작된 제철이었다.
지난 몇 달을 정신없이 보내는 동안 장미는 아치를 가득 채웠고, 수국은 정원 한쪽을 풍성하게 물들였으며, 배롱나무는 넉넉한 꽃그늘을 펼쳤다. 돌보지 못해 정원이 볼품없을 거라 걱정했지만 햇빛과 비와 시간이 묵묵히 제 몫을 다하고 있었다. 하던 일을 해내지 못하면 모든 것이 어긋날 것처럼 마음을 졸였으나 정원은 아니라고 말해주었다. 나뭇가지 사이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꽃그늘 아래 의자에 조금 오래 앉아 있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