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욕심 없는 평강공주

by조하나


계단 첫 꺾임에서 벌써 숨이 찼다. 어제 점심으로 먹은 삼각김밥 반쪽이 아침까지 위에 걸려 있는 기분이었다. 이번 달 쓸 수 있는 생활비를 계산해 본 뒤로 끼니 쪽이 먼저 줄었다. 사무실 문을 열고 가방을 내려놓기도 전에 휴대폰이 울렸다. 며칠 전 내가 걸었던 번호가 액정에 떠 있었다.



윤소리 기자님 맞으시죠. 낮고 느긋한 목소리가 먼저 알은체를 했다. 며칠 전에 들은 그 목소리였는데 두 번을 들어도 얼굴은 떠오르지 않았다. 체르팔 소속사입니다. 알려드릴 게 있어서요. 밴드 공연비, 오늘 아침에 입금했어요. 전액이요. 제가 떼어먹은 게 아니라 정산이 좀 늦은 것뿐이에요. 확인하시라고 전화 드렸습니다. 일부를 약속한 지 며칠 만에, 전액이었다. 몇 년을 떼먹은 돈을 그는 이렇게 빨리도 갚았다. 겁먹은 사람의 계산은 언제나 빨랐다.



제가 확인할 일이 아닌데요. 그건 밴드 쪽에서 하겠죠, 하니 그가 웃었다. 그래서 말인데, 기사엔 소속사 이름이든 밴드 이름이든 안 나가는 걸로 하죠. 서로 좋게 끝낸 거니까. 기자님이 도현이랑 가깝다는 얘기는 저도 들었어요. 그러니까 더 이해해 주실 거라고 봅니다. 사적인 사정으로 이러는 게 아닐 거라 믿고요. 수화기를 쥔 손끝이 차가워졌다. 누가 그 얘기를 했는지, 어디까지 알고 하는 말인지, 물을 건 많았지만 묻지 않았다. 묻는 순간, 나는 그 사람에게 놀아나게 된다. 옆자리 동료는 삼각김밥 비닐을 한 겹씩 아주 천천히 벗기고 있었다. 내 쪽은 한 번도 보지 않았다.



누구와 가까워서 하는 일이 아니에요. 목소리가 생각보다 높게 나갔다. 사장님이 체르팔 돈만 떼먹은 게 아니잖아요. 약하고 따질 줄 모르는 사람 뒤통수 치는 게 나쁜 짓이라서 한 거예요. 몇 년을 야금야금 떼먹어 놓고 이제 와서 이름 빼 달라는 것도 거래죠, 사장님. 입금은 받을 걸 받은 거지 제가 고마워할 일이 아니고요. 이름 안 쓰는 건 처음부터 제 판단이었어요. 사장님 때문이 아니라요. 앞으로 쓸지 말지도 제가 정해요.



수화기 너머가 잠깐 조용해졌다. 숨소리만 남았다. 기자님 참 어리시네. 저 안 어려요. 나는 곧바로 받아쳤다. 이 바닥에선 어린 거예요. 세상 물정을 이리 몰라서야. 그리곤 그가 먼저 끊었다. 엄마는 늘 '서른씩이나 넘어서'라는 말로 내가 얼마나 나이를 많이 먹었는지, 내가 얼마나 돈을 많이 벌어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지 끊임없이 상기시켰다. 그런데 벼룩의 간을 떼먹듯 인디밴드 공연비를 몇 년씩 횡령한 이 사기꾼은 나에게 계속 어리다고 했다. 엄마와 사기꾼이 직접 만나 결론을 내면 좋을 텐데. 나는 잠시 휴대폰도 수화기와 몸체가 있는 전화기 같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들고 있던 수화기를 있는 힘껏 몸체에 내려칠 수 있을 것이다. 동료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삼각김밥 하나를 내 바카라상 모서리로 밀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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