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 잊는 것이 아닌 기억하는 것

기억 전달자 (The Giver)

by양혜원

기억이 없는 세상은 과연 행복할까.

고통스러운 기억도 없고, 전쟁의 참혹함도 없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도 없다.
누군가를 미워할 이유도, 질투할 이유도,

깊이 사랑할 이유도 없는 세상.

모두가 평온하게 살아간다면

그곳은 정말 이상적인 슬롯일까?





로이스 로리의 『기억 전달자』를 읽으며 나는 오래전 읽었던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를 떠올렸다.


둘 다 인간의 삶을 통제하는 디스토피아를 그리고 있지만, 굳이 표현하자면 『멋진 신세계』가 디스토피아의 매운맛이라면 『기억 전달자』는 조금 순한 맛에 가깝다.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소설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바카라장을 덮고 나니 오히려 순한 맛이어서 더 오래 생각하게 됐다.



기억이 없는 세상



주인공 조너스가 사는 슬롯에는 고통이 없다.

사람들은 정해진 규칙에 따라 살아간다. 직업도, 가족도, 삶의 방식도 슬롯가 결정한다. 감정은 통제되고 기억은 사라졌다.

전쟁도 없고 굶주림도 없다. 하지만 사랑도 없다.

조너스는 열두 살이 되던 해 ‘기억 보유자’라는 특별한 직업을 부여받는다. 그리고 기억 전달자를 만나면서 이전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감정들을 하나씩 받아들이게 된다.

- 눈 위에서 썰매를 타는 기쁨.
- 흑백이었던 세상이 채색되는 놀라움
- 사랑의 따뜻함.

그리고 전쟁의 고통과 죽음의 공포.

처음에는 행복한 기억을 받아들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조너스는 인간이 살아가는 데에는 고통스러운 기억조차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고통을 모르고서는 행복이 무엇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조너스는 자신이 살아가는 슬롯의 질서에 의문을 품기 시작한다.

사람의 생과 사마저 슬롯의 효율에 따라 결정하는 세계. 그곳에서 조너스는 탈출을 결심한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이야기는 단순한 청소년 소설을 넘어선다. 우리가 당연하게 누리고 있는 감정과 기억, 자유가 사실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묻게 하기 때문이다.


로이스 로리 작가 (출처 Lois Lowry)


작가의 삶


나는 이 바카라을 읽은 뒤, 로이스 로리 작가의 삶을 찾아보았다. 그리고 조금 놀랐다. 『기억 전달자』가 단순히 작가의 상상력에서 탄생한 이야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로이스 로리는 스물다섯 살에 언니를 암으로 잃었다. 타지에서 결혼 생활을 하던 중 전해진 언니의 죽음이었다. 이후 그녀는 네 아이를 키우면서 틈틈이 글을 썼고, 마흔 살이 되어서야 첫 작품을 출간했다.

하지만 삶은 또 한 번 그녀에게 상실을 안겼다. 공군이었던 아들이 사고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기체의 케이블 결함으로 발생한 사고였다.

사랑하는 사람을 두 번이나 떠나보낸 작가에게 ‘기억’은 어떤 의미였을까?

아마도 잊고 싶은 것이면서 동시에 절대로 잊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었을까.

그녀는 요양 시설에 있던 아버지를 찾아가 언니에 대한 기억을 되살려주기 위해 노력했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기억이 사람과 사람 사이를 연결한다는 사실을 깊이 느꼈고, 그것이 훗날 『기억 전달자』라는 작품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나는 이 소설을 다시 바라보게 됐다.

주인공 조너스에게 기억을 전달하는 기억 전달자는 단순한 소설 속 인물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작가 자신이 오랜 시간 기억을 붙잡고 살아온 사람이었기 때문에 만들어낸 인물이었을지도 모른다.

상실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기억되는 것.

생각해 보면 기억에는 이상한 힘이 있다. 우리는 때로 고통스러운 기억을 잊고 싶어 한다. 하지만 완전히 잊어버리는 순간, 그 사람과 함께했던 시간까지 사라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래서 기억은 상실의 반대편에 있는 것이 아닐까.

사람은 떠나도 기억은 남는다.

그리고 그 기억은 다음 세대로 건너간다. 과거의 기쁨과 슬픔, 전쟁의 상처와 사랑의 흔적까지도 누군가에게 전달될 때 비로소 역사가 된다.

『기억 전달자』에서 기억이 한 사람에게만 보존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기억을 공유해야 우리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다. 아팠던 역사를 기억해야 평화를 소중히 여길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본 기억이 있기에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의 소중함도 알 수 있다.



박경리 작가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박경리 작가와의 연결 고리


로이스 로리의 삶을 따라가다 보니 나는 자연스럽게 박경리 작가를 떠올릴 수 있었다.

두 작가의 삶은 서로 다르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깊은 상실을 작품으로 승화시켰다는 점에서 닮아 있었다.

박경리 작가 역시 남편과 아들을 떠나보내야 했다. 그리고 전쟁이 남긴 상처와 인간의 삶을 오랫동안 작품 속에 담아냈다.

어쩌면 어떤 작가들에게 문학은 단순히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잃어버린 사람을 기억하는 방법이었고, 감당하기 힘든 시대를 견디는 방법이었으며, 자신이 경험한 아픔을 다음 세대에게 건네는 방법이었을 것이다.

로이스 로리 역시 상실과 기억을 느슨하게 연결하며 『기억 전달자』를 시작으로 『파랑 채집가』, 『메신저』, 『태양의 아들』로 이어지는 4부작을 완성했다.

그녀가 평생 경험했던 상실은 사라지지 않았다. 대신 이야기가 되었다.



『기억 전달자』가 독자에게 주는 메시지


『기억 전달자』를 읽고 나서 내가 가장 오래 생각했던 것은 의외로 ‘행복’이었다.

고통이 없는 것이 행복일까? 아니면 고통까지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것이 행복일까.

우리는 지금 너무 많은 것을 당연하게 누리고 있다.

자유롭게 사랑할 수 있고, 원하는 바카라을 읽을 수 있고, 또 내가 원하는 일을 선택할 수 있고, 과거의 역사를 찾아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가진 자유가 언제나 당연했던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전쟁을 겪었고, 누군가는 가족을 잃었고, 누군가는 자신이 겪은 시대의 아픔을 기록으로 남겼다. 그 기억들이 다음 사람에게 전달되었기에 우리는 과거를 알고 현재를 살아갈 수 있다.

그래서 기억은 과거를 위한 것이 아니라 어쩌면 미래를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기억하지 않는 슬롯는 편안할 수 있지만, 같은 실수를 반복할 수 있다.

반대로 기억하는 슬롯는 때때로 불편하다. 그러나 그 불편함 속에서 우리는 더 나은 미래를 선택할 수 있다.

『기억 전달자』가 내게 남긴 것은 결국 이것이었다.

우리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고통까지 기억할 필요가 있다는 것!

기억은 혼자 간직할 때보다 서로에게 전달될 때 더 큰 의미를 갖는다는 것도 말이다.

오늘 내가 누리는 자유와 평온 역시 누군가의 기억 위에 세워져 있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의 행복을 당연하게 여기지 말아야겠다.



기억하고,

배우고,

다음 사람에게 전해야겠다.


우리가 살아온 시간을 다음 세대에게 건네는 것. 어쩌면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역사일지도 모르겠다.

참고로 『기억 전달자』는 2014년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하지만 가능하다면 영화를 보기 전에 먼저 바카라을 읽어보기를 권하고 싶다. 조너스가 처음 눈 위에서 썰매를 타던 순간처럼, 바카라을 읽으며 내가 처음 마주하게 되는 그 기억은 영화가 대신 가져다줄 수 없는 것이니까.


출처: 네이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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