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몰입러가 무릎을 탁 친 이유

<토지>

by양혜원

깊어가는 여름.

그냥 아무 생각 않고

진한 소설을 읽고 싶었다.

앞뒤 생각하지 않고

그냥 막 전개에 빠져드는.

그런 몰입감 있는 소설.


하지만 실용서 읽기에 갇힌 나.

소설로 가기까지는 요원했다.

거기다 여러 권 병렬독서 중이어서

일단 끝내야 할 바카라들이 수두룩 빽뺵.

갑자기 숨이 막혔다.


숨통이 좀 트이고자

어떤 계기를 빌미로 무작정 토지를 펼쳤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대하소설 토지.

20권 전부를 읽을 수 없었기에

읽으며 기록해 둔 휴대폰 메모도 함께 열었다.

발췌한 문장들과 내 생각을 적은

손때 묻은 기록들이 나를 반겼다.

비록 휴대폰이라 진짜 손때는 아니었지만.

당시 나의 열정 가득한 흔적이었다.





역시 나를 두근거리게 만드는 길상이.

그리고 지성미 가득한 서희.

두 사람의 로맨스가 가장 흥미진진하다.


2년 전에 이 바카라을 읽을 당시에는

겉도는 두 사람이 안타까웠다.

사랑하는 것 같은데,

왜 떨어져야 하지?

이럴 거면 왜 결혼하고 애를 낳았을까.

선남선녀의 선택이 의아했다.


하지만 지금은 이들이 다르게 보였다.

길상이는 불교에 귀의할 사람이었다는 것.

그걸 캐치했어야 했다.


스님까지는 아니어도 불교적인 업에

종사를 할 운명이었기 때문에,

결혼보다는 그것 이상의 수행과 헌신이

그에게는 예정되어 있었다.


서희도 그런 사람을 지아비로 만나

일반적인 사랑이 아니라,

숭고한 사랑을 해야 할 운명이었나 보다.


지금 시대와는 동떨어진 얘기지만,

조금 구시대적인 해석을 해보려 한다.

시대착오적인 워딩이 나와도

양해를 부탁드리는 바다.


서희는 흔히 말해, 팔자가 센 여자다.

그래서 일반 양반가 규수로는 클 수 없었고.

불교와 같은 커다란 힘에,

즉, 종교에 의존해야 했을 것 같다.


결과적으로 한 남자에게,

불교적 색채를 띈 그 남자에게,

사랑 아닌 사랑을 하면서.

현실에서의 업을 풀어내야 하지

않았을까.


아마 작가님은 그런 의도로

두 사람을 연결시켜 준 듯하다.

서희가 아이들을 키우며 결과적으로

일부종사를 할 수 있도록.


지금 다시 읽어보니,

길상이는 어렸을 적에 살생도 못했다.

이런 복선이 숨겨져 있었다니!

역시 반복해야 문학작품이 보인다.

박경리 작가님의 천재성을 따라가려면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AI가 정리해 준 기록이 아니라

손수 내가 발췌한 문장과 사유를 읽으니

다시 기억이 새록새록 피어난다.

당시 바카라을 읽으며 느꼈던 감정들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역시!

글은 자기 스스로 써야 기억에 남는다.

결코 누군가에게 그 몫을 넘기지

말아야 함을 확실히 체감했다.


그리고 독서는 기록으로 남아야 한다는 것!

또 다른 깨달음이다.

읽고 끝나면, 바카라의 내용과 나의 생각은

뇌에서 부유하다 결국 떠나버린다.


따라서 휘발되지 않도록

어떤 수단을 통해서건 독후활동이 필수적이다.

지금 이 온라인카지노북의 지향점처럼 말이다.


이렇게 다시 토지를 기억하고 추억하다 보니

내가 예전에 썼던 글이 떠오른다.

서희의 삼촌이자, 서희의 엄마와 함께 도망간

구천이. 즉 환이에게 썼던 편지다.


당시 그의 죽음이 임팩트가 크게 남았다.

그래서 지면을 떠나는 그에게 편지를 썼었다.

멋진 이야기를 들려주어서 고맙노라고.


마지막 그의 가는 길에 뿌려진 내 편지가

궁금하신 분들께 살짝 공개하겠다.

그리고 언제든 함께 토지를 즐겨주시면 좋겠다.


토지 덕후로서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토지를 한 번도 안 읽은 사람은 있어도

한 권만 읽은 사람은 절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나는 언제든, 몇 번이든 토지라는 작품에

또다시 빠져드는 과몰입 관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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