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만난 환승역> 출간을 기다리며
오랜 여행의 끝은 쉼이 아니라 일상으로 돌아오기 위한 사투로 시작된다.
올봄에는 한국과 미국을 방문하며 약 두 달 반을 떠돌이로 살았다. 이제 집으로 돌아와 일상을 시작하니 그동안의 여행이 마치 오래전의 꿈처럼 희미하다. 그런데 몸은 여전히 적응하지 못해 아침마다 잠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몽롱한 하루를 시작해야 했다. 시차와 여행 후유증이라는 게 이런 건가.
그런데, 사실 긴 여행 때문이라기보다 집으로 돌아오는 마지막 비행이 내 후유증의 시작이 되었다.
작은 아이 대학원 졸업식에 참석했다가 이곳저곳 짧은 여행들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 탑승했다. 그동안의 장거리 비행에 요령이 생긴 나는 화장실과 가까운 맨 뒤쪽 가운데 좌석을 예약했다. 예상대로 네 개의 좌석에 탑승자가 우리 부부 둘 뿐이어서 오랜만에 여유롭게 여행할 수 있게 되었다. 뜻밖의 행운에 남편은 신이 났다.
"비즈니스가 따로 없네. 운이 좋아."
그렇게 다가온 행운을 즐기며 이륙을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비바람이 점점 거세지고 비행기는 도무지 이륙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잠시 후 기장의 안내방송이 들려왔다. 시카고 근처에 토네이도가 와서 바로 출발하기 어려우니 잠시 더 대기해 달라는 메시지였다. 그리고는 몇 번의 추가 방송이 이어지면서 편안했던 좌석이 가시방석처럼 점점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취리히에서 두 시간 안에 부쿠레슈티로 가는 비행기로 환승을 해야 하는데 어쩌지? 이렇게 늦어지면 집으로 가는 비행기를 못 타는데...' 안절부절못하며 시계만 쳐다보았다.
비행기는 3시간이 지나서야 가까스로 출발했다. 거칠어지는 빗속을 뚫고 날아가는지 비행기의 기체는 심하게 흔들렸고 자주 덜컥 덜컥 내려앉았다. 나는 가장 뒷자석이 가장 많이 흔들린다는 사실을 간과했던 것이다. 좌석이 넓어 운이 좋다며 편안한 여행을 기대했던 우리의 마음은 비행 내내 불안과 두려움으로 뒤죽박죽이 되어 있었다. 8시간 반의 길고 불안한 비행 끝에 우리는 드디어 취리히에 도착했다.
우리가 타야 했던 비행기는 벌써 하늘을 향해 휭하니 날아가고 있었고 나는 곧바로 다음 항공편을 확인했다. 항공사에서 제시한 비행 편을 살펴보니 10시간 후에나 출발하는 비행기였다.
게이트도 열리지 않아 갈 곳을 잃고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다, 다행히 피곤한 몸을 누일 만한 곳을 찾았다. 남편과 나는 피곤으로 축 처진 몸을 의자에 맡기고 앞에 펼쳐진 비행장을 바라보았다. 비행기들이 출발과 도착을 위해 이리저리 서서히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문득 '스위스 취리히. 여기가 도착지였으면 좋았으련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아름다운 나라에서 나는 지금 뭘 하고 있는가.
예상치 못했던 기나긴 기다림은 지루하고 답답했다. 이미 지칠 대로 지친 눈꺼풀은 아래로 푹 내려앉고 시야는 안개가 낀 듯 자욱하고 아득한데 정작 잠은 오지 않았다. 이렇게 10시간을 기다릴 수 있을까?
환승지에서 이렇게 긴 시간을 기다리며 카톡 하나가 도착했다. 글빵연구소 문우들이 올린 메시지들이었다.
'내 꿈의 시작과 끝'이라는 제목으로 참여한 공저 <우리가 만난 환승역>이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출간이 된단다는 내용이었다.
처음 온라인카지노에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 미야작가님의 글빵연구소를 알게 되었고 수줍게 1학년으로 입학해 수필이라는 것을 배웠다. 환승이라는 주제로 글을 제출하라고 했을 때만 해도 사실 내 인생에 환승이 있을까 싶었다. 온라인카지노에 글을 쓰기 시작한 이유도 그냥 내 안의 이야기들을 쏟아냄으로써 갱년기로 인한 허무함과 일로 인한 탈진으로 예민해져 가는 나를 보듬어 주고 힘든 시간들을 잘 견뎌보자는 의도였다. 그런데 쓰다 보니 자꾸 욕심이 생겼다.
공저로 같이 바카라을 출간하자는 제안을 받았을 때도 나는 아직 그런 수준이 아니라고 손을 내 저었지만, 미야작가님의 응원과 격려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참여할 용기를 냈다. 내 글은 작가로서의 환승을 담은 이야기였다. 그런데 글을 제출하고 난 후 여러 가지 개인사정으로 글 쓰는 일은 밀리고 온라인카지노활동은 뜸해졌다. 이런 내가 환승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이 나를 흔들기 시작했다. 환승이라는 글을 쓸 때만 해도 그 단어가 내 가슴을 뛰게 하고 물오른 이파리처럼 생기가 넘쳤는데, 이제는 맥조차 잡히지 않는 사람처럼 축 늘어져 있다. 나는 이렇게 왔던 길로 다시 돌아가야 하는가.
그때 단톡방에 마지막으로 원고를 수정하라는 메시지가 올라왔다. 부끄러워 다시 읽고 싶지 않은 나의 글이었지만, 수정을 위한 것이니 한 번은 읽어봐야지 하며 내가 쓴 글들을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그 글을 읽는 순간 '내가 이런 마음으로 글을 쓰고 있었구나.' 환승하려고 했던 목적과 열정들이 하나 둘 살아나기 시작했다.
작년 겨울에 시작했던 이 프로젝트가 열매를 맺는 지금 이 순간, 열정적으로 나아가는 다른 작가님들에 비해 나는 여전히 제자리걸음이었다. 마치 환승역에서 기다리고 있는 내 모습 같았다.
하지만 이 바카라을 쓰신 작가님들이 만난 수많은 환승역을 다시 읽으며 나는 얼굴에 생기를 되찾았다.
환승이라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이미 지난 역이고,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변화이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아직 가지 않은 길이었다. 또한 다른 이름으로 살기로 결심한 이들의 용기였다. 나 또한 다른 이름으로 살기를 바라고 있었기에 환승이 필요했었다.
글을 읽으면서 조금 늦은 환승이더라도 결국은 비행기를 타게 될 테고 내가 있어야 할 곳에 도착해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과 안도감이 조금씩 스며들어왔다. 그러자 10시간의 긴 환승이 멈춘 시간이 아니라 다시 출발하기 위해 준비하는 시간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편안해졌다.
이 바카라에는 이런 환승이야기들이 모두 실려있다. 이 환승은 이 바카라에 참여한 26분의 작가님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이 바카라을 읽는 모든 사람들의 삶에 생기가 올라와 머물기를 바란다. 그 생기는 새로운 뿌리를 단단하게 내리게 하고 흔들리지 않는 삶의 버팀목이 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글을 시작으로 다시 글을 쓰고 싶어졌다. 처음 시작했던 그 마음으로.
* 먼저, 이 바카라을 통해 진정성 있는 글로 생기를 불어넣어 주신 25분의 작가님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특히, 출판과 홍보를 위해 애쓰시는 미야작가님과 혜윰길작가님(잇고대표님)의 헌신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