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소풍 | 피크닉 공원에서 | 행운 가득 냄비
저는 사람을 잘 사귀는 편입니다. 뭐, 특별한 비법이 있는 건 아니고요, 일단 먼저 다가가서 인사를 잘합니다. 인사를 엄청 잘해요. 인사하는 걸 좋아하거든요. 어렸을 때부터 그랬어요. 눈이 마주치거나, 지나칠 때 눈이 마주치면 꾸벅, 혹은 가볍게, 인사하는 게 좋더라고요.
아이를 낳고 아이들이 점점 커가면 놀이터를 자주 나가게 됐는데, 그땐 아이들이 저의 또 다른 이름표가 되더라고요. 산으로 들로, 어디든 천방지축 뛰어가는 아이들을 따라가다 보면 무수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두 번 세 번 만나면 그땐 왠지 더 친근한 기분이 들어요.
일산으로 이사 올 때도 그랬어요.
서울에서 살다가 여기에 살아보고 싶어서(엄청 단순한 이유 ^^) 이사 왔는데 다들 첫 번째 질문이
왜 일산으로 이사 왔냐
누구 연고라도 있냐
다들 이걸 제일 먼저 물어보더라고요.
아니요. 아무도 없는데요. 친정 부모님은 모두 서울에 사시고 시댁도 별내예요. 위로 한 살 터울 언니가 있는데 언니는 영국에서 산지 20년이 넘었고요.
저는 코로나 시절, 대단지 아파트에 살았는데 거기에 하나밖에 없는 '빗물 습지 공원'에 사람이 바글바글한 걸 보고 조금 한적한 곳에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마스크를 좀 벗고 산바카라하고 싶었거든요.
아이들이 마스크를 내내 끼고 다니는 모습도 안쓰럽고요.
막연히 한 생각인데 찾아보니 일산이 저에겐 그런 곳이더라고요.
이렇게 대답하면 다들 깜짝 놀란 반응을 보입니다. 오히려 친정 근처에 살다가 반대로 더 멀리 이사 온 걸 신기하게 여기기도 하고요. 저를 용기 있게 보는 사람들도 특이한 시선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뭐 상관없었습니다.
이왕 이렇게 여기에 이사 온 거, 진짜 드넓은 공원에 저랑 아이들밖에 없는 시간을 실컷 누리고 싶었거든요.
그리고 그렇게 했습니다. 이게 중요한 거죠.
집 근처 5분 거리에 공원만 네다섯 군데가 되지만 그중에 저희 가족이 가장 좋아한 곳이 바로 이곳 피크닉 공원입니다.
드넓은 자연은 물론이고 늘 사람이 저랑 아이들, 신랑과 함께일 땐 네 식구 밖에 없었거든요.
마스크를 벗고 마음껏 숨을 쉬었습니다.
겨울에 이사를 와서 바람은 몹시 차가웠지만 높은 나무들 사이로, 신선한 바람을 쐬는 게 정말 좋더라고요. 제대로 피톤치드 한다며 걷고 뛰고 아이들과 축구도 하고 술래잡기도 하고 햇볕이 좋을 땐 김밥이나 과일, 과자 같은 걸 싸가서 진짜 말 그대로 피크닉을 즐겼습니다.
낮이고 밤이고, 언제 가도 갈 때마다 좋았어요. 그 넓은 공간을 우리 가족들만 쓴다는 게 미안할 정도로 공원은 어마어마하게 넓었어요. 옆으로 뻗어있는 숲길도 웅장하고 눈이 쌓일 땐 눈썰매도 즐길 수 있을 만큼 낮은 언덕들이 만들어졌고요. 우리 집에 방문하는 친구나 지인들이 있으면 저는 어김없이 이곳을 예약했습니다. 꼭 구경시켜주고 싶었거든요. 뭘 먹지 않더라도, 비가 오는 날에도 끌고 나왔어요. 지붕이 있고, 취식이 가능하고, 야채나 먹거리를 씻을 수 있는 개수대도 마련되어 있어 봄·가을로는 자리를 예약해서 마치 캠핑 기분을 느낄 수도 있는 어메이징 한 장소예요.
고기를 구워 먹거나 포장된 음식을 먹어도 되지만 설거지는 안되고(각 가정으로 가져가서 씻어야 합니다) 각자 쓰레기봉투를 챙겨 온다면 바로 분리수거도 할 수 있고 따로 쓰레기 버리는 장소도 잘 정비되어 있습니다.
*고양시에 사는 사람들은 우선 예약할 수 있는 요일과 시간이 있으며 참고하면 즐거운 피크닉을 누릴 수 있습니다. 단, 봄과 가을 주말, 금요일 저녁엔 인기가 무척 많으니 예약 필수!
이용 시간은 오전과 오후로 구분되고 오전 10시에 열어서 5시간씩입니다.
자리마다 돌아다니며 확인하시는 분도 있으니 예약 필수예요!
둘째 아이 1학기가 끝나갈 무렵인 여름에 친구가 한 명 전학 왔습니다. 그날도 수업을 마치고 열심히 놀이터에서 놀고 있었는데 저 멀리서, 아주 적극적으로! 어떤 아버님(?) 한 분이 열심히 뛰어오시면서 저에게 혹시 아이들이 몇 학년 몇 반인지 묻더라고요. 그날 낮에도 돌봄과 늘봄 수업을 받지 않는 아이는 저희 아이랑 친구 이렇게 둘 뿐이라 학교 앞 놀이터엔 아이들 두 명과 유일한 어른이 저뿐이었거든요.
반가운 마음에 저도 얼른 인사를 건네니, 캐나다에서 오셨다고 하더라고요.
와! 캐나다라니, 그저 놀라웠습니다.
신기하기도 하고 멀리 캐나다에서 온 가족을 만날 일도 드문데 왠지 더 반갑기도 해서 그런 마음을 표현했더니 아이들의 엄마도 소개해주더라고요. 얌전하고 미소가 예쁜 T와의 첫 만남이었습니다. 가족들은 모두 캐나다 시민권자인데 아버님은 한국인, 아내는 베트남출신 캐나다 분이어서 더 친근했던 것 같아요.
저는 이렇게 먼 외국에서부터 신랑이 살았던 한국에 와서 머물 결정을 한 T가 정말 놀라웠어요. 먼 외국에서 몇 년이라도 살아볼 결심을 한다는 건 모험이기도 하고 용기가 필요한 일이잖아요. 한편으론 이제 한국 온 지 일주일 정도 됐다는 말에 걱정되고 불안하기도 하겠단 생각에 먼저 다가가서 저 역시 적극적으로 인사하고 말을 걸었죠. 먼 외국에서 20년째 살고 있는 우리 언니 생각도 났어요. 언니도 처음에 낯선 나라에서 얼마나 외롭고 답답했을까, 나중에 그 이야기를 듣다 펑펑 운 적도 많아요. 언니 생각에 더 적극적으로 이야기를 해봐야겠다 결심한 건지도 몰라요.
역시 인사로 먼저 시작하고, 영어를 못하지만 여행 다니면서도 말하길 좋아하는 성격이거든요. 어떻게 해서라도 그곳에서 현지 언어를 쓰고 영어를 해보려는 성격인지라 부담 없이 막 틀려도 일단 말해보자 주의라 엉망인영어로(문법은 틀릴 때가 무척 많아요;;) 제 소개를 하면서 말을 건넸죠. 겨울 방학 때 저도 아이들과 영국에 다녀온 이야기도 꺼내니 저에게 이 얘기 저 얘기 아주 즐겁게 반응해 줘서 한참 이야기를 주고받았어요.
그랬더니 T는 환하게 웃으며 반가워하고 이렇게 일산에서 일주일 만에 영어로 대화할 수 있는 친구가 생겨서 기쁘다며 저에게 전화번호를 물어봤어요. 저는 가만히 있어도 웃고 인사하는 게 다인데 먼저 전화번호를 물어보는 경우가 아주 많답니다. 네, 자랑이에요.
아이를 키우다 보니 전화번호를 엄청 따였습니다.(?!) 뭐 감출 게 있나요, 소통하고 잘 지내면 좋은 거니 언제나 기분 좋게 알려주고 저도 상대방의 전화번호를 받습니다.
※ 참, 그냥 000 엄마, 이렇게 저장하지 않고 꼭 이름을 물어봐서 이름을 함께 저장해요. 아이들이 암만 이름표가 된다고 해도, 진짜 다들 자기만의 이름이 있잖아요. 이름을 불러주고 싶었거든요.
이미 충분히 00이 엄마로 많이 불렸을 엄마들이니 우리끼리 있을 땐 00 언니, 00야, 이렇게 불리고 한 번이라도 나도 내 이름이 불려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00이 엄마로 살아가니 내 이름 불릴 일이 많이 없더라고요.
아무튼, 이렇게 친해진 둘째 아이 친구들 엄마들과 T와 함께 다 같이 티 타임도 가지며 친해지고 우리끼리 우리들만의 가을소풍을 계획했어요.
포트럭 파티로, 각자 생각하는 음식들을 하나씩 준비해서 싸 올 것, 장소는 피크닉 공원으로!(저와 J엄마인 K 씨가 적극 추천한 곳입니다) 저와 친해진 T는 저를 초대해서 쌀국수도 직접 끓여주고(세상에, 국물 내는 데만도 8시간이 걸리는 찐 베트남 쌀국수, 정말 감동적인 맛이었습니다.) 직접 만든 바닐라 케이크도 대접해 줘서 감사한 마음이 들었어요. 마음이 따뜻하고 열린 마음으로 다가오는 T. 한국이 정말 좋지만 가끔은 외롭고, 또 심심하다는 말에 함께 어울릴 좋은 이웃들, 엄마들을 소개해주고 연결해주고 싶었어요. 저도 속속들이 다 잘 알고 정말 가까운 사이라곤 할 수 없지만 아이가 어린이집에 다니고, 초등학교에 다니면서 이웃에 살고 같은 반이 되면서 다들 친해진 사이예요.
그렇게 추진된 모임으로 진짜 어린 시절 소풍처럼 다들 마음이 들떠서 뭘 싸 올지, 고민도 하고 따로 방도 만들어서 공지도 올리고 즐거운 시간이 흘렀습니다.
저는 평소 자주 해 먹는 월남쌈을 해가기로 했어요. 포트럭 파티 음식으론 차가워도 맛있고 밖에서도 한 입에 먹을 수 있는 게 좋거든요. 아뿔싸! T도 이어서 베트남 정통 월남쌈을 해온다고 했는데 서로 개의치 않았죠. 웃으면서 너는 그럼 베트남 스타일 원조로! 나는 코리안 스타일로 준비할게,라고 하며 각자 먹을 먹거리들을 분담했습니다. 아침부터 다 같이 먹을 도시락을 준비하는데 행복하더라고요. 소풍 가는 날 아침처럼 두근두근, 월남쌈을 싸고 열심히 맛보면서도 다른 사람 음식도 기대해 보는 재미가 있었습니다.
날씨도 마침 선선해져서 지붕 있는 그 공간이 마치 큰 숲 속 작은 집, 로라의 집처럼 느껴지기도 했어요.
어느 모음에나 있는 막내인 Y는 나이는 가장 어리지만 행동대장으로 추진력이 남달랐고 바로바로 예약도 슉슉 약속 잡는 것도 착착 재빨라서 우리들의 피크닉 포트럭 파티는 일사천리로 진행됐습니다.
*제가 행동대장 역할을 담당해 달라고 했어요. 저는 계획 짜고 약속 잡는 걸 진짜 못하기도 하고요.
*전 무슨 담당이냐고요? 그냥 인사 잘해서 사람들과 다 두루두루 친해지고 연결과 이어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전 (저도 모르게) 사진 담당이더라고요. 다 같이 사진 찍자고 하는 사람이 저 밖에 없었어요. >_<
ㅋㅋㅋ 전 남는 게 사진이다! 단체 사진은 더 귀하다, 이런 주의라 다 같이 모였을 때 꼭 먼저 사진을 찍자고 제안하는데 다들 놀라면서 아무도 같이 사진 찍을 생각을 안 했다는 거예요. 근데 다들 피크닉 차림으로 화사하게, 예쁘게 입고 들뜬 모습으로 만났는데 소풍 하면, 사진이 빠질 수가 없죠.
열심히 찍고 남겼습니다.
K의 묵은지 참치 김밥과 그냥 김밥, 아주 오독오독 묵은지가 감칠맛 최고였고요! 김밥은 속재료부터 준비할 게 많은데 가장 멀리 살면서도 아침부터 분주히 준비했을 정성이 꽉꽉 느껴지더라고요. 부지런한 솜씨, 꼼꼼함, 역시 김밥 달인이라 불릴만한 솜씨였습니다.
T가 준비해 온 베트남 정통 월남쌈은 와! 일단 크기가 우리나라 김밥 크기만큼 커서 아주 든든하고 안에 쌀국수와 고기, 새우 모두 들어가 있는 게 재료가 조화롭고 무척 담백하고 맛있었어요. 나중엔 저마다 하나씩 아이들에게 맛 보여준다며 싸가기도 할 정도로 인기 짱! 넉넉하게 준비하고 하나씩 따로 포장해 온 센스가 돋보였습니다. 직접 만든 땅콩소스도 감칠맛 나고 맛있었습니다.
M이 준비한 즉석 떡볶이, 만두, 찐계란까지 >> 이런 소풍엔 뜨끈한 국물이 빠질 수 없는데 모두 떡볶이 국물과 잘 어울리는 음식들이라 인기 최고였습니다. 아무리 배가 불러도 즉석 떡볶이 마지막은 꼭 볶음밥으로 마무리해줘야 하잖아요. 다들 배우신 분들이라(^_^) 마지막 한 숟갈까지 맛있게 박박 긁어먹었습니다.(부르스타와 프라이팬까지 가장 많은 짐을 들고 온 수고도 감사해요)
S가 준비한 과일 디저트와 무화과 말린 것도 배고픈 허기를 달래는데 그만이었고 다들 뭘 좋아할지 몰라서 과일 종류도 4가지나 준비해 준 따뜻한 마음에 뭉클했습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로컬 푸드에서 제일 맛있어 보이고 싱싱한 과일만 담아서 준비해 왔다고 하는데 서로를 생각하는 귀한 마음이 느껴져서 훈훈했습니다.
자자, 행동 대장 Y는 각자가 원하는 음료를 배달해서 시켰는데 밥을 먹으면서 식후 티타임으로 즐길 수 있어서 아주 딱이었습니다. 음료뿐 아니라 혹시나 생수도 필요할까 물도 한가득 준비해 온 센스에 감탄했습니다. 더불어 아직 길을 잘 모르는 T까지 열심히 챙겨서 걸어와주는 길잡이 역할, 말동무가 돼주는 아기자기한 마음 씀씀이에 엄지 척! 나이는 가장 어리지만 행동력 멋집니다!
그리고 제가 준비한 월남쌈 안에는 오리고기와 깻잎, 파인애플이 꼭 들어가는 점이 특이했는데 모두에게 아주 인기 있게 잘 팔렸습니다. 다들 야채를 좋아하셔서, 잘 팔린 거 같아요. 움하하하하!
포트럭 파티(Potluck Party)는 참석자들이 각자 음식이나 음료를 한 가지씩 준비해 와서 함께 음식도 나눠먹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모임입니다.
우리가 무얼 먹게 될지, 오늘 갑자기 초대받은 손님도 무엇을 먹을지 냄비 속에 들어있는 음식에 달려있다, 즉 행운에 달려있다는 말에서 유래 됐다고 합니다. 16세기 영국에서 예기치 않게 찾아온 손님에게 음식을 데워서 내주던 관습에서 시작되었고 1930년대 미국 대공황 시기에는 식비에 대한 경제적인 부담을 나누기 위해 각자가 가정에서 음식을 조금씩 가져와 파티를 여는 형태로 생겨났다고 합니다.
아직 서로가 어떤 사람인지 깊이 있게 잘 모르는 사이일 수도 있지만 저는 늘 놀이터에서 노는 둘째 아이가 늘 마주하는 다른 엄마들을 반가워하고 반갑게 뛰어가면 그게 그냥, 그렇게 좋아요. 감사한 마음이 들어요. 엄마가 조금 늦게 와도 목말라도 달려갈 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게 그거야 말로 행운이고 행복한 일이잖아요. 저도 우리 아이만 챙기는 게 아니라 늘 어울려 노는 다른 아이들도 챙기고 살펴볼 수 있다는 게 좋고요. 아이 덕분에 서로 많은 정보가 없어도 금방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게 신기하면서도 좋습니다. 저는 이렇게 먼저 인사해서 말문을 트고 지금까지 친하게 지내는 엄마들이 든든한 제 보물 같단 생각이 들어요.
닫힌 냄비가 안에 뭐가 들었을지 궁금할 순 있지만 뚜껑을 열기 전까지, 그 마음이 공포나 불안이 아니듯이, 어쩌면 우리들의 사이도 포트럭, 환하게 웃으며 열 수 있는 '열린 냄비' 같은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내일은 먼저, 마주하는 낯선 이웃에도 웃으면서 인사해 보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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