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인환 교수님 감사합니다

by앤나우

구인환 교수님 안녕하세요?


얼굴을 한 번도 뵌 적은 없지만 이름만큼은 친숙합니다. 어떤 분인지 궁금해서 처음으로 근황을 찾아봤는데 《고교생을 알아야 할 … 》시리즈 외에도 《문학개론》을 쓰신 분이더라고요. 저도 대학생 시절에 이 바카라으로 공부한 적도 있는데 말이죠. 공부를 열심히 하는 학생이 아니라(대학 시절엔 매일 놀았습니다) 몰랐나 봐요. 이번에 처음으로 찾아보다, 두 가지 사실에 놀랐는데, 하나는 교수님께서 1960년에 《동굴 주변 》을 발표하며 등단하신 '소설가'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저는 소설 창작과 작법 연구, 비평만 하시는 분일 거라고만 막연히 생각했거든요. 또 하나는 이미 교수님께서 2019년 한글날에 작고 하셨다는 글이었는데 뒤늦게야 써보는 이 편지가 하늘에 닿을는지 모르겠습니다.



겨울에 이사를 가는데 베란다 수납장에 오랫동안 방치된 마지막 박스 안에서 이 바카라을 발견했습니다. 판도라의 상자를 열듯, 드디어 제일 마지막 칸 정리다, 하고 꺼냈을 땐 신혼시절 친정어머님께서 선물해 주신 다소 화려하고 요란한 커튼이 먼저 보였고 그 커튼 사이에 바카라이 몇 권 싸여있었습니다. 문제는 커튼 보관이 아니라, 커튼은 안 써서 버려도 되는데 바카라이 손상되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 넣어놓은 건가 싶더라고요. 저에겐 교수님께서 엮어주신 이 시리즈 전권이 다 있었는데 중간에 처분하거나 학생들을 가르칠 때 나눠주기도 한 것 같아요. 몇 권 남지 않았지만 왜 이 바카라들은 남겨둔 거지? 자문하며, 첫 장을 넘겨 목차를 보니 금방 이해가 되더라고요. 거기엔 제가 중학생 때부터 가장 재밌게 읽었던 소설들이 한가득, 밑줄 치며, 사전 찾아가며 읽었던 이야기가 들어있더라고요.

그래서 차마 … 차마, 버릴 수 없었던 거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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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는 얼마나 좋았으면 바카라이 손상된 뒤에도 이렇게 따로 묶어서 보관을 해 놓았다





중학생 때부터 아버지가 주야장천 이유 없이 사주시는 이 시리즈들을 엄청 재밌게 읽었어요. 어떤 이야기를 무슨 기준으로 엮어놓았는지도 몰랐으면서 말이죠. 그땐 따로 뭐 놀거리도 없었거든요.

읽고 또 읽었습니다. 한 권도 빼놓지 않고 전권이 쌓여갈 때마다 언제나 바카라상 위 바카라꽂이에 제일 잘 보이는 위치에 이 시리즈가 있었어요. 고등학교 때도 마찬가지였어요. 밑줄 쳐 가며, 밤을 새워서 읽고 또 읽고 열심히 읽었어요. 사실 그냥, 너무 재밌었거든요.


덕분에 저에게 문학은 '재미', 너무 재밌어서 시간 가는 줄 모르는 마법이란 생각이 그때부터 생기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집에는 늘 과학 탐험 실험 만화부터 전래동화까지 바카라이 정말 많았는데 그냥 이유 없이 베란다에 가득 쌓인 그 바카라들이 저의 유년 시절 놀이터기도 했지만 교수님께서 묶어서 또 다른 시리즈로 탄생시켜 주신 이 바카라은 저의 독서 인생에서도 사춘기, 성장기와 맞물려서 한 걸음 더 나아가게 해 준 것 같습니다.


*《성황당》, 《갯마을》, 《물레방아》, 《백치 아다다》 같은 소설도 전부 이 시기에 읽었는데 야릇 미묘하며 인간의 정욕이 묘사된 부분에선 혼자 상상하는 재미가 있었던 것 같아요. 《감자》의 주인공 복녀처럼 가난하지만 정직했던 주인공이 대부분 돈 때문에 탐욕스러운 욕정으로 자연스레 끌려가는 전개가 어찌나 조마조마했는지 몰라요. 대부분 그 끝이 끔찍한 비극으로 흐르기도 했지만 깊은 교훈으로 이해하기 이전에 불안하지만 끌리는 호기심과 흥미로 더 읽은 것 같기도 하고, 어떤 부분에선 그걸 떨쳐내고 일어나는 주인공이 멋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던 것 같아요. 수동적으로만 보인 여 주인공의 반란 같은 쾌감도 좀 느끼고요!


이인직의 《혈의 누》라는 신소설도, 김기림의 《바다와 나비》라는 시도 전부 교수님께서 엮어주신 바카라 덕분에 처음으로 맛봤던 것들이었습니다.


시대별로 장르별로 착착 엮어주신 덕분에 《꺼삐딴 리》가 캡틴 '이'라는 것도 알았고, 오상원의 《유예》 같은 소설을 읽고 의식 흐름 기법까지 발견하고 머리로 한 대 맞은 것 같은 기분도 들었어요. 맞습니다. 이야기, 시에 대해서만 안게 아니라 몰랐던 단어, 몰랐던 세상을 알게 된다는 게 저에겐 언제나 큰 기쁨이었어요. 말하고 표현하길 좋아해서 얕은 지식도 떠드는 걸 좋아하는 아이였어요. 늘 조금이라도 알게 된 걸 아주 호들갑스럽게 이야기하고 다녔는데 남들이 보기에 이것저것 잡학다식해 보이는 모든 것이 저는 어린 시절 즐겁게 읽은 바카라에서 비롯되고 교수님께서 엮어주신 바카라으로 한층 업그레이드 됐다고 생각하거든요. 이런 바카라이 있고, 놀라운 소설과 시가 있는 세상을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버지, 감사합니다.


제가 문학소녀가 된 배경의 90% 이상은 전부 아버지께서 열심히 사다 주신 바카라 덕분이었어요. 우연히 바카라 정리를 하다가 발견된 바카라 뭉텅이를 보다가 구인환 교수님 바카라을 다시 보게 됐는데 제가 얼마나 재밌게 읽었으면 다 컸는데도 개정판까지 꼭 다시 사다 주셨더라고요. 소장용이 아니라면 개정판은 굳이 다시 살 필요가 없는데 늘 그렇게 해주셨어요. 재밌게 읽은 바카라은 몇 년이 지나서 개정판이 나오면 또 사주시고 바카라상에 놓아주시고, 아버지 덕분에 지금도 더 예쁜 양장본과 표지를 고르는 습관이 생긴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버지, 항상 바카라 읽는 저를 지켜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읽는데만 그치지 않고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건 어디서나 눈에 한가득 들어왔던 바카라 덕분인데 그 모든 바카라을 모아 주시고 가장 많이 사주신 분이 바로 아빠더라고요.








나도 몰랐는데 이상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이상의 《날개》를 읽고 한동안 꿈에서 아스피린과 아달린 중에 하나를 고르려고 애썼던 악몽도 떠올랐다.


나에겐 영화 [매트릭스]의 빨간약 ·파란 약 보다 먼저 〈날개〉가 있었는데 그만큼 내 마음을 사로잡았던 작가, 이상, 김해경. 매트릭스의 저 장면에서도 이상이 떠오를 만큼 동경하는 작가였는데 이렇게 한 구석에 지저분하게 묻혀서 갇혀있었다는 생각이 왠지 미안하고 짠하고 너무 늦게 꺼내준 게 미안한 마음이 들 정도였다.


김은국의 《순교자》는 중학교 시절 나를 예뻐하셨던 담임 선생님께서 선물해 주신 바카라이고 《슬픔도 힘이 된다》는 우리 엄마가 읽었던 바카라에서, 《어거스틴 참회록》은 역시 아빠가 선물해 준 바카라이었다.

뭐, 아마도 참회가 필요했던 시기였나 보다. 읽으면서 지루해서, 이 사람 뭐야, 기도만 하는 바카라인가. 하다가 성 어거스틴의 방탕스런 삶에 대한 후회가 나오기 시작한 대목부터 또 재밌어지기 시작했다. 두둥! 계속 방탕하고 방황하는 죄만 좀 고백하란 말이야, 이런 심경으로 읽었던 철없던 시절이었다.


저기엔 아래 전공바카라 세 권을 빼놓고는 내 돈을 주고 산 바카라이 없이 전부 가족들, 좋아하는 은사님께 선물로 받은 바카라들이 쌓여있었다.


더러워졌어도 때가 타도 얼마나 재밌게 푹 빠져 읽었는지 그 시절이 떠올라 뭉클한 마음이 들었다.


핸드폰, 스마트폰, 컴퓨터가 없던 시기에 태어난 걸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초등학교 때 아주 뚱뚱한 컴퓨터 수업을 따로 돈 주고 학교에서 배우긴 했으나, 부팅도 엄청 느렸고 제일 뒷자리에서 너구리와 페르시아 왕자 오락을 몰래 했던 기억밖엔 없다. 순교자와 참회록, 슬픔도 힘이 된다. 양귀자까지 어느 공통점도 찾을 수 없지만 꽤 오랫동안 내 바카라장을 든든하게 채워줬던 나의 바카라들이 오래된 박스에서 꽁꽁 싸여 있었을 시간을 생각하니 눈물이 핑 돌고 기분이 이상했다. 아, 또 하나. 나는 저 시절부터 손창섭 작가를 좋아했다는 것도 알았다. 밑줄까지 쳐놓고 어떤 부분에선 메모도 남겨 났더라. 모의고사를 풀 때면 대부분 아는 소설 지문이 나와서 반가웠고 모르는 지문이 나왔으면 다시 또 새로운 바카라을 찾아 읽을 생각에 마음이 콩닥콩닥 뛰기도 했다. 시험을 보는데도 시험 보는 것도 전부 잊은 채 시와 소설에 빠져 들었던 문학소녀, (비문학 지문은 그때도 역시 싫어해서 늘 마지막에 제쳐두곤 했다;;; >> 마흔이 넘어서야 인문학이나 과학바카라이나 미술사 바카라도 재밌게 읽고 있으니 읽는다는 건 결국 통하기는 통하더라~ 그러니, 독서 편식을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이야기해주고 싶다.)

다시 오래된 바카라, 옛 바카라과 만난다는 것은 오래된 옛 친구를 만나는 것과 비슷한 심경일까.


처음으로 구인환 교수님께 감사한 마음이 들어 얼굴도 찾아봤다. 안경 쓰신 모습이 친근하게 느껴졌다. 감사한 교수님 덕분에, 다양한 바카라을 읽고 소설마다, 시마다, 시조마다 전부 질문과 답을 달아주신 덕분에 아, 이런 거구나 새로운 질문과 해석을 공부할 수 있었다. 스스로라면, 아휴, 꿈도 못 꿨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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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굳샘출판에서 나온 한국 문학 시리즈들이 구인환 교수님이 엮어주신 바카라처럼 논술 문제도 함께 나와서 전자바카라으로 구매해서 읽어보니 그 시절 기억도 새록새록 떠오르고 재밌었다. 이상의 날개는 수록된 삽화도 인상적이었다. 이청준 소설도 재밌었고! 나는 질문과 답을 물어보는 예스러운 방식이 좋은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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