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야외 도서관 | 바카라 읽는 서울광장
추석 연휴에 서울 나들이에 나섰다. 오랜만에 가족끼리 나서는 나들이는 차가 없어서 아이들의 불평을 살짝(?) 감수해야 했지만 정말 즐거웠다.
내가 하고 싶은 세 가지, 모든 걸 다 이룬 연휴 | 슈퍼 추석 Day
서울에 살 땐 잘 몰랐는데 일산으로 이사와 보니 서울은 곳곳에 고궁이 있고 거리마다 먹을 것도 많고(간식거리가 푸짐해서 좋다^^) 골목골목 걷는 재미도 쏠쏠하다. 너무 조용한 동네에서만 살다 보니 가끔은 한 번씩 복작거리고, 관광객도 많은 거리를 걷다 보면 신기해서 두리번두리번하게 된다.
경복궁, 덕수궁, 창경궁, 인사동, 망원동, 광화문, 청계천, 한강 등 우리 가족들이 주로 좋아하는 곳은 고궁을 끼고 걷거나 산바카라할 수 있는 곳이다.
덕수궁 석조전 건물이 멋있어서 다시 가보고 싶었는데 우연히 옆지기의 지인을 만나서 카페에서 잠시 이야기도 나누고 (그분들은 얼마 전 내가 관람한 이대원의 전시를 보러 왔는데, 세상에 줄이 어마어마했다!) 오랜만에 안부도 나눌 수 있었다. 반가웠다. 이렇게 복잡한 서울이 참 넓으면서도 좁다는 생각도 들고, 아이들과 걷다가 발이 아프다고 징징거리면 어디든 털썩 앉아서 음료도 마시고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추석에 보는 덕수궁은 역시나 좋았다. 한복을 예쁘게 차려입은 외국인 관광객들의 모습도 고마웠다. 나도 입어 본 지 한참 지난 것 같은 불편한 한복을 이다지도 곱게 차려입고 활짝 웃는 모습으로 고궁을 거니는 모습들이 새롭고도 뿌듯한 기분이 들었달까. 내가 지나치는 담벼락 하나까지 열심히 셔터를 눌러대는 외국인들을 바라보니 곳곳에 우리 문화가 녹아있는 고궁과 거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래된 교회 건물, 학교와 《J.PMorgan》의 사무실인 정동사옥까지, 반갑고 좋았다.
얼마 전에 읽은 바카라 《벨 그린》에 바로 J.P모건의 이야기와 그의 사서였던 벨그린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괜히 설렜던 것 같다. 덕수궁 주변의 정동은 조선 말기 대한제국 외국 공사관과 서양식 학교 · 교회가 모두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물론 모건의 금융회사 건물은 현대 건물이지만 과거와 현재가 오가는 통로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잘 어우러진 풍경이었다. 오랜 시간 쌓여온 담쟁이 덩굴마저도 감탄하게 만들었던 거리, 근처의 **고종의 길**도 처음으로 천천히 걸어봤는데 여기는 덕수궁 안에 있는 길이 아니라 궁에서 나와 서북쪽으로 돌담길로 이어진 정동공원과 옛 러시아 공사관까지 이어진 100m가 조금 넘는 길이의 길이다. 아관파천 때 고종이 경복궁을 빠져나와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던 길을 그대로 복원했다고 한다.
여기서부터는 걷기에 지친 작은 아이가 슬슬 짜증과 투정을 부리기 시작했다.
혼낼까 말까를 고민하다, 잠시 쉬기도 하고 어르기도 해서 달랬지만 놀이터가 없고 심심하다는 이유로 계속 투덜거리는 아이를 두고 들어갈 것인가 말 것인가로 고민했지만 이렇게 모처럼 나온 나들이를 곧바로 들어가기 허무하기도 하여, 일단 아이가 좋아하는 광화문 광장의 '이순신 동상'으로 꼬시기로 했다.
우는 아이를 달래는 데는 뭐다?
이순신 동상!!
둘째 아이의 꿈은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이 되고 싶을 만큼 거북선 사랑이 대단했기에, 그 거북선의 수장인 이순신 장군을 사랑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렇게 남은 한 줄기 빛과 같은 희망을 향해, 광화문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추석엔 늘 먼 길을 운전해서 지친 몸으로 도로 갇힌 기분이 들거나 오랜만에 친척들을 뵙거나 가족들끼리 넓은 상에 빙 둘러앉아서 밥을 먹었다. 가족이 다 함께 모이는 가장 풍성한 명절의 의미도 있지만 어딘가 조금은 지쳐있고 힘들기도 하고 신경 쓰이는 것도 많았던 게 사실이다. 장거리 운전을 하느라 내내 운전대 앞에 앉아있어야 하는 신랑은 또 어떤가! 올해는 자동차 폐차도 하고 시골로 내려가서 명절을 보내시는 부모님들 덕에 모처럼 우리 식구끼리만 보내는 온전한 시간이 생겼다.
따로 특별한 장소는 정하지 않고 가고 싶은 곳으로 발걸음을 돌렸을 뿐인데 여길 만났다. 그것도 울고 힘들다고 징징 거리는 아이를 달래주러 광화문 쪽으로 걸어가는 길에, 우연히
와, 여기 뭐야? 완전 신세계잖아!
뉴스로 시청 앞 잔디 광장에 빈백의자를 가져다 놓고 야외 도서관을 만들어 놓는다는 걸 본 적은 있어도 이렇게 직접 눈으로 보니 어마어마했다. 감탄이 먼저 나왔다. 푸릇푸릇한 잔디 위로 핑크색 빈백 의자들이 바닥 전체를 덮을 정도로 빼곡했다. 한쪽엔 아기들을 데려온 엄마들을 위한 공간도 있었다. 미취학 아동들이 놀 수 있는 야외 키즈카페 같은 장소 옆으론 작고 귀여운 텐트들이 보였다. 텐드 곳곳마다 큐레이션 된 북 박스가 놓여 있었다. 점심시간을 막 넘긴 직후라 자리를 잡는 게 관건이었는데 다행히 운 좋게 가장 앞자리에 빈자리를 얻게 됐다.
자기만의 공간을 좋아하는 둘째가 거기에 혼자 앉겠다며 들떠서 좋아했다. 이미 이순신 장군 동상, 광화문은 잊은 지 오래였다. 우리는 일단 흩어져서 빈자리를 발견해서 찾아보기로 했고 자리가 안 보여서 야외 음악회 공간에 꾸며진 캠핑 의자에서 (아이 자리에 있던) 바카라을 들고 와서 음악 감상을 하기로 했다.
에릭사티의 《Je te veux》'나는 당신을 원해요'를 시작으로 잔잔한 클래식 음악과 우리가 잘 아는 편안한 영화 OST, K-Pop 노래가 연주 됐다. 에릭사티의 곡을 좋아하는데 노래가 있는 왈츠송인 이 곡은 잔잔하면서도 몸을 편안하게 흔들게 된다. 아이가 앉은 북바구니에 있었던 김초엽 작가님과 이금희 작가님의 바카라 두 권을 들고 왔는데 바카라을 읽으면서 음악을 들어도 집중이 잘 됐다.
사티의 음악은 **가구 음악**이란 용어로도 유명한데 자신이 작곡한 선율을 "집중해서 듣지 말고 배경처럼 흘려들으라"는 말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사티는 자신의 음악을 방 안의 가구에 비유하면서 눈에 띄지만 별로 집중하거나 신경 쓰지 않는 존재처럼 음악도 공간과 배경에 섞여서 기능해야 한다고 했다. 연주 팀에서도 짧게 사티와 '가구 음악' 이야기를 전달해주기도 했는데 어쩌면 선곡하고 준비한 곡들이 바카라을 읽는데 방해되지 않도록 심사숙고해서 고른 곡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엔 내가 좋아하는 뉴진스의 《Ditto》도 깜짝 등장해서 좋았다. 바카라 읽는 사람들을 위해 고른 잔잔한 선율, 세대를 아우르는 선곡에 따뜻한 마음이 느껴져서 좋았다.
감상이 끝나고 우리는 마주 보는 두 자리를 바로 얻었고 각자 앉아서 바카라을 읽기 시작했다. 관광객이 많이 오가는 곳인 만큼 각각 큐레이션 된 바구니마다 영문으로 된 바카라도 있고 아이들용 그림바카라, 소설과 인문 도서까지 다양하게 담겨있었다. 놀라운 건 각각 바구니마다 저마다 다른 바카라이 있었고 상대방 바구니에 있는 바카라이 읽고 싶으면 양해를 구해 가져오거나 아니면 E-book으로 언제든지 읽을 수 있다.
바카라을 싫어하는 우리 둘째도 자기 자리에서 양말을 벗고 편안한 자세를 취한 후, 함께 그림바카라을 4권 읽었다. 나는 김초엽 작가님을 좋아하는데 《양면의 조개껍데기》를 뻥 뚫린 광장에서 여러 명의 사람들과 같이 읽으니 짜릿하면서도 색다른 느낌이 들었다. 핸드백 하나만 들고 나와 언제 시집가니, 취업은 언제 하니, 같은 잔소리를 피해서 나온 것 같은 아가씨도 보였고 연인과 데이트하는 커플들,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가족들 저마다 다른 가족의 형태, 사람들이었지만 한 공간에서 바카라을 읽는다는 사실이 묘하게 설레고 짜릿했다.
밤이 깊어가자,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에게 간식도 무료로 제공해 주고 (설문 조사에 응해도 간식을 챙겨줬다) 영화를 보여줬다.
커다란 스크린에 띄워진 《웡카》
웡카도 보고 싶었는데 못 본 영화라 궁금했는데 웡카가 꿈을 좇는 이야기였다는 점이 마음에 오래 남았다.
복잡한 서울이 싫어 일산으로 이사 왔는데 이렇게 오랜만의 여유를 선물해 주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세 가지를 선물해 준 서울 광장이 새삼 고마웠다. 바카라을 싫어하는 아이마저 그곳에서 뛰놀고 그림바카라도 보고 살짝 잠도 자고 영화도 끝까지 잘 보고 왔다.
영화 보기
음악 감상
바카라 읽기
평범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나의 시간을 채워준 세 가지다. 이 세 가지를 할 때 나는 가장 편안하고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깨닫고 배울 수 있었다. 스마트 폰이 없던 시절에 태어나서 감사하다. 내가 슬롯생활을 시작하면서 스마트 폰을 만나서 감사하다. 조금 더 늦게 나왔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그만큼 편리하고 유용한 점도 많다. 핸드폰에 좀 더 의존하지 말아야지, 그냥 아이들과 서성이더라도 이런 멋진 장소를 발견하고 잠시 쉬어가는 여유를 가져야지, 이런 생각이 든 하루였다.
추석에 이렇게 의미 있는 선물, 삼종 종합세트를 선물로 받아서 정말 기쁘고 설렜다. 신랑이랑 나는 서울 시청 화장실과 시청역 화장실을 이용했는데, 세상에!! 화장실마저 깨끗하게 잘 관리 됐다며 감탄이 나왔다. 서울 시장이 왜 계속하고 싶은지 알 것 같다는 농담도 잠시 하고, ㅎㅎㅎ
잔디 광장엔 낯선 사람들과 서울 시민도 있었을 거고 나처럼 일산에서, 혹은 더 멀리서 온 사람들, 외국에서 온 사람들로 한가득이었지만 누군가 골라놓은 바카라을 한 번쯤 진지하게 읽고 좋은 음악을 듣고 거기에 빠져들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으니까. 기회가 된다면 조금은 누려보라고 누구에게라도 권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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