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슬프게 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전부터 보고 싶은 전시였는데 J언니가 먼저 함께 보자고 해서 반가운 마음에 한달음에 달려갔다.
사실, 보고 싶었던 건 순전히 전시의 제목 때문이기도 했는데 얼마나 기쁨이 충만할까, 과연 어떤 색으로 채워져 있을지 궁금했다. 내가 사는 곳 근처가 바로 파주기도 해서 우리 가족도 파주 쪽으로 나들이를 많이 갔었는데 이대원 화가가 1973년에 파주 농원에 화실을 마련한 뒤 약 30년 동안 거의 매주 찾아가 작업을 했다고 한다. 그곳에서 쓰러진 나무도 그대로 둔 채, 계절마다 그림을 그렸을 화가를 떠올리니 좀 더 친근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이제는 동시대가 아닌 만날 수 없는 작가지만, 나는 늘 뭐 하나라도 나와 연관을 짓고 끌고 와야 거기에서 나의 마음이 출발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이대원 화가의 전시는 시작부터 꽃다발을 한 아름 안겨주면서 시작하는 느낌이 든다. 꽃다발을 받아야 하는 건 이렇게나 멋진 작품을 만들어낸 화가인데, 한 번도 그림 그리기를 포기하지 않고 이어온 인생인데, 화가는 오히려 들어오는 관객 한 명 한 명에게 세상에서 가장 커다란 꽃다발, 자연의 꽃다발 한 아름을 안겨주는 느낌이 든다.
눈이 환해진다. 마음까지 등불이 켜지는 것 같다. 과수원의 한가운데 서 있는 기분마저 든다.
아, 그냥 눈이 즐거운 게 아니었구나. 단순히 밝고 아름다워서 좋은 게 아니라 세세하게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바라봐준' 누군가가 있었기에 자꾸만 그림을 들여다보게 된다. 멀리서 본 형태와 가까이서 본 형태는 전혀 다르지만 사실 그 둘은 전혀 다르지 않다는 점도 신기했다. 먼 산과 나무, 꽃나무, 과수원, 새와 꽃, 바람, 오두막, 옹이, 계절을 이렇게도 오랫동안 들여다보고 이처럼 표현할 수 있구나. 그저 감탄스러웠다. 덕수궁 돌담길을 걷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덕수궁 현대 미술관을 오기까지의 산바카라길도 즐거웠는데 전시실 안에서도 마치 자연의 이어진 계절과 세상에서 잠시 떨어진 듯한 특별한 시간을 걷는 기분마저 들었다.
서양화의 기법으로 그린 동양의 정서를 담은 화가
나는 이 말이 왠지 와닿았다. 자개 공예가 비단 할머니댁에서 본 적 있는 커다란 자개장에서만 시작된 게 아니구나. 반짝반짝 빛나는듯한 착각이 우리가 어린 시절부터 자주 봐오고 친숙한 소재라는 점이 즐겁다.
미술반 시절부터 우리나라 고유의 정서 그대로를 담아 표현하고 그림 그리기를 즐겼던 학생답게 그의 소재는 늘 우리 가까이 있는 한국 사람들이 자주 사용하는 사물, 늘 바라보는 풍경, 자연 그대로였다. 화가는 보통학교 시절부터 아주 어렸을 때부터 유화를 배웠고 그때부터 이미 남다른 실력을 보여준다. 경성 고등학교에서 미술교사 사토 구니오의 영향을 받았는데 사토 구니오는 서양 화가였을 뿐 아니라 조선 공예와 전통미의 가치를 제자들에게 알려 준 고마운 스승이기도 했다. 이번 전시회에서는 회고전다운 특성답게 어린 시절 입상 작품부터 그의 스승의 작품도 여러 점을 보여주고 있다.
일제 강점기를 거쳐 광복과 근현대 미술사에 이르기까지 한 작가가 걸어온 길, 차곡차곡 쌓아온 길을 돌아보고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인생의 이야기를 물론 몇 시간 작품 만으로 판단하고 전부 알 순 없다. 하지만 그림 감상을 통해 누군가의 삶에서 가장 반짝거리고 치열한 순간을 느낄 수 있다면 그것만큼 또 좋은 게 있을까.
나는 바카라과 그림 모두를 좋아하는데 바카라은 읽는 순간에도 온전히 어떤 인물에 몰입되기보단 나라면, 내가
이런 인물이라면을 떠올린다면 그림은 그보다 직관적이고 단순하단 생각이 들어서 좋을 때가 많다.
바카라은 읽다가도 끊어가고 쉬어가고 복잡한 내면의
나를 떠올리는 순간들도 많은데 그림은 그
자체에 있는 그대로를 몰입해서 보게 해 준다.
**내가 그림을 잘 알고 하는 건 아니지만 미술관에 걸어가서 작품 앞에서 서 있는 순간마다 비슷한 감정을 느꼈던 것 같다. 그림이 뭔가를 나에게 보여주고 말하고 있구나. 200페이지, 400페이지 두꺼운 글로 쌓아가서 만들어간 서사가 아니라
한 줄짜리
시에 온갖 감정을 느낀 것처럼 화가의 삶이 느껴져서 그
자체가 늘 신선하고 놀라운 경험이 됐다.
사진을 찍을 수 없었지만 브로셔에는 담겨있었던 '서까래'를 누워서 보면 이렇겠구나 바로 느껴지는 작품도, 색색깔 찬란한 빗자루! 그래, 빗자루라는 이 작품은 한국인이라면 누구라도 먼저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겠다는 생각에 바로 웃음이 나왔다. 외국인들은 이게 뭐야, 하고 궁금하게 쳐다봤겠지만 복조리나
빗자루, 소반, 이런 도구들은
우리에겐 웃음이 먼저 나는 소재들이다. 곳곳에 숨어있는 듯한 오두막과 사계절이 그대로 뚜렷한 특성답게 계절마다 변하는 나무도 우리나라 사람들에겐 언제나 익숙하고 친숙한 소재이지 않을까.
작품을 볼수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작가의 인생이 하나도 슬프지 않아서가 아니었구나. 사실 작가는 미대를 나오지 않고 가족들의 반대로 뛰어난 재능을 지녔음에도 법대에 진학해야 했다. 어쩌면 인생 전체에서 미술반 활동이 그토록 소중한 이유가 거기에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미대 출신이 아님에도 그림이 세상에서 제일 좋았던 화가, 어디에, 어느 자리에 있든 그럼에도 붓을 놓지 않았다.
엉뚱한 길, 전혀 다른 길로 가는 듯했지만 엘리트 인생 가운데서 누리고 편안한 삶 대신 하고 싶었던, 진짜 꿈을 찾아서 평생을 달려온 건지도 모르겠다. 다시 붓을 쥔 게 아니라 어쩌면 붓을 놓은 순간이 단 한 번도 없지 않았을까.
자기의 길을 꾸준히 걸어온 것이다.
꿈과 가장 맞닿은 자리에서 풍경이 보는 곳에선 언제나 그림을 그렸기에 그의 친구가 이런 표현을 한 건지도 모르겠다. 당신을 슬프게 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는 친구의 말처럼 행복한 화가인지도 모르겠다.
이번 전시에서는 다양한 화가의 소장품도 같이 소개됐는데 하나하나 세세히 뜯어보고 읽어보고 들어볼 수 있는 풍부한 전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을까지
이어진 긴 전시회에 소풍 다녀오듯 가봐도 참 좋겠단 생각이 든다.
이대원: 당신을 슬프게 하는 것은 한도 없다
2026. 8. 6. ~ 11. 8.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