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죽을 순 없어
더운 여름이다. 여름이 더운 덕분인지(?) 뭔지 몰라도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더워도 어쩌면 이렇게까지 더울 수 있을까. 앞으로 여름은 점점 더 더워진다는데, 원자력 발전소 가동까지 멈출 정도로 이어지는 이 더위 속에서도 매일 걷고 뛰고 자전거도 타고 땀 흘리며 바깥에 있다 보니 지치기도 하고,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는 상황에선 일단 너털웃음이 먼저 나온다. 시골에서 뙤약볕 아래 농사를 짓는 것도 아닌데 처음으로 '온열 질환', '일사병' 이런 말들이 좀 무서워지기 시작한 첫여름 이기도 하다. 앞으로 계속될, 이글이글 뜨거운 여름을 생각하면, 오히려 마음은 서늘해진다고 해야 할까. 여름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계절인데 계속 좋아할 수 있을지 자신이 점점 없어진다.
외출 준비가 번거로워졌다. 아이 땀을 닦아줄 커다란 수건은 물론이고, 이 날씨에도 놀이터에 끊임없이 나가는 아이를 위한 차가운 물과 갈아입을 티셔츠, 휴대용 선풍기는 필수품이다. 나는 오가는 길마다 좀 더 시원한 그늘, 카페를 이전보다 더 두리번두리번 찾아보게 된다.
고속도로에서 차가 고장 난 걸 시작으로 신랑은 이전보다 매일 성경 듣기(리딩 지저스)와 기도에 힘쓴다고 했는데 그 말에 웃음이 나면서도, 아! 나도 근래에 가장 간절히 기도했던 순간이 바로 그 고속도로 위에서였는데! 그때가 생각났다.
평범하고 평온한 일상이 이어질 땐 잘 모르다가도 한 번씩 위기나 힘든 일이 있을 때 언제나 내가 할 수 있는 게 유일하게 기도밖에 없다는 걸 깨달을 때 나 역시 더 간절하게 하나님을 찾았구나, 사실은 이렇게 주어진 하루하루에 감사하는 게 얼마나 소중했는지 그제야 깨닫게 된다.
사실 내 기억으로 내 기도가 간절했던 순간을 떠올려보면(*젊었을 때) 치과에서 치료할 때, 비행기가 이륙하거나 착륙할 때, 갑자기 온갖 회개와 다짐 같은 기도가 술술술 터져 나왔더랬다. 그러다 큰 아이 출산 때 처음으로 전신마취를 하면서 내 몸이나 나에 대한 걱정보다 태어날 아기가 세상에 무사히 잘 나오길 간절하게 기도했다. 제왕절개도 처음이라 무서웠지만 아기가 안전하게 나오기만을 간절히 바랐던 것 같다.
우리 가족은 주말 저녁마다 카페에서 각자 먹고 싶은 메뉴를 한 가지씩 골라서 먹은 후, 종합 운동장에 가서 다 같이 뛰어놀고 산바카라을 했는데 요즘은 더위가 더위니만큼 코스가 살짝 바뀌었다. 바깥에서 시원한 음료나 디저트를 하나씩 먹은 후에, 코인 노래방으로!
학원가에 있는 코인 노래방은 언제나 시끌시끌 분위기가 즐겁다. 가족들 모두 음악을 듣고 노래하는 걸 좋아해서 몇 번 왔더니 100점이 나오면 서비스로 한 곡씩 더 공짜로 할 수 있다는 걸 안 이후부턴 열심히 부르게 됐다. 노래를 몇 곡만 해도 괜찮고 요즘 관심사나 취향까지 알 수 있는 안성맞춤인 곳이다.
노래방에 가면 다들 애창곡이 하나씩 있다.
나는 우선 윤하의 《사건의 지평선》을 시작으로 《Stay with me》나 《First Love》같은 일본 노래를 부른다. City Pop을 좋아하기도 하고 이제 일본어를 읽을 수 있고 단어가 조금씩 들리기에 아래 자막을 안 보고 최대한 일본어 자체를 읽으며 공부한다는 느낌(?)으로 노래할 수 있어서 더 좋다.
신랑은 주로 90년대와 2000년대 흥겨운 히트송을 주로 부르고(《천생연분》을 불러서 100점도 자주 나온다. The Black eyed Peas나 힙합 그룹도 좋아한다.) 큰 아이는 요즘 인기 있는 가요나 팝송을 부른다. 비틀스(The Beatles) 팝송을 생각보다 많이 알아서 깜짝 놀라기도 했다.
둘째는 이전까진 《한국을 빛낸 백 명의 위인들》을 끊임없이 불러서 다들 중간에 몇 번이고 버튼을 끄고 싶게(^^;;) 만들었는데(노래가 생각보다 우렁차고 끊이질 않는다. 5절 넘게 이어지는 명곡이다) 요즘엔 수박이나 여름이 주제인 동요를 주로 부른다. 《싱그러운 여름》이나 《수박 파티》같은 동요를 어찌나 진지하고 즐겁게 부르는지, 웃음이 빵빵 터진다. 마이크를 배까지 내리고, 노래방 안에 있는 선글라스나 눈알이 튀어나오는 소품 안경 같은 걸 쓰고 아빠의 모자까지 척, 거꾸로 착용한다. 군대에서 말하는 말년 병장들이 노는 모습이 있다면 이런 모습일까 싶게 혼자서 동요에 심취한 모습이 보통이 아니다. 박자와 음정 모두 틀려서 어디다 내놓기도 부끄러운 노래 실력이지만 정작 본인은 제일 신이 나서 들떠있다. 가수 김연자님이 풍부한 성량으로 마이크를 배 아래까지 막 내린다면, 우리 둘째는 그저 폼과 추임새 동작일 뿐이다.
그러다가 이 노래를 알게 됐다.
그날도 피곤해서 노래는 몇 곡 안 하고 쉬고 싶어 한 신랑이 아이들과 내가 자꾸 부르라고 권유하자 이 노래를 골랐다.
이렇게 죽을 순 없어
버킷리스트 다 해봐야 해
짧은 인생 쥐뿔도 없는 게
스쳐 가네 파노라마처럼
-이찬혁 ERROR앨범(2022.10.17) 《파노라마》 중에서
아, 경쾌하고 반복되는 멜로디인데 몸이 들썩들썩 리듬을 타게 되는데, 신랑이 노래를 부르면 부를수록 갑자기 눈물이 터질 것 같았다.
가사 때문이었다.
*노래를 한 번 감상해 보길 추천드린다*
처음 들어본 노래인데도 뭔가 울컥하게 만드는 가사 때문에 여기에서 울면 분위기가 이상할 것 같아서 눈물을 참고 참았다. 죽을 때, 죽어가는 순간 삶이 주마등처럼 스친다는 표현이 있는데 그런 상황에서 노래가 시작된다. 다들 분주하게 나를 이리저리 옮기지만 내가 가장 하고 싶은 말은 바로 이 외침이다.
아이들은 신났다고 함께 후렴구도 따라 부르는데 나 혼자 눈물을 참느라 고군 분투 해야 했다. 노래를 다 부르고 신랑이 갑자기 우리 큰 아이 이름을 부르면서 손을 꽉 잡았다.
00야, 인생은 정말 짧아.
열심히만 살지 말고 하고 싶은 것도 가끔 해보고
행복하게 살아야 돼!
나는 결국 눈물이 터져버렸다. 잘 참았는데, 신랑이 진짜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이거였구나. 오 분 전까지 혼자 신나서 방방 거리고 뛰고 춤추면서 노래 부르다가 갑자기 또 이찬혁 노래에 눈물이 쏟아지고, 내가 생각해도 어딘가 이상한 사람 같지만, 또 어쩔 수가 없었다. 눈물이 먼저 나는걸.
왜냐하면 사랑하는 아들에게 해준 그 말이, 쉼 없이, 그간 쉼 없이 달려오기만 한 신랑이 자기 자신에게 한 말인 것 같았기 때문이다. 늘 희생하면서 가족들을 위해서 끊임없이 꾸준히 애쓰면서 달려온 신랑.
고생했어, 애썼어, 힘들었지?라고 말하면 무슨 소리냐고 우리 식구들이 즐거운 게 자기의 즐거움이고 하나도 힘들지 않다고 말해주는 신랑 덕분에 감사한 하루하루를 이어올 수 있었다. 우리 가족 한 명 한 명이 웃을 수 있다면 그게 최고의 행복이라고 늘 말하는 그 말이, 빈말이 아니라 언제나 진심이구나 느껴진 순간이 있었다.
올 겨울 방학에 영국에서 지내는 우리를 보기 위해 신랑은 영국에 출장 겸 왔다가 빠르게 일 처리를 하고 2시간도 안 자고 그대로 윔블던으로 달려왔다. 생각해 보니 우리 가족을 만나겠다고 기차 타고 버스 타고 택시 타고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온 탓에 기차 안에선 화장실도 참아가며 왔는데(캐리어를 누가 훔쳐갈 수도 있으니) 우리에게 전혀 피곤한 티를 내거나 짜증 한 마디 없었다. 그다음 날 이어진 런던 투어까지 전부 다 소화하면서 우리를 챙겨주고 오히려 도닥여줬다. 아이들 투정도 전부 받아주고 오랜만에 만난 만큼 추억을 쌓아야 한다면서 가장 크게 웃고 가장 많이 움직였다. 신랑이 들고 온 캐리어에는 우리 아이들과 언니네 가족들에게 줄 선물이 한가득이었다.
그 울타리와 그늘 안에서 편하게 누릴 수 있었던 거구나. 여름날 뙤약볕에서도 그늘을 찾는 심경으로, 시원하게 쉬고 편안하게 머무를 수 있었는데 정작 신랑 스스로는 햇볕을 가려주는 그늘 같은 역할만 하느라 얼마나 숨이 차고 힘들었을까, 나는 그런 마음에 울컥했던 것 같기도 하다.
《파노라마》가사처럼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 우리가 선택해서 세상에 태어난 건 아니지만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는 선택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선택들이 결국 쌓여서 '죽음' 앞에서의 태도 역시 선택할 수 있게 만드는 것 같다. 탄생 자체는 처절하고 그저 본능처럼 여겨지는 날것이지만, 죽음은 자연스러운 건 마찬가지인데 언제나 죽음을 생각하고 맞이하는 그 '태도' 하나 때문에 숭고하게 느껴진다. 물론 탄생과 죽음, 모두 고귀하다.
나는 우리 아이들 뿐 아니라 사랑하는 나의 옆지기도 짧은 인생의 버킷 리스트를 하나씩 이뤄가고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진심으로.
스쳐가는 파노라마 속에, 누군가의 기억 속에 웃음을 주는 사람이 된다면 그게 제일 행복한 삶이 아닐까. 그게 가족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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