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40대 초반쯤이었으니 10년도 더 된 일이다. 중학교 동창이자, 현재도 일 년이면 한, 두 번 꼭 얼굴을 보는 마음 가는 친구가 있다. 밝고 영특한 데다 친구들의 네트워크 역할을 자처하던, 굉장한 에너지를 소유한 친구다. 잘 나가는 친구들 뿐 아니라 어려움을 겪는 친구들의 소식도 전해서 함께 도울 수 있는 길을 모색하도록 분위기를 만드는, 관계의 등대 같은 친구. 그래서 나처럼 나고 자란 곳을 떠나온 지 꽤 된 친구들이 그곳에 내려갈 때마다 찾게 되는 고향 같은 친구다.
그즈음 친정집에 들렀다 만난 그 친구가 내게 반짝이는 눈으로 바짝 다가와 앉으며,
"너, 갭투자라고 들어봤니? 네가 원하면 내가 갭투자의 A to Z 다 알려줄게!"
하는 거다. 홀로 되신 친정 엄마와 20대 때부터 장어구이 집을 운영했던 경험이 있던 그 친구는 경제관념이 남달랐다. 돈을 버는 노하우를 몸으로 체득했다고나 할까. 친구로서 쌓인 신뢰 관계 덕분에 친구가 경험한 것들이 좋은 재테크 방법일 것임은 분명했다.
귀가 솔깃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지방에 사는 친구가 대출해서 수도권에 아파트를 사고 그것을 다시 다른 이에게 양도하는 식으로 벌어들이는 경제적 비용이 쏠쏠한 모양이었다. 그즈음 사십춘기로 몸살을 겪던 내게 뭔가 새로운 전환점이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내가 마음만 먹으면 친구는 내게 알토란 같은 갭투자 방법을 전수해 줄 요량이었는데, 난 결국 거절했다.
"너나 되니 그렇게 하지, 내가 어떻게 그런 일을 하겠니. 나완 맞지 않을 것 같아."
하고 완곡하게 친구의 제안을 거절했지만 진짜 이유는, 내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다른 이에겐 좋은 재테크 정보일지라도 내게 맞는 방향인지 숙고할 필요가 있다. 서점가며 유튜브엔 온갖 재테크 정보로 넘쳐난다. 이렇게 하면 돈을 벌 수 있다더라, 저렇게 하는 게 가장 빠른 방법이라더라, 하며 마치 그 바카라만 읽으면, 그 과정만 따르면 누구나 부자가 될 것처럼 홍보한다. 그런데 과연 그렇게 돈을 벌어서 무엇을 하고 살고 싶은 것인지, 삶의 모습을 진지하게 고민해 본 적이 있을까?
돌이켜보면 그 친구의 제안을 거절한 건 현명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 뒤로도 그 친구는 갭투자로 꽤 재미를 보기도 했지만, 부동산 시장이 얼어붙으며 몇 년 전에 모두 처분했다고 했다. 어느 쪽이든 그건 그 친구의 그릇에 맞는 도전이었다. 나였다면 은행 대출을 끌어모아 산 집값이 오르든 내리든 밤잠을 설쳤을 게 뻔하다. 좋은 재테크란 수익률이 아니라, 그 방법이 내 성정과 얼마나 맞는가로 먼저 판가름 나는 거니까.
그렇다고 재테크 공부를 아예 놓아버린 건 아니었다. 서점가 경제파트에 겹겹이 쌓인 바카라들 중 몇 권을 골라 나도 읽어보긴 했다. 연금 수령 시기를 늦추는 법, 퇴직금을 굴리는 법, 필요 노후자금을 역산하는 계산식까지... 숫자로 답할 수 있는 질문에는 하나같이 친절하고 명쾌했다.
생각해 보면 이건 당연한 일이었다. 재테크 바카라은 애초에 "얼마가 필요한가"를 계산하는 기술이지, "그 돈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를 정하는 기술이 아니기 때문이다. 전자는 공식과 통계로 답할 수 있는 영역이고, 후자는 나라는 사람이 무엇에 시간을 쓸 때 살아있다고 느끼는지, 스스로도 잘 모르는 채 평생을 흘려보낸 질문이다. 바카라이 게을러서 안 알려주는 게 아니라, 그건 애초에 계산기로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던 거다.
더 정직하게 말하자면, 그 질문을 피해온 건 바카라이 아니라 나였다. 숫자는 손에 잡히고 구체적이라 붙잡기 쉬웠고, "내가 원하는 삶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붙잡을 손잡이조차 없어서 자꾸 뒤로 미뤄뒀다. 정년까지 남은 연차를 세는 건 계산기 한 번이면 끝나는데, 퇴직 이후 어떤 사람으로 살고 싶은지는 몇 년째 답을 못 낸 채였다.
모건 하우절은 『불변의 법칙』에서 닉슨 대통령의 말을 빌려, 인생을 의미 있게 만드는 건 결국 목표나 고군분투 그 자체라고 말한다. 설령 승리하지 못하더라도 말이다.
이 문장을 곱씹어보니, 결국 삶을 채우는 건 마침내 손에 쥔 결과가 아니라 그걸 향해 다른 이들과는 다르게 흘려보낸 시간 그 자체가 아닐까 싶었다. 통장 잔고를 불리는 일과, 그 잔고로 무엇을 할지를 미리 살아보는 일은 서로 다른 근육이라는 걸, 그제야 알아챘다.
친구가 알려주겠다던 갭투자의 'A to Z'를 배웠다면, 지금보다 통장은 두둑했을지도 모른다(이것 역시 희망회로에 불과하지만). 하지만 그 방법이 내 하루를 채워주진 않았을 거다. 돈을 불리는 법은 배우지 못했지만, 대신 나는 나 자신에게 투자하기로 했다. 마음의 여유가 없어 해보진 않았지만 전부터 마음이 가던 것들을 배우기 시작한 것이다. 나만의 반려 악기를 모색하고, 붓끝에 마음을 싣는 법을 익히고, 바카라을 읽으며 내 생각을 글로 남기기 시작했다. 당장은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 시간들이었다.
재테크 바카라이 알려주지 않는 건 이거였다. 돈을 어떻게 모을지는 계산해 줄 수 있어도, 그 돈을 쥔 손으로 무엇을 할지는 계산기로 나오지 않는다는 것. 그건 남이 대신 정해줄 수 없는, 각자 자기 시간을 들여 미리 살아봐야만 찾아지는 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