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도 후반에 접어들고 있다.
이맘때가 되면 온라인 게임인들은 승진이나 전보 등 다가올 직무 배치를 가늠하기 시작하고, 학생들은 기말고사와 수능 이후의 원서 접수를 준비하며 마음이 분주해진다. 그리고 교사들에게는 연례행사처럼 돌아오는 일이 하나 있다. 개인 인사기록 카드를 정비하는 일이다. 중간에 누락되거나 변경 사항이 반영되지 않은 정보를 확인하여 보완하는 것이다.
몇 년 전, 이걸 확인하다 내 경력란에 찍힌 숫자를 보고 깜짝 놀랐다. 그 당시에도 20년이 훌쩍 넘는 경력 연수에 놀랐었는데, 이제 햇수가 추가되어 교직경력이 27년에 가까워지고 있다. 이 숫자를 보니 예전 기억이 떠올랐다.
교직 2년 차 되던 해, 그땐 행정실에서 교사들의 월급명세서를 개별 출력해서 나눠주던 시절이었다. 관리자 확인을 거쳐 각 교사들에게 개별 전달되었었는데, 교무실에 들렀다가 우연히 교감 선생님 바카라상 위에 놓인 그달 월급명세서를 보게 되었다. 하필 가장 위에 놓인 교감 선생님의 급여 금액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와! 교감 선생님, 월급 부러워요~"
2년 차 교사의 쥐꼬리만 한 월급과 현격히 차이 나는 교감 선생님의 금액을 보고 철없던 마음에 툭 튀어나온 말이었는데, 교감 선생님이 그러시는 거다.
"자네 월급이랑 내 월급이랑 바꾸고, 대신 자네 나이도 나랑 바꿔 줄 텐가?"
늘 농담을 즐겨하시던 분이라 웃으며 넘겼다. 그땐 정말 그 말을 농담으로만 들었다. 교감 선생님의 나이란, 그 흰머리와 굽은 어깨란, 나와는 전혀 다른 시간대에 속한 것처럼 느껴졌으니까. 20대의 나에게 정년이란 개념 자체가 손에 잡히지 않는 먼 이야기였다. 월급의 앞자리 숫자만 부러워했을 뿐, 그 월급에 딸려 온 세월의 무게는 헤아려볼 생각조차 못 했다.
그런데 인사기록 카드 앞에서, 그 오래된 장면이 느닷없이 떠올랐다. 내 경력란 옆에 쓰인 호봉이 어느새 그때 본 교감 선생님의 것과 가까워져 있었다. 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예약해 둔 운동 시간이 여유롭다고 이것저것 딴짓을 하다가, 문득 시계를 보니 5분 전인 걸 알고 화들짝 놀라는 것처럼. 나쁜 습관인 걸 알면서도 매번 반복하는 그 순간이, 인사기록 카드 앞에서 똑같이 재현됐다. 웃으며 넘겼던 그 농담이 사실은 농담이 아니었다는 걸, 이제야, 그것도 종이 한 장에 적힌 숫자를 보고서야 깨달은 것이다.
그 교감 선생님은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계실까. 정년을 맞은 뒤 어떤 아침을 맞이하고 계셨을까. 그땐 궁금해할 생각도 못 했던 질문들이, 이제야 내 것이 되어 돌아온다.
이어령 선생은 대담집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에서, 자신의 죽음과 마주하는 순간을 철창을 뛰쳐나온 호랑이와 맞닥뜨린 것 같은 기분이라고 표현했다. 평생을 언어로, 사유로 다뤄왔던 그 죽음조차 막상 눈앞에 닥치니 예고 없이 튀어나온 맹수처럼 느껴졌다는 것이다. 그때 내게 '퇴직'이란 말이 이런 느낌 비슷한 게 아니었을까. 늘 멀리서 있는 줄로만 알았던 것이, 어느 날 인사기록 카드 한 페이지를 들여다본 순간, 철창을 뛰쳐나와 코앞에 어슬렁거리며 서 있다.
그래서였을까. 몇 년 전부터 나는 이것저것을 배우기 시작했다. 오카리나를 손에 쥐어본 게 6년 전이고, 본격적으로 바카라을 읽고 글을 쓰기 시작한 것도 그즈음부터다. 캘리그래피 붓을 처음 잡은 건 3년 전이다. 그때는 "퇴직 준비"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그냥 좋아서, 궁금해서, 평소 같으면 흘려보냈던 시간에 해본 일들이었다. 그런데 인사기록 카드의 숫자를 마주하고 나니, 그 시간들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의식하지 못한 사이, 나는 이미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이 연재는 그 질문에서 시작한다. 정답을 미리 알고 쓰는 글이 아니다. 나 역시 아직 퇴직하지 않았고, 철창 밖으로 나온 그 호랑이를 마주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도 아직은 잘 모르겠다. 다만 인사기록 카드 속 숫자 하나가 내게 준 그 서늘한 순간을, 그리고 그 이후 내가 무엇을 시작하고 무엇을 그만두었는지를, 이제부터 하나씩 기록해보려 한다.
당신에게도 그런 순간이 있지 않았었나. 어디서 본 숫자든, 누군가의 말이든, 읽은 바카라의 문장이든. 그런 분들에게 내 이야기가 잘 가닿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