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기

나는 언제부터 조급했었나?

by백경화

말을 탄 짬바가 짧은 건 아니다. 중간에 잠깐 쉰 적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10년은 넘게 탄 것 같다. 그러다가 잘 타는 것 같은데 뭔가 폼이 자율학습 느낌이라는 평을 들은 후에 마장마술 레슨을 받기 시작했는데 말 위에서 앉는 법부터 정말 초보적인 수준부터 다시 배우기 시작한 지가 한 3년 됐나? 그리고 올여름 드디어 느끼고, 더불어 내 눈으로 확인까지 한 사실. 그동안 코치들이 "기다리세요."라고 주문하던 나의 고질적인 병폐를 알게 된 것이다. 승마의 원리는 간단하다. 말과 사람은 정해진 언어에 따라 과제를 함께 수행한다. 명령은 사람이 내리고, 말은 따른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말이 알아듣게 명령을 내리시고요, 말이 수행할 때까지 기다리세요. 같이 가야지, 말은 준비가 안 됐는데 혼자 열심히 하는 건 승마가 아니에요." 올여름에 딱 왔다. 말이 내 명령을 받을(혹은 거부 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이 보였고, 이에 명령을 내렸고, 말이 받았고, 수행을 했고, 말의 움직임을 느낀 내 몸이 함께 말과 움직였다. 결코 급하지 않게. 무슨 원인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그토록 원했던 것이 비로소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수영도 10년을 넘게 했다. 횟수로 치면 승마보다 더 열심히 했을 거다. 남들이 다 힘들다는 접영을 잘한다. 그런데 자유형을 가장 못한다. 한 번에 수영할 수 있는 거리도 안 나오고, 당연히 속도도 안 난다. 킥이 너무 불량해서 킥 없이 발목에 풀부이를 끼고 상체로만 진행하는 자유형의 속도가 훨씬 빠른 믿을 수 없는 영자이기도 하다. 그러다가 역시 올여름에 불현듯 그 순간이 왔다. 자유형 때 몸이 물을 타고 앞으로 미끄러져 나간다. 뭐가 다른 지를 곰곰이 생각하면서 풀을 도는데 아, 몸에서 느껴지는 근육의 움직임이 전과는 다르다. 그렇게 찾으려고 해도 안 되던 발등에서 느껴지는 물감. 그리고 광배근이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 팔로 물을 끌어당기는 무게감과 내 몸이 앞으로 죽 밀려나간다는 느낌. 충분히 기다리지 못하고 너무 급했구나. 나는 운동을 좋아하는데 운동 신경은 타고나지를 못했다는 것을 매 번 체감하면서 운동을 했다, 좋아하니까.


작년에 구절초 자와즈키를 두 주 들였다. 시골길 산바카라을 다니다 보면 한 겨울을 제외하고는 들국화 종류가 다양하게 계절마다 피어나는 걸 볼 수 있다. 소박하지만 풍성한 하얀 덩어리는 초록의 풀밭 가운데 청량함을 주기도 하고, 가을에는 하얗게 피는 들국화뿐만 아니라 노랗게 피는 들국화들이 내뿜는 고소한 향까지 더해지면서 욕심이 난다. 하지만 막상 내 정원으로 들이기 어려운 이유는 어마어마한 번식력 때문인데 일찍 들인 샤스타데이지도 봄에 꽃을 보고 난 뒤에는 추가적으로 번진 애들을 뿌리까지 뽑아내는데도 다음 봄이 되면 언제 번졌을까 싶을 정도라 몸을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 그래서 구절초는 그리도 참아왔건만 결국에는 작년에 빈티지만 컬러감에 홀려서 자와즈키 두 주를 심었고, 올해도 자와즈키와 컬러가 연결되면 예쁠 거라는 기대로 어텀 브론즈라는 종으로 또 두 주를 심었다.

올봄 자와즈키가 걱정이 돼서 자와즈키의 유조를 눈이 빠지도록 찾았더랬다. 혹시 내가 쑥이라고 착각해서 뽑아 버린 건 아니겠지? 혹시라도 그럴 수 있을지 모르니 일단 쑥도 어느 정도 키워 놓고 쑥이라는 확신이 들면 그때 뽑아냈다. 그리고 겨우겨우 찾아냈다. 두 주 중 한 주는 더 일찍 피는 극성스러운 개양귀비를 이겨내지 못했나 보다. 자와즈키가 있어야 할 자리에 개양귀비가 떼로 피어났다. 겨우 살아남은 유조를 애지중지 살펴서 여름 내 엄청나게 뻥튀기를 시켰다. 스스로 몸을 주체하지 못할 정도여서 지지대도 세워주면서 애지중지. 올해를 풍성하게 잘 보내야 씨앗이 퍼지면서 안정적으로 매년 구절초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비록 몸은 더 바빠지겠지만 어차피 바쁜 거. 가을을 기다리면서 '구절초'를 '애지중지' 돌봤다.

잘 보면 먼지만 한 꽃눈이 와다다다다 잡혔다. 내 가슴도 막 두근두근. 그리고 가을이 더위가 한풀 꺾이고, 햇살이 강하긴 해도 공기의 느낌은 한결 가벼워진 계절이 됐다. 아침 산바카라길에서는 들국화들의 모습이 간간 보이기 시작했다. 성질 급한 애들은 웃자라 듯 동료들보다 높게 자라서 일찍 하얀 얼굴을 활짝 펴보이기도 했다. 나의 자와즈키도 곧 빈티지한 느낌의 파스텔톤의 부드러운 주황색을 보여주겠지 싶은 기대는 점점 커졌다. 그리고 얼마 뒤에는 남의 집 구절초 덩어리도 하얗게 변해갔다. 한 집, 두 집 하얀 덩어리들이 늘어갔다. 다른 집들에 비해 우리 집은 항상 일주일 혹은 열흘 정도 개화가 늦긴 하다. 그리고 다른 집 애들은 이미 나이가 있는 애들이고, 우리 애는 월동 후 첫 개화니까. 게다가 그냥 하얀 애가 아니니까 성격상 느긋하게 필 것이다. 개양귀비한테도 진 놈인데 애가 좀 소심하고 그럴 수도 있으니까.

다른 집 애들은 하얀 덩어리가 부피를 키우다 못해 살짝 내려앉아서 하얀 애들이 지천인데 너희들은 왜 이래? 우선은 와다다다 준비를 하고 한꺼번에 빵! 하고 터질 준비 중인거지? 가장 좋은 때를 기다리고 있는 거지? 이때부터 나의 조급증은 시작되고 있었나 보다. 마음 같아서는 자와즈키를 다시 두 주 정도를 사서 심고 싶었지만 판매처에서는 더 이상 판매를 하지 않아 비슷하게 판매하는 어텀 브론즈라는 이름의 구절초를 두 주 들였다(색깔에 눈이 돌아 구절초라고 굳게 믿었는데 심고보니 국화다. 판매 문구도 국.화.라고 분명히 써 있다). 얘들을 보고 있으면 조바심이 덜해지지 않을까? 그러나 어떰 브론즈는 어텀 브론즈고 자와즈키는 자와즈키더라. 얼마 정도는 애써서 calm down을 노력했지만 어느 사이엔가 아침에 일어나면 바로 애들 상태를 확인하고, 아침 햇살을 충분히 받았겠지 하는 시점이 되면 또 확인하고, 석양까지 충분히 흡수했겠지 하는 시간이 되면 또 확인을 했다. 오늘로 한 20일째 이렇게 반복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매일 AI도 들들 볶아대고 있다. 오늘은 이만큼인데 언제쯤이면 애들이 피는 거야. 내가 자와즈키 색깔이 생각이 안 나는데 자와즈키 만개 때의 이미지를 보여줘. 다른 집 애들은 이미 만개인데 우리 애들은 왜 이런 거야? 내가 뭘 더 해야 할 일이 있을까? 불쌍한 GPT군. 자와즈키도 나에게 쪼이고 있는 걸 알까? 내가 너무 쪼아서 애가 좀 더딘가 싶은 진짜 멍청이 같은 생각이 들 정도로 나는 보고 싶다고! 아니, 재수가 없어서 흐린 날이 계속되고, 그러다가 날씨가 갑자기 추워져서 봉오리가 피지도 못하고 얼어버릴 수도 있잖아. 내 정원에서는 처음이니까 완벽하게 적응해서 나는 잘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면 물린 봉오리가 모두 활짝 펴서 부드러운 구릿빛 주황의 덩어리로 증명을 해야 하는 거라고. 내가 무리한 요구를 하는 건 아니잖아?라는 생각이 든다는 건 무리한 요구를 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나도 알아.

그런데 봐봐. 저렇게 하루하루 티도 안 나게, 내가 눈을 비비면서 째려봐야 알 수 있게 꽃잎이 한 개가 펴지고, 한 개의 꽃잎이 펴진 열린 봉오리들의 수가 많아지는 게 눈에 보이면 다리가 달달달 떨릴 정도로 조바심이 생기는 건 너무 정상적인 반응이 아닐까? 내가 작년에 봤던 그 색깔. 사실 정확하게 잘 생각이 나지도 않고, 찍어 놓은 사진을 찾아보면 될 텐데 수만 장은 될 법한 나의 앨범에서 작년의 그 모습을 찾아낼 정도의 노력은 들이고 싶진 않고. 매일매일 더 열심히 힘을 내 보라고 쪼듯이 보는 게 어쩌면 내 조바심을 다스리며 기다리는 방법은 아닐까? 남들은 눈치도 채지 못할 만큼의 작은 변화를 나는 알아보면서 조금 더, 조금 더. 수요일이 되면 날이 더 추워진다는데 그전에 힘을 조금 더 내면 좋지 않을까? 물론 너는 추위 정도는 이겨내겠지만 그래도 조금이라도 좋은 시기에(물론 내 생각에. 너의 최적기는 나의 생각과 다를 수 있겠지만.) 피어주는 게 조금 더 편하고 예쁜 색을 낼 수 있지 않을까? 기대 혹은 응원. 첫 봉오리에서 보이는 핑크색이 꽃잎이 펼 수 있는 시간을 더했을 때 주황빛으로 변해가는 변화. 이런 걸 순간순간 놓치지 않고 섬세하게 확인하는 마음이 오히려 나의 조급증을 달래주는 것은 아닐까?

어차피 자와즈키는 내가 아무리 째려보고, 매일 쪼아대도 자기의 계획에 따라, 자기의 컨디션에 따라 가장 좋은 때에 스스로 피어날 테지만 그래도 바보 같은 생각을 하면서도 매일 달라지고 있는 모습을 확인하는 것도 좋아하는 마음의 표현이니까 어차피 20일 바보짓을 한 거 주황색 덩어리가 빵! 터질 때까지 계속 쪼아 볼 생각이다. 조바심을 내는 건 강박증 환자 같고, 정신 건강에 안 좋을 것 같기도 한데 생각해 보니까 굳이 안 하려고 하는 게 더 병든 마음이 될 것 같은 느낌적 느낌이 든다. 나는 뭐, 운동 신경이 없는 걸 매일 느끼면서도 좋으니까 돈과 시간을 들이는 사람인데 그깟 며칠 더 해 볼 생각이다. 애초부터 나는 그다지 스마트한 인간은 아니었던 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