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는 건 좋지만, 해보면 관두고 싶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을비가 오고 있다. 그것도 꽤. 비 오는 걸 무지 싫어하는 율은 산바카라을 하러 나갔다가 대문을 나선 뒤 바로 비 오는 꼴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한 후 바로 얼음이 되어 버렸다. 리드줄을 살짝 느슨하게 놔줬더니 자연스럽게 집으로 몸을 돌리고 세모눈으로 쳐다본다. 이것은 오줌을 잠시 참겠으니 일단은 집으로 들어가자는 요구다. 축축한 저기압의 상태를 소파에서 좀 달래고 싶고, 지금은 발바닥에 물을 묻히고 싶지 않다는 얘기다. 쉬는 해야 하지 않겠냐고 억지로 자주 가는 쉬 존(zone)으로 이끌어 보기도 했는데 우리 아가도 이젠 나이가 들어서인지 안 하겠다는 걸 억지로 시켜봤자 의미가 없다. 결국에는 자기 고집대로 하고야 만다.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한 후 셋이서 1층 큰 창으로 비 오는 풍경만 보고 있다. 잠깐 나가봤더니 새콤이랑 재색이도 비를 피하느라 집을 하나씩 차지하고 쉬고 있다. 쉬 산바카라은 비가 그친 다음에 여유 있게 나가 보자.
가을비는 좀 반갑긴 하다. 더위가 가시고, 시원한 바람이 부는 즈음에는 내년 봄을 위해 씨앗이나 새로운 모종도 심고, 자리가 안 좋은 애들은 자리를 옮겨 주기도 하는데 이 일을 하기 위해서는 땅을 고르는 작업이 선행되기도 해야 하고. 이래저래 소소한 일거리가 생기긴 한다. 이래놓고서 해야 할 일이 씨앗이나 자리를 옮긴 애들이 새 땅에 적응을 잘할 수 있게 물을 뿌려줘야 하는데 아무래도 비 없이 건조한 날이 계속되니 직접 긴 호스를 들고 다니면서 물을 줘야 하는데 이게 또 한동안 안 하려다가 하려니 귀찮기도 귀찮다. 게다가 이렇게 발을 옮겨가며 물을 주다 보면 그동안 안 보이던 것들이 또 눈에 띄기 시작하는데 이것들을 그냥 두고 넘기기가 쉽지 않다는 거다. 곧이어 짜증이 확 밀려온다. 아! 풀, 또! 저거 저거 정리해야 되는데, 한 번 잡으면 시간이 걸려서 주말에 하기로 했는데,..... 갈퀴나물 새싹 나왔어! 장미 전지도 해야 하고, 정신없이 번진 톱풀 저거도 싹 다 정리해야 하는데,...... 전지 후 말려 놓은 가는 가지들은 잘라 놔야 바크로 쓰지, 저거 지금 자를 거 아니면 비 오기 전에 옮겨 놔야 하는데 등등등....... 일거리가 눈에 보인다. 그런데 일이라는 것이 내가 아무리 좋아서 한다고 해도 노동의 리듬이 한 번 끊긴 걸 다시 시작하려면 정말 큰 마음을 먹어야 하는 거라 쉽게 시작이 안 된다. 게다가 정원은 살아 움직이는 곳이라 시기를 놓치면 노동의 강도는 훨씬 올라가기 마련이고. 눈은 흐린 눈을 한다고 쳐도 마음의 무게는 시간이 갈수록 무거워질 수밖에 없다. 그러다가 심적 무게를 도저히 이길 수 없을 때가 되면 드디어 쭈그리고 앉게 된다. 여하튼 그러다가 드디어 어제 정원 한 귀퉁이에서 몰래 번지다가 울창해져 버린 칡 덩굴을 정리했다. 하면서 가늘게 자라나 뻗은 찔레 줄기도 정리하고, 바닥에서 가늘게 자라는 잡풀들, 전지 후 말리느라 널어놓은 안개 나무 가지들을 정리했다. 그리고 났더니 가을비가 온다. 어제 정리하면서 보니 흙이 부슬부슬하던데 어젯밤부터 꾸준히 내린 가을비로 흙이 촉촉해졌겠다. 덕분에 오늘은 호스를 들고 다닐 일은 없다. 내일, 모레까지는 좀 게을러야지.
20일을 넘게 쪼아댔더니 구절초 자와즈키가 본인의 업무를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풍성한 덩어리감을 자랑하지만 가볍게 올라온 꽃들이 산들거리는 건 너무 보기 좋다. 자기 몸뚱이의 한계도 모르고 대가리만 엄청 키웠던 목수국 애들도 가까스로 살아남아서 단풍까지 들었다. 내년에는 부지런히 전지를 해서 외목대로 만들어봐야지. 딱 이 맛에 키우는 홍띠도 색이 너무 예쁘게 물들었다. 기대하기로는 경사지의 맨 밑단을 일자로 길게 이어진 붉은 띠를 만들고 싶었는데 매번 느끼는 바이지만 정원의 애들은 절대 내가 원하는 바대로 커주지 않는데 오로지 하고 싶은 대로의 고집을 꺾지 않는다. 내년에는 홍띠도 숱을 쳐줘야 한다. 생각한 바로는 이어져야 할 붉은 띠의 땜통이 생긴 부위를 바니테일이 보송보송 올라오게 하는 건 어떨까 상상했는데 1, 바니테일이 보송보송하게 올라오는 계절은 봄이고 봄에 홍띠는 그냥 초록풀로 볼품이 없다. 2, 바니테일은 햇빛을 충분히 받아야 보송한 꽃이 풍성해진다는데 키가 작아서 아마도 홍띠에 묻혀서 광량이 부족할 것 같고. 3, 결정적으로 빨간 홍띠가 이어진 긴 구간의 중간중간 보송거리는 바니테일이 점처럼 들어가길 바라는 나의 바람은 계절적으로 만나지 못하는 두 아이들의 식생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상상은 아름답지만 불가능한 현실이라는 점.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가을 정원을 돌아본다.
9월 말이 되면서 이제 10월이 된다는 생각에 엄청난 짜증에 시달렸다. 11월, 12월에 새롭게 시작해야 하는 중요한 일들이 많아서 준비의 마지막을 10월 안에는 마무리를 지어야 하는데 이에 대한 스트레스가 컸다. 도망치고 싶고, 왜 하려고 했나, 시작을 해도 성공은 보장되어 있지 않은 도전인데 안 하는 게 낫지 않았나 싶은 두려움들이 10월을 마주하고 싶지 않게 했는데 10월은 와버렸고, 밀도 높은 시간을 보내기도, 큰 의미 없이, 속절없이 지나는 시간을 보내기도 하면서 벌써 중순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지금도 당장 오는 비가 그쳐서 율이 쉬 산바카라을 성공해야 하는데 이것조차 안 돼서 의미 없이 속만 끓이고 있다. 그나마 시간차에 맞춰 일이 딱딱 진행이 되어줘야 오늘 계획한 일들이 순차적으로, 빼먹는 것 없이 실행이 될 텐데 그런 안정감이라도 있어야 불안한 10월을 보낼 수 있을 텐데. 어제도 정신없이 보내면서 못한 일을 오늘로 미뤄서 해야 할 일이 있는데 아,..... 시작을 하지 않았으면 없었을 이 불안감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냥 해내고 있다. 아침에 일어나서 다이어리에 순서대로 정리해 놓은 것들을 지워 가면서 순서가 좀 뒤틀렸어도 그냥 하고 있다. 하다 보면 뭐라도 되어 있겠지. 아예 안 한 것보다 뭐라고 되어 있겠지 그게 비록 근육통일지라도, 찔레를 정리하다 억센 가시에 찔려 생긴 염증일지라도 뭔가 결과가 있긴 하겠지. 아,.... 다 때려치우고 싶은데 그냥 하고 있다. 하기로 했으니까. 하다 하다 안 되면 그때 그만해야지.
율아, 비가 좀 그친 것 같고, 새소리도 나고, 하늘도 좀 파랗게 보이는 것 같다. 쉬 하러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