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심한 날들이 오래 이어지는 것

by지후트리
행복.jpg수어그림 < 행복 > / 지후트리 / 2021



각자 살아온 환경이 다르니 행복의 조건도 저마다 다를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시간이 행복일 테고, 누군가에게는 성취나 풍요가 행복일 수도 있다. 내게 행복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요즘은 꽤 심심한 대답을 하게 된다.


별일 없이 하루를 보내는 것.


고난의 시간들을 몇 번 건너오고 나니 심심한 일상을 살아내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행복처럼 느껴진다. 굳이 이름을 붙인다면 ‘고통의 부재’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물론 찰나에 찾아오는 행복도 있다. 영롱한 풍경 앞에서 한동안 말을 잃거나, 아름다운 것을 바라보다 이유 없이 마음이 뭉클해지는 순간. 예상하지 못한 경외감이 몸을 통과할 때면 분명 행복하다고 느낀다. 다만 그런 감정은 오래 머물지 않는다. 강렬하게 찾아왔다가 어느새 사라진다.


내가 요즘 생각하는 행복은 조금 다르다. 구태여 행복하다고 느끼지 않아도 되는 상태에 가깝다. 무언가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아도 하루를 무사히 살아낼 수 있고, 내 몸과 마음을 스스로 돌볼 수 있으며, 혼자 있는 시간이 결핍으로 느껴지지 않는 것. 어쩌면 행복은 눈에 보이는 형태를 만드는 일이 아니라 나를 온전히 돌보고 사랑할 수 있는 상태인지도 모른다.


불교에서는 인간의 삶에서 괴로움을 완전히 떼어놓을 수 없다고 본다. 모든 것은 변하고, 원하는 것을 언제까지나 붙잡아둘 수도 없다. 사람도 관계도 감정도 결국 흘러간다. 그 사실을 거스르며 무언가를 붙잡으려 할수록 마음에는 괴로움이 생긴다. 이 관점에서 생각하면 행복은 삶에 좋은 것만 가득 채워 넣는 일이 아니라, 무언가가 있어야만 괜찮을 거라는 마음에서 조금씩 자유로워지는 과정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혼자 있다는 사실도 마찬가지다.


인간은 살아가는 동안 외로움을 완전히 피할 수 없는 존재일 것이다. 누군가와 함께 있어도 외로운 순간이 있고, 사랑받으면서도 문득 혼자인 것 같은 밤이 찾아온다. 이제는 그 감정을 반드시 없애야 할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외로움이 가끔 내 곁을 스쳐가는 것과 외로움이 내 삶 전체를 잠식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기 때문이다.


혼자 운동을 하고, 바카라을 읽고, 작업을 한다. 글을 쓰고 퍼포먼스를 연습하며 하루를 보낸다. 특별할 것 없는 일들이 차곡차곡 쌓이다 보면 어느 순간 내 안이 제법 충만하다는 걸 발견한다. 누군가가 채워주어서 생긴 충만함이 아니다. 내가 나의 하루를 살아낸 끝에 자연스럽게 남아 있는 감각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지족(知足)은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알고 만족할 줄 아는 마음을 뜻한다. 나는 이 말을 체념이나 욕망의 포기로 받아들이고 싶지는 않다. 더 나은 삶을 바라면서도 지금의 나를 결핍된 존재로 취급하지 않는 태도에 더 가깝다고 생각한다. 원하는 것이 생길 수 있고 누군가를 사랑할 수도 있으며 더 멀리 가고 싶을 수도 있다. 그것들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지금의 삶이 불완전해지는 것은 아니다.


생각해 보면 충만함은 무언가로 빈 곳을 가득 채우는 일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비어 있는 자리를 견딜 수 있게 되는 것, 그곳에 반드시 무엇인가를 가져다 놓지 않아도 편안할 수 있는 것. 혼자 있는 시간마저 하나의 온전한 삶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것. 요즘의 나는 꽤 심심하게 산다. 운동하고, 읽고, 쓰고, 작업한다. 때때로 외롭고 때때로 지치지만 그 감정들이 삶 전체가 되지는 않는다. 하루를 마치고 나면 오늘도 내 삶을 잘 돌보았다는 잔잔한 감각이 남는다. 예전에는 행복이 찾아오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좋은 일이 생기거나 좋은 사람을 만나거나 아름다운 순간을 마주쳤을 때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감정이라고.


지금은 조금 다르게 생각한다.

행복은 어쩌면 형태가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특별히 행복하다고 말하지 않아도 되는 하루, 무언가가 없어도 나를 결핍이라 여기지 않는 마음, 혼자인 순간에도 내 삶이 충분히 이어지고 있다는 감각.

그런 심심한 날들이 오래 이어지는 것.

요즘 내가 생각하는 행복은 그 정도면 충분하다.




글 지후트리 ghootree

그림 지후트리 ghootr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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