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진 지 오래된 사람과 이별했다.

by지후트리
수어그림 < 오토바이 > / 지후트리 / 2017


꿈에 전 남자 친구가 나타났다. 완전한 이별을 하기 위해 나를 찾아왔다고 했다. 우리가 물리적으로 헤어진 것은 이미 여러 해 전의 일이지만 정신적으로는 아직 헤어지지 못한 관계였다고 했다.

헤어진 뒤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태연하게 나타난 그와 나는 1박 2일의 여행을 떠났다. 그는 늘 내가 가보지 못한 곳으로 나를 데려가던 사람이었다. 내가 알지 못했던 것들을 보여주고 해보지 않았던 것들을 경험하게 했다. 그를 만나기 전과 후의 나는 꽤 다른 사람이 되었다. 지금 내가 살아가는 방식도, 하고 있는 일도 그 시절을 지나며 조금씩 방향을 틀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여전히 고맙게 생각한다.

꿈에서도 그는 그랬다. 내 손을 잡고 다정한 눈빛으로 이곳저곳을 보여주었다. 오래전에 헤어진 사람들이 아니라 아직 서로를 사랑하던 어느 시절의 우리 같았다. 여행하는 내내 마음은 이상할 만큼 평온했다.

이튿날이 되자 관계의 끝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우리는 어딘가 낯설지 않은 카페로 들어갔다. 그와 함께 마실 커피를 주문하려던 순간, 가방에 달려 있던 지갑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지갑에 붙어 있던 작은 장신구들이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근처에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아무도 그것들을 주워주지 않았다. 바닥에 흩어진 것들을 바라보다 그에게 말했다.

"거기 발밑에 있는 것들 주워줘, 여보."

입에서 너무 자연스럽게 '여보'라는 말이 나왔다. 그는 아무렇지 않게 그것들을 주워 주웠다. 우리는 그가 잡아둔 자리로 가서 마주 앉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이 하나둘 카페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에게 인사를 하러 온 사람들이었다. 나와도 아는 사람들이 있었고 처음 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는 한 명 한 명과 인사를 나누느라 바빴다. 나는 가만히 앉아 그 모습을 바라봤다. 그러던 중 그가 2주 뒤면 한국을 완전히 떠나 해외에서 살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 소식을 듣고도 마음은 덤덤했다. 그가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과 충분히 인사하고 이야기할 수 있도록 기다렸다. 멀리서 그와 오랜만에 만난 형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은 우리가 오래전에 헤어졌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았다.

"둘이 만난 지 7년 된 거 아니었어? 잘 이야기해서 계속 만나봐. 요즘은 전 세계가 다 연결되어 있잖아. 이동하기도 편하고."

그 말을 들으며 문득 이 모든 대화를 일부러 내가 듣게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과의 대화를 마친 그가 내 쪽으로 걸어왔을 때 먼저 물었다.

"2주 뒤에 아예 해외로 가는 거야?"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완전한 이별을 하려고 나를 찾으러 온 거구나?"

그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하게도 슬프지 않았다.

우리는 여러 해 전에 물리적으로 헤어진 것은 맞지만 정신적으로 헤어진 게 아니었던 것 같다고 했다. 내가 진심으로 행복하길 바라고 여전히 나를 사랑하지만, 자신은 결혼을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우리는 잘 지냈지만 결국 관계의 끝에는 결혼이라는 서로 다른 미래가 놓여 있는 것 같다는 이야기도 했다. 관계에 마침표를 찍는 어떤 노래에 대한 서사를 한참 설명하더니 우리의 상태가 꼭 그 노래 같다고 말했다.

"난 처음부터 당신 얼굴 보고 좋아했어. 당신은 여전히 아름답고 사랑스러워."

한때 그게 내게 수없이 해주었던 말이었다.

나조차 나의 가치를 제대로 알지 못하던 시절, 그는 내가 얼마나 아름답고 괜찮은 사람인지 끊임없이 말해주던 사람이었다. 내가 가진 것을 나보다 먼저 발견해 준 사람이기도 했다. 그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같은 사람에게 아주 깊은 상처도 받았다. 우리의 마지막은 아름답지 않았다. 사랑했던 시간만큼 미워했던 시간이 있었고, 이해하려다가 끝내 포기한 마음도 있었다. 헤어졌다는 사실은 분명했지만 좋지 않은 결말 때문이었는지 마음 한구석에는 오래도록 정리되지 않은 짐 같은 것이 남아 있었다.

다시 만나고 싶다는 마음과는 달랐다. 돌아가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그저 제대로 끝내지 못했다는 감각에 가까웠다. 끝났는데 꿈속의 그는 이제는 나와 완전하게 안녕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그 말을 끝으로 꿈에서 빠져나오던 순간, 내가 무언가를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사는 내내 행복하고, 나의 젊은 날의 한 페이지를 찬란하게 빛나게 만들어줘서 고마워. 잊지 않을게."

잠꼬대로 그 말을 하며 눈을 떴다.

한동안 가만히 누워 있었다. 슬프지 않았다. 오래 들고 있던 짐 하나를 어딘가에 내려놓고 온 사람처럼 마음이 이상할 만큼 고요했다.

그를 용서했다거나 우리가 겪었던 좋지 않은 일들이 이제 아무렇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상처는 상처였고 그 상처 때문에 우리는 헤어졌다. 그 사실까지 아름다운 추억으로 바꿀 필요는 없다. 한 사람과의 관계가 나쁘게 끝났다고 해서 그 사람과 보낸 모든 시간까지 나쁜 것이 되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나의 젊은 날을 함께 지나온 사람이었다. 나를 사랑해 주었고, 내가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나의 가치를 알아봐 주었고, 내가 모르던 세계로 여러 번 나를 데려갔다. 그 세계를 통과한 나는 전과 다른 사람이 되었다. 삶의 방향도 달라졌고 하는 일도 달라졌다. 우리는 서로의 곁에 남지 못했지만 그때의 경험들은 내 안에 남아 지금의 나를 만드는 재료가 되었다.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싶었다.

왜 하필 지금 이런 꿈을 꾸었을까. 꿈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무의식이 만들어낸 한 편의 이야기일 수도 있고 오래된 기억들이 우연히 뒤섞여 만들어진 밤의 장면일 수도 있다. 나는 이 꿈을 이제 앞으로 가도 된다는 신호처럼 받아들이고 싶었다.

오랫동안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던 그 사람의 자리를 비워도 된다고. 좋았던 것은 좋았던 것으로, 아팠던 것은 아팠던 것으로 남겨둔 채 어느 한쪽도 부정하지 않고 그 시간을 지나가도 된다고.

현실의 우리는 좋은 작별을 하지 못했다. 어쩌면 마음이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우리에게 마지막 장면 하나를 만들어준 것인지도 모르겠다. 손을 잡고 여행하고, 흩어진 것들을 함께 주워 담고, 한때 우리를 알았던 사람들과 인사를 나눈 뒤 서로 다른 곳으로 떠난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장면. 사랑했던 사람이 사랑했던 사람에게 행복하기를 바란다고 말하는 것으로 우리의 마지막 장면은 끝났다.

꿈속에서 해외로 떠나야 했던 사람은 그였지만, 깨어나 생각해 보니 이제 떠나야 하는 사람은 나였을지도 모르겠다. 과거의 어느 시간에 오래 머물러 있던 나의 일부가 그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걸어가야 할 때가 된 것인지도 모른다.

이번에는 그를 붙잡지 않았다. 다시 만나자는 말도 하지 않았다. 사랑했다는 사실도, 상처받았다는 사실도, 그 사람으로 인해 내 인생의 방향이 조금 달라졌다는 사실도 그대로 두기로 했다. 어느 것도 지워야 할 필요는 없었다. 모두 나의 시간이었으니까.

눈을 뜬 뒤 처음으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제 진짜 그와 이별했구나.

그와 헤어진 지 여러 해가 지난 뒤에야 비로소, 그 사람과 함께 머물러 있던 그 시절의 나도 앞으로 걸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글 지후트리 ghootree

그림 지후트리 ghootr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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