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잠이 깼다.
억지로 다시 잠을 청하지 않았다. 거실로 나와 노트북을 켰다. 창밖에서는 희미한 빛이 조금씩 번져 들어오고 있었다. 새벽은 늘 그렇듯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조용한데, 이상하게도 그 시간에는 가장 많은 일들이 마음속에서 시작된다. 처음에는 아주 작은 생각이었다. 안 쓰는 물건을 버려야겠다. 생각 하나가 바닥에 툭 떨어졌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도미노가 쓰러지기 시작했다. 버릴 물건을 떠올리다 보니 오래전부터 한쪽에 기대어 있던 그림 재료들이 눈에 들어왔다. 먼지를 뒤집어쓴 색연필과 종이, 손에 익었던 도구들. 한동안 멈춰 있던 것은 재료가 아니었다. 시간이었다.
아무것도 없던 시절이 있었다. 가진 것은 많지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하루는 늘 바빴다. 수어 단어 하나를 그림으로 그리고, 작은 카드에 옮겨 담아 주머니에 넣고 다니던 시절. 그때는 매일이 채집이었다. 길을 걷다가도, 사람을 만나도, 영화를 보다가도 하나의 단어를 발견하면 집으로 돌아와 그림을 그렸다. 지금이라면 사람들은 그것을 챌린지라고 부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냥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생각은 또 하나를 밀어냈다.
이번에는 두꺼운 종이를 사야겠다. 색연필로 하루에 하나씩 수어 단어를 그려보자. 오일파스텔도 좋겠다. 색이 겹쳐질 때 생기는 질감은 늘 마음을 움직인다. 그 작은 그림들이 하나둘 쌓이면 사진을 찍고, 영상을 만들고, 글을 쓸 수도 있을 것이다. 결과보다 과정이 궁금한 시대 라면, 내 작업의 흔적들도 하나의 작품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도미노는 멈추지 않는다.
그림을 생각하니 기록이 떠오르고, 기록을 생각하니 블로그가 떠오른다. 블로그는 더 이상 글만 올리는 공간이 아니다. 실험을 모으는 연구소. 미완성과 실패를 숨기지 않는 아카이브. 생각이 어디에서 시작되어 어디까지 흘러가는지 남겨두는 장소. 언젠가 누군가는 완성된 작품보다 그 흔적을 더 오래 들여다볼지도 모른다.
또 하나가 쓰러진다.
오래 작업하려면 체력이 필요하다. 좋은 생각도 오래 앉아 있을 몸이 있어야 끝까지 따라갈 수 있다. 예전에 누군가 말했다. 다정함은 체력에서 나온다고. 이제는 그 말을 조금 알 것 같다. 몸이 지치면 마음도 쉽게 메말라 버린다. 반대로 몸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마음도 다시 색을 얻는다. 그래서 운동을 시작하기로 했다. 거창한 계획은 아니다. 복부 운동을 하고, 정해진 요일에는 수영을 하고 와서 디지털 작업을 하고, 매일 손으로 한 장의 그림을 그린다. 루틴은 나를 묶는 규칙이 아니라, 창작이 계속 숨 쉬게 하는 호흡이다.
생각은 다시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최근 들어 새로운 사람과 좋은 시간을 보내면서 오래 잊고 있던 감각 하나가 다시 깨어났다. 더 건강해지고 싶다. 더 좋은 작업을 하고 싶다. 더 매력적인 사람이 되고 싶다. 누군가를 위해서라기보다 그런 마음이 생겨난 지금의 나를 위해. 그 사람과 어떤 미래가 있을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내 삶에 머물지 않아도 계절 하나를 바꾸어 놓는다.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문득 미래를 상상하게 되었다. 조금 능력이 생기고, 조금 더 여유가 생긴 어느 날에는 누군가와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걸을 수도 있겠다고. 예전에는 상상하지 않았던 미래였다. 가능성을 다시 믿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은 조금 환해졌다.
생각은 늘 그렇게 이어진다.
버릴 물건 하나가 그림을 불러오고,
그림 하나가 기록을 불러오고,
기록 하나가 루틴을 만들고,
루틴은 몸을 움직이고,
몸은 다시 마음을 움직인다.
삶은 거대한 결심으로 바뀌는 것이 아니라 작은 도미노 하나가 넘어가는 순간부터 달라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완벽한 사람이 될 생각은 없다. 대신 멈추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 한 장의 그림을 그리고, 한 편의 글을 쓰고, 한 번 더 몸을 움직이는 사람. 실수는 수정하면 되고, 방향은 걸으면서 찾으면 된다. 기록은 늘 현재에서 시작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누군가의 길이 된다.
그래서 오늘도 하나를 남긴다.
한 장의 종이.
한 줄의 문장.
그리고 아주 작은 움직임 하나.
새벽은 어느새 아침이 되어 있었다.
도미노는 이미 쓰러지기 시작했고, 나는 그 움직임 속에서 다시 청춘을 배우고 있었다.
글 지후트리 ghootree
그림 지후트리 ghootr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