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등산을 그리 즐기지 않는다고 했다. 그의 취향을 존중해 우리는 북한산 등반 대신 나란히 둘레길을 걷기로 했다. 사적인 공간에서 둘만의 발걸음을 맞추며 흘러나온 그의 개인적인 서사는 무척 흥미로웠다. 뮤직비디오 감독이라는 화려한 이름 뒤에 숨겨진 영상 업계의 녹록지 않은 현실, 특히 저예산 작업에서 오는 고충들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즐거운 현장을 만들려 애쓰는 그와 달리, 누군가는 그 맑은 물을 흐려놓기도 하는 모양이었다. 최근에는 저예산 뮤비를 의뢰한 아티스트와 의견 충돌이 있었는데, 상대방이 트위터 멘션으로 문제를 공론화하더니 심지어 그 갈등과 비방의 과정마저 자극적인 숏폼 콘텐츠로 만들어 릴스에 올렸다고 했다. 씁쓸한 웃음이 났다. 어떻게 보면 그런 자극마저 영리하게 소비해 버리는 요즘 뮤지션이 가장 현명한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현장의 환멸과 회의감 속에서 그는 유튜브라는 새로운 통로를 고민하고 있었다. 거창한 기획 대신 이것저것 가볍게 올려보며 대중의 반응을 살피겠다고 했다. 그의 수려한 외모가 아까워 "네 얼굴만 나와도 그 자체로 재미있는 콘텐츠가 될 텐데, 제발 시작부터 해봐"라며 등을 떠밀었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저으며 정작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카메라 앞에 서면 어색하기도 하고, 막상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잘 모르겠다는 게 그의 고충이었다.
오히려 그는 나를 보며 "누나는 콘텐츠가 워낙 확실해서 유튜브를 하면 참 좋긴 하겠는데, 한편으로는 유튜브라는 플랫폼과 결이 잘 안 맞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라고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이유를 물으니, 나는 색깔이 워낙 명확하다 보니 무언가를 완벽하게 준비해서 멋지게 보여주려는 성향이 강해 보여서, 유튜브 특유의 날것 그대로의 일상을 툭 올리는 건 주저할 것 같다는 이야기였다. 정곡을 찔린 기분이었다. 누군가에게 비친 내 성향을 듣고 나니 내가 그동안 왜 시작을 망설였는지 명확해졌다. 영상 감독인 그를 통해 요즘 트렌드를 들으니 비로소 정신이 번쩍 들었다. 유튜브와 어우러지기 위해서는 힘을 빼야 한다는 것, 완벽을 기다리기보다 일단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체감한 순간이었다.
문득 그가 최근에 본 나의 모델 사진 이야기를 꺼냈다. 이미지와 잘 어울리는 에이전시가 있다며 지원을 적극 권유해 주었고, 나는 놓칠세라 그곳을 캡처해 두었다. 지원서를 작성해 넣어봐야겠다. 나라는 존재를 세상에 알리는 한 편의 광고라 생각하니 설렘이 앞선다.
부지런히 걸은 덕분에 먹은 것에 대한 스트레스도 자연스레 씻겨 내려갔다. 먹고 바로 눕지 않겠다는 다짐, 그리고 체중을 관리해 이 몸을 소중한 자산으로 쓰겠다는 다짐을 다시금 굳건히 한다.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과 대화할 때마다 깨닫는다. 나는 제법 유니크하고, 특별하며, 충분히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그러니 조금만 노력을 기울여보자. 아직 어색한 의성어 연기나 다채로운 소리를 내는 연습도 게을리하지 말아야지.
북한산의 풍경을 기록하려 카메라를 들었을 때, 그가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건넸다. 써보니 제법 근사하게 어울렸고, 그는 내 휴대폰을 가져가 셔터를 누르기 시작했다. 찍힌 사진들을 보니 입만 다물면 정말 멋진 컷이 나올 것 같았다. 카메라 앞에서 슬며시 입을 다물자 어색함이 감돌았는지, 그는 나직하게 조언했다. "자연스럽게 머리카락을 한번 넘겨봐요. 훨씬 자연스러워질 거예요"
그의 말대로 시선을 떨구며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 순간, 거짓말처럼 옆모습 인생샷이 탄생했다. 수없이 셔터를 누르는 와중에 진주 같은 한 컷을 건져내는 것, 포토샵 하나 없는 그 결과물을 보며 역시 전문가의 시선은 다르다는 감탄이 절로 나왔다. 그 순간 쏟아진 다정한 눈길과 분위기는 마치 "오늘 밤은 달이 참 밝네요"라는 말처럼, 직접적인 고백보다 깊은 은은한 온기로 내 마음을 채우는 듯했다.
이제 정말 물러설 곳이 없다.
6월 초에는 기필코 유튜브를 시작해 나라는 사람을 다각도로 마음껏 뽐내어보리라. 캐스팅 디렉터들의 시선이 머물 수 있도록, 완벽이라는 외투를 잠시 벗어두고 날것의 나를 세상에 던져볼 차례다.
타인의 시선을 통해 나의 고유함과 감춰둔 망설임을 동시에 발견했던 것처럼, 우리는 언제쯤 완벽이라는 준비 태세를 버리고 온전히 투명한 나 자신으로 세상과 마주할 수 있을까?
글 지후트리 ghootree
그림 지후트리 ghootr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