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속에 숨어있던 가장 뜨거운 배우를 깨우다

by지후트리
수어그림_버섯.jpg수어 그림 < 버섯 > / 지후트리 / 2015


2026년도 벌써 다섯 달이 지나 반년을 채워가고 있다. 올 상반기로부터 1년 안으로 승부를 봐야 하는 일들이 눈앞에 수두룩하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은 조급하지 않다. 급할수록 처음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근본을 제대로 잡아야 길을 잃지 않는다는 것을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세상에 태어나 살아온 세월이 어느덧 38~39년 직전이다. 문득 앞으로 남은 40~50년의 세월을 무얼 하며 즐겁게, 기꺼이 살아낼 수 있을지 깊은 골몰에 빠졌다. 그리고 내 영혼의 가장 깊은 심연을 들여다보았을 때, 그곳에는 늘 한 가지 갈망이 꿈틀대고 있었다. '내 안의 감정을 어떤 형태나 모양으로 꺼내어 보여줄 수 있을까.'


나의 이 오랜 갈망은 꼭 빛이 들지 않는 어두운 흙 속에서 묵묵히 뻗어나가는 '버섯의 균사체'를 닮았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밑바닥에서부터 끊임없이 생명력을 확장해 나가는 버섯처럼, 나 역시 아주 오래전부터 나만의 표현 방식을 확장해 오고 있었다.


시작은 학창 시절이었다. 포토샵을 독학해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활동하며, 실력자들의 강좌를 반복하고 결과물을 만들어내며 성취감을 쌓았다. 오프라인에서는 편지지에 정성 어린 그림을 그려 마음을 전했다. 그 열정은 곧 관찰력과 표현력이라는 나만의 강력한 무기가 되었다. 남다른 관찰력 덕에 길을 잘 외웠고 특징을 잘 묘사했으며, 색을 다루는 감각도 남달랐다. 특히 내 손을 오랫동안 관찰하며 그리다 보니 손가락을 특이학고 개성 있게 잘 쓰는 재능이 발견 됐다.


그 발견은 나를 '수어로 그림을 그리는 작가'로 이끌었고, 전시장이라는 지상 위로 첫 고개를 내밀게 했다. 하지만 평면에 갇힌 수어를 입체적인 언어로 발현하고 싶다는 갈증이 다시 시작됐다. 어두운 숲 속, 습기를 머금은 통나무 틈새에서 순식간에 자라나는 버섯처럼, 내 안의 예술적 열망은 또 다른 줄기를 뻗어냈다. 바로 현대무용이었다.


평소 표정이 풍부하고 몰입력이 좋다는 평을 듣던 내게 우연처럼 기회가 찾아왔다. 당시 만나던 남자친구가 출연하는 기획 공연에서 한 팀이 펑크가 나는 비상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남자친구는 기획자에게 공연 경력이 전무한 나를 추천하며 말했다.

"당신이 무대에 오르면 정말 멋있을 것 같아요."


열흘 남짓 남은 상황에서 주어진 9~10분간의 무대. 내가 쓴 글을 수어로 번안하면, 그가 춤출 수 있는 안무로 만들어주는 맹훈련이 시작됐다. 관객 앞에 서 본 적 없는 내가 심장을 지키기 위해 선택한 연습실은 뜻밖에도 '지하철'이었다.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마다 승객들을 관객이라 최면 걸고 죽어라 연습했다. 그리고 마침내 다가온 공연 날, 내가 그린 그림을 무대 장치로 세워둔 채 무대에 올라 내 모든 것을 쏟아냈다. 결과는 최고의 극찬을 받은 초연이었다.


그때 결심했다. 무대 위에서 완벽히 몰입하고 캐릭터의 심연 속으로 빠져들고 싶다고.


여성 치고는 꽤 매력적인 저음 톤을 가진 덕에 MC를 보거나 음악 내레이션 피처링에 참여했을 때도 반응은 늘 뜨거웠다. 시각적 표현(포토샵, 그림)에서 신체적 표현(수어, 무대)으로, 이제는 청각적 표현(목소리)으로 내 영역은 자연스럽게 이어져 왔다. 마치 버섯이 때가 되면 수백만 개의 포자를 공기 중으로 뿜어내며 온 숲으로 자신을 퍼뜨리듯이, 이제 나는 내 목소리라는 포자를 세상에 퍼뜨리려 한다.


여러 가지 경험의 퍼즐이 맞춰진 지금, 내 종착지는 '배우'다.


요즘 나는 낭독 연습에 온 힘을 쏟고 있다. 발음을 밀어낸다고 생각하며 입 밖으로 소리를 내뱉는 것, 그것이 내 새로운 도전의 시작이다. 버섯이 단단한 땅을 뚫고 나와 마침내 화려한 갓을 펼치듯, 나 역시 내 안의 모든 감정을 세상 밖으로 밀어내어 가장 나다운 꽃을, 아니 가장 단단한 버섯을 피워낼 것이다. 나의 진짜 무대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글 지후트리 ghootree

그림 지후트리 ghootr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