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해도 남을 테니까, 일단 움직이기로 했다

by지후트리
수어그림_예술01.png수어그림 < 예술 > / 지후트리 / 2016

4월의 기록.


4월 2일 공연을 앞두고 수어 번안 농인 버전 대본을 옮겨 적은 뒤, 한참을 붙잡고 있던 포스터 작업을 마쳤다. 무대 위에서 삶을 증명하는 실연자라는 직업은 참 쉽지 않다. 진심을 다하고 있다고 자부하면서도, '내게는 정말 그만큼의 간절함이 있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게 되는 밤이다. 한참 동안 포스터가 뜻대로 만들어지지 않아 잠시 주의를 돌려 딴짓을 했다. 경험상 하나의 일에 지나치게 몰두해 있으면 오히려 집중이 더 흐려진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머리를 식힐 겸 최근 개봉한 영화 <왕과 사는 남자>를 보고 왔는데, 그 여운 탓인지 마음 한구석이 내내 먹먹하다. 결말을 이미 알고 보는 역사 영화였음에도 불구하고, 배우들의 엄청난 몰입도가 고스란히 전해져 큰 슬픔으로 다가왔다. 스크린 너머의 감정이 여과 없이 밀려와 몇 번이나 울컥했는지 모른다. 영화를 보는 내내 오만가지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저 인물을 연기하는 배우들은 도대체 얼마나 깊게 캐릭터를 연구하고 탐구했을까. 그리고 이 영화를 연출한 장항준 감독은 이 작품을 통해 인간의 어떤 본질적인 이야기를 녹여내려 했을까.

특히 극 중 이홍위가 나라를 바로 세우기 위해 유배지를 이탈해 숙부 금성대군과 함께 한양을 되찾으려는 의지는 보이며 길을 떠날 때의 대사가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성공한 역모가 역사의 주인공이 되어버린다면, 앞으로의 조선은 창칼을 앞세운 피비린내 나는 난이 수십 년 수백 년 후에도 계속될 것입니다."


가만히 주저앉아 있지 않고, 온몸을 움직여 조선을 지키려 했던 그 행동 자체를 역사가 결국 기억해 줄 것이라는 메시지였다. 그 대사가 심장을 쿵 하고 울렸다.


그 울림은 자연스럽게 내 직업에 대한 성찰로 이어졌다. 나라를 지키는 엄숙한 일처럼, 예술을 하는 내 작업 역시 마찬가지 아닐까. 내가 오늘 딛는 이 작은 발자취들이 기록으로 남고 쌓여서, 언젠가 더 좋은 공연 환경과 예술 환경의 변화를 이끄는 마중물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참 시기적절하게 좋은 영화를 만나 생각의 지평을 넓힌 기분이다. 다소 아쉬운 상영관에서 관람하느라 귀가 조금 아팠기에 조만간 시스템 좋은 영화관을 찾아가 한 번 더 관람할 생각이다. 그때는 마음 놓고 펑펑 울고 싶으니, 아예 화장도 하지 않고 가야겠다.

영화는 나에게 깊은 반성을 남겼다. 끊임없이 연구하고 탐구하고 관찰해야 하는 직업을 가졌으면서도 언젠가부터 생각을 덜 하려 했고 덜 움직이려 했던 안일함을 돌아보게 되었다. 그렇다고 치열하게 살지 않았던 것은 아니니 불필요한 자기 비난에 빠지지는 않으려 한다. 고유의 낙천성과 단단함을 지닌 장항준 감독의 사고방식이 나와 참 잘 맞는다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 지칠 때마다 그의 영상을 찾아보며 긍정적인 에너지를 얻어야겠다.

어쨌든 고민하던 포스터까지 모두 완성해 냈으니, 오늘 일기는 이쯤에서 닫고 잠을 청해야겠다. 눈을 뜨면 더 건강해진 정신으로 다시 수어 연습에 매진해야지. 수고했어 오늘도 치열하게 길을 찾아 나선 나에게 응원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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