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피로에 절어 일기를 끝내지도 못한 채 잠의 세계로 도망치듯 몸을 던졌다.
오늘 아침 8시가 조금 넘은 시각,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날씨 앱 속의 숫자는 벌써 30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강렬한 햇살에 유독 취약한 나에게 그 숫자는 단순한 온도가 아니라 일종의 경고문처럼 다가왔다. 현기증 섞인 결심 끝에 텀블러를 챙겨 집을 나섰다. 해가 중천에 걸려 열기가 대지를 완전히 장악하기 전, 남산의 품으로 숨어들기 위해서였다.
해방촌 오거리의 단골 카페에 들러 커피를 채우고 곧장 300개가 넘는 가파른 계단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극강의 효율로 짧고 강렬한 산바카라을 끝내겠다는 계산된 움직임이었다. 예상대로 이 뜨거운 열기를 뚫고 계단을 오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어폰 너머로 흐르는 동방신기의 'Rising Sun'이 오늘 날씨와 묘한 일체감을 이뤘고, 나도 모르게 가사를 흥얼거리며 태양을 향해 한 발씩 올라갔다.
계단 끝자락에서 예기치 못한 생동감과 마주했다. 중부공원여가센터 소속의 인부 세 분이 이른 아침부터 숲을 가꾸고 계셨다. 기계음과 함께 풀 냄새가 진동했다. 나의 인기척에 잠시 일손을 멈춰 길을 내어주시는 그들의 등을 보며, 마음속으로 짧은 감사와 응원을 건넸다. 누군가의 땀방울 섞인 수고로움 덕분에 내가 이 길을 이토록 편리하고 아름답게 누리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계단을 다 오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땀이 쏟아졌다. 여름의 문턱에서 태양을 피할 방법은 오직 그늘과 양산뿐임을, 그리고 이 계절에 누리는 여유로운 한낮의 산바카라은 사치일 뿐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실감했다. 결연한 다짐이 생겼다. 해가 채 달아오르기 전, 세상이 조금 더 고요할 때 하루를 시작해야겠다고 말이다.
산바카라길 위에서 나는 자연의 조각들을 수집했다. 그리고 그 조각들 사이에는 나보다 몇 시간은 앞선 시간 속에서 부지런히 일상을 일궈온 사람들의 흔적이 묻어 있었다. 아침 산바카라의 묘미는 바로 여기에 있다. 고요한 길 위에서 만나는, 나보다 먼저 시간을 깨워 하루를 열어젖힌 사람들. 다양한 형태와 모양으로 삶을 꾸려나가는 그들의 시간 곳곳에는 겸손한 배움이 숨어 있다.
오늘 나는 남산의 계단 끝에서 단순히 정상에 도달한 것이 아니라, 성실하게 흐르는 타인의 시간 한 조각을 배워온 기분이다. 내일은 오늘보다 조금 더 일찍 그들의 활기찬 시간 속으로 기꺼이 섞여 들어가 보고 싶다.
글 지후트리 ghootree
그림 지후트리 ghootr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