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어의 뒷모습

by지후트리
수어드로잉.JPG수어 단어 카드들 / 지후트리 / 2017


하나의 단어를 알게 되면 많은 것들이 함께 달려온다.


단어가 태어난 배경, 오래전 사람들이 그것을 바라보던 방식, 그 안에 남아 있는 문화.

처음에는 몸에서 출발하는 손의 언어라는 사실이 신기해서 수어를 배웠다.

손을 움직여 말을 건넨다는 것 자체가 재미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손의 모양보다 그 뒤가 궁금해졌다.

왜 이 단어는 이런 모습일까.
어떤 장면에서 시작되었을까.
사람들은 무엇을 보고 이 움직임을 언어로 만들었을까.

어원을 공부하는 일은 내게 단어의 뒷모습을 알아가는 일과 비슷했다.


우리는 보통 단어의 앞모습을 먼저 만난다. 눈앞에 보이는 손의 모양과 움직임을 익히고 그 뜻을 외운다. 그 뒤를 따라가다 보면 단어가 품고 있던 장면이 보인다. 단어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게 되는 순간, 조금 전까지 낯설었던 언어가 갑자기 가까워진다. 마치 그 단어와 나 사이에 작은 비밀 하나가 생긴 것 같았다.

‘언어와 친해진다는 게 이런 걸까.’


나는 수어통역사가 아니다.

뉴스 통역을 할 수도 없고, 농인 앞에서 통역사로 나설 수도 없다.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듯 수어로 대화할 뿐이다. 통역의 영역은 통역사의 몫이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은 조금 다르다.

아직 그 언어와 문화에 닿지 못한 사람들에게 먼저 말을 걸어보는 것.

손의 언어가 가진 이야기를 꺼내 보여주는 것.

서로 다른 세계 사이에 작은 호기심 하나를 놓아주는 것.


나는 수어를 꽤 많이 애정한다.

한때는 통통하고 큰 내 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금은 그 손이 좋다. 나보다 먼저 사람들에게 다가가 말을 걸고 있기 때문이다.

가끔은 내 손이 나보다 용감하다는 생각도 한다. 그 모습을 보며 나 역시 용기를 낸다.


방탄소년단의 <소우주>에는 한 사람마다 하나의 역사와 하나의 별이 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수많은 사람이 저마다 다른 빛과 세계를 가지고 살아간다는 노래다.


단어도 내게는 그렇게 보인다.

우리는 서로 다른 환경에서 살아왔고, 같은 단어 앞에서도 각자 다른 온도를 느낀다.

누군가에게 ‘집’은 안온함이고, 누군가에게는 그리움일 수 있다.

같은 단어를 바라보면서도 떠올리는 장면은 모두 다르다.

수어 단어를 하나씩 수집하고 단어카드를 만드는 동안 나는 손의 모양만 공부하지 않았다.

단어를 만든 사람들의 시선을 상상했다.

그 안에 남아 있는 문화와 시간을 들여다봤다.
하나의 단어를 바라보는 서로 다른 마음을 배웠다.

그래서 나는 자꾸 단어의 뒤편으로 걸어가게 된다.

앞에서는 보이지 않던 것이 그곳에는 있다.


한 단어가 태어나기 전의 풍경.
그 단어를 만들어낸 사람들의 시선.
시간이 지나도 손끝에 남아 있는 흔적.

나는 그것을 단어의 뒷모습이라고 부르고 싶다.

수어 단어를 수집하는 일은 어쩌면 그 뒷모습을 하나씩 만나러 가는 산바카라인지도 모르겠다.



글 지후트리 ghootree

그림 지후트리 ghootr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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