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아닌 영어 공부를 다시 시작하게 됐다. 계기가 생겼다는 건 좋은 징조다.
내가 영어를 언제부터 좋아했는지 돌이켜보면 초등학생 때 만난 한 친구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읍내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던 내게 그 친구는 조금 신기한 아이였다. 한국인처럼 보이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어느 나라 사람인지 단번에 짐작할 수 있는 모습도 아니었다. 내가 처음 가까이에서 만난 혼혈인이었다. 다른 과목의 성적은 영 신통치 않았는데 영어 시간만 되면 훨훨 날아다녔다. 표정부터 달라졌다. 알고 보니 부모님 중 한 분이 프랑스인이었고, 두 분 모두 영어를 잘하셔서 자신도 한국어와 영어를 자연스럽게 익혔다고 했다. 신기한 녀석이었다.
마침 그 무렵 영어가 학교에서 본격적으로 중요해지기 시작했다. 이왕 배우는 거 제대로 배워보고 싶었다. 엄마에게 영어를 배우고 싶다고 졸랐고, 당시 유행하던 방문영어 ‘윤선생’을 시작했다. 이 꼬부랑 언어를 어떻게든 잘하고 싶은 마음은 컸지만 잘하고 싶은 마음과 선생님이 내준 과제를 전부 해내는 것은 별개의 일이었다. 숙제는 종종 덜 했어도 영어 점수만큼은 늘 상위권이었다. 중학교 1학년 때 전국 모의고사를 봤는데 영어만 전국 5등 안에 든 적도 있었다. 그렇게 좋아하던 영어와 이후 조금씩 멀어졌다. 고등학생이 되어 수능을 앞두고서야 다시 영어와 절친이 됐고 대학생 때까지 꽤 열심히 공부했다.
나는 대한민국 교육 시스템이 만들어낸 전형적인 사람 중 하나다. 시험 점수는 높은데 실전 회화는 잘 안 되는 한국 사람. 머릿속에는 분명 아는 단어와 문장이 있는데 입을 열면 어디론가 숨어버린다. 언어는 조금이라도 놓는 순간 첫사랑처럼 멀리 달아나버린다. 마음속으로만 간직하면 안 되는데 자꾸 마음속에만 간직하게 된다. 절친처럼 옆에 끼고 재잘재잘 떠들어야 하는데 그게 참 쉽지 않다.
최근 내 인생의 페이지에 새로운 등장인물이 나타났다.
외국인이고 나보다 여섯 살이나 어리다. 내가 누나라는 걸 알면서도 어려 보이니 괜찮단다.
짧은 영어로 어찌어찌 대화를 이어가던 어느 날 그가 먼저 물었다.
“영어로 대화하는 거 어려워?”
영어를 조금밖에 못한다고 답했더니 돌아오는 대답이 제법 상남자였다.
“괜찮아. 영어는 내가 알려주면 돼. 너는 나한테 수어 알려줘.”
나를 배려하는 그의 마음 덕분에 우리는 금세 가까워졌다.
어느 순간부터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나를 “my wifey”라고 소개하기 시작했다.
그 말을 할 때마다 어찌나 신나 보이던지 나도 장단을 맞췄다.
“Yes. My husband.”
며칠 뒤면 고국으로 돌아갈 사람이었다. 함께 있는 시간이 더 소중하게 느껴졌다. 그와 재밌는 시간을 보냈고 비행기를 타러 가야 할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그는 곧 인도로 가는데 같이 가자고 졸랐다. DJ라는 직업 때문에 여러 나라를 다니며 투어하는 사람이다. 나는 다음 날 일정이 있어 함께 갈 수 없다고 했다.
그는 와이프를 두고 떠날 수 없다며 호텔 리무진이 올 시간이 다 되도록 뜬눈으로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그는 떠났고 우리는 지금도 메시지를 주고받고 있다.
하…… 대화를 하긴 해야 하니 영어 공부를 시작했다.
회화를 늘리려고 영어 일기도 쓰기 시작했다. 내가 쓴 문장을 몇 번이고 읽고,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 글을 보지 않고 다시 입 밖으로 내뱉는다. 머릿속 어딘가에 오래 처박혀 있던 영어를 하나씩 꺼내 먼지를 털어내는 기분이다. 예전에 그렇게 좋아했던 언어인데 오랫동안 쓰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낯설어져 있었다. 그런데 막상 다시 입을 열어보니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한때 절친이었던 녀석답게 조금씩 기억을 되찾고 있다.
생각해보면 삶에는 가끔 이런 사람이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너무 익숙해져 있는 줄도 몰랐던 나를 흔들어 깨우는 사람. 오랫동안 하지 않던 공부를 다시 시작하게 하고, 쓰지 않던 말을 입 밖으로 꺼내게 하고,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나 자신을 다시 들여다보게 만드는 사람.
새로운 것이 삶에 들어온다고 해서 반드시 완전히 새로운 내가 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오히려 오래전에 좋아했던 것, 한동안 잊고 지냈던 것, 내 안에 있었지만 너무 익숙해져 잠들어 있던 것을 다시 깨우기도 한다. 영어를 다시 공부하게 된 것도 그렇다. 시작은 한 사람과 조금 더 많이 이야기하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하다 보니 영어만 깨우고 있는 게 아니었다. 익숙함 속에 잠들어 있던 나까지 같이 깨우는 중이었다. 좋다. 뭐든 동기부여가 되면 좋은 거다.
글 지후트리 ghootree
그림 지후트리 ghootr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