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을 선불처럼 내어주지 않기로 했다

by지후트리


수화아티스트-박지후[사랑해요].png수어그림<사랑> / 지후트리 / 2013


어제 엄마와 통화하다가 조카가 다쳤다는 소식을 들었다. 워낙 활동적인 아이라 놀다가 떨어졌는데 얼굴을 많이 다친 모양이었다. 다행히 머리는 다치지 않았지만 얼굴이 찢어져 봉합수술을 받았다고 했다. 경황도 없었을 테고 멀리 떨어져 사는 내게는 일부러 연락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날 나는 엄마와 통화를 하고 싶었다. 별다른 이유 없이 전화를 걸었고, 전화를 받자마자 사고 소식을 들었다. 마음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동생도 많이 놀란 눈치였다. 조그마한 아이가 얼굴을 봉합하고 병원 침대에 누워 잠들기 전 “엄마 아빠 잘 자”라고 말하는데 눈물이 났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듣는데 아버지가 된 동생의 마음이 갑자기 보이는 것 같았다. 내가 기억하는 동생은 여전히 내 동생인데, 어느새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되어 자신보다 더 소중한 존재의 아픔을 감당하고 있었다. 부모가 된다는 것은 이런 무게를 매일 조금씩 견디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곧바로 동생에게 전화를 걸어 아이의 안부를 물었고, 너는 괜찮으냐고 물었다. 자기는 괜찮고 아이도 지금은 잘 놀고 있다고 했다. 이미 벌어진 일이니 앞으로 관리 잘하면 된다며 오히려 나에게 건강 잘 챙기라고 말했다. 더 묻지 않았다. 내일 일부 실밥을 풀고, 이번 주 금요일이면 완전히 실밥을 푼다고 했다. 상태가 조금 더 좋아진 뒤에는 오늘의 일을 웃으며 말할 수 있는 날도 오겠지. 지금은 무엇보다 부모의 마음이 가장 아플 테니까.


엄마와 통화한 김에 요즘 내게 조금 묘한 기류로 다가왔던 사람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했다. 길게 설명하지는 않았다. 다만 한동안 내 삶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결혼’이라는 단어가 갑자기 가까이 다가왔고, 그 단어가 가진 무게를 잠시 생각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엄마는 무척 반가운 목소리였다. 어렸을 때 나는 결혼해서 아이를 아주 많이 낳겠다고 했다가 어느 순간부터 결혼하지 않겠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엄마는 처음에는 “애는 내가 봐줄 테니 결혼해서 낳아라” 하고 나를 꼬셨다. 그게 통하지 않자 “아이 없어도 괜찮으니 동반자라도 있으면 좋지. 둘이 알콩달콩 살면 되잖아”라고 했다. 그것마저 먹히지 않자 결국 “그래도 결혼을 안 한다고 아주 단정 짓고 살지는 마라. 인연이라는 건 언제 어떻게 찾아올지 모르는 거니까”라는 말로 물러났다. 어느 날 엄마는 내게 조금 뜻밖의 말을 했다. 동생에게 결혼자금으로 주었던 돈과 똑같이 너에게도 주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너는 결혼하지 않을 것 같으니 그중 일부를 지금 하는 일에 보태 쓰라고 했다. 꼭 성공해서 엄마에게 가끔 용돈이나 보내주면 좋겠다고. 그 말을 들은 뒤 나는 더 열심히 일을 했다. 공연을 준비하고, 앞으로 어떤 콘텐츠를 만들 것인지 고민하고, 내가 살아갈 세계의 이야기를 하나씩 쌓았다. 결혼자금이 될 뻔했던 돈이 내게는 삶을 만드는 자금이 된 셈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예상하지 못했던 사람이 나타났다. 굳이 표현하자면 작은 교통사고 같은 일이었다. 내 길을 잘 가고 있었는데 잠시 다른 방향에서 온 사람과 부딪쳤고, 그 충격 때문에 내가 가던 방향을 잠깐 잊었다. 겨우 두 번의 데이트였으니 그 사람에 대해 무엇을 안다고 말할 수도 없다. 다만 가까워지는 듯하다가 갑자기 등을 돌리는 느낌을 주는 사람에게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일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쉬운 인연이라고 해서 반드시 붙잡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아쉬움은 관계를 지속해야 할 이유가 아니라, 때로는 그 관계가 내게 무엇이었는지를 알려주는 감정에 불과하다.


융은 인간이 자기 자신이 되어가는 과정을 ‘개성화’라고 불렀다. 삶의 어느 순간에는 바깥을 향해 있던 시선을 거두어 다시 자기 안으로 돌아와야 한다. 타인의 반응과 관계 속에서 나를 확인하는 대신, 내가 무엇을 원하는 사람인지 스스로 들여다보는 과정이다. 요즘의 나는 그 말을 조금 이해할 것 같다. 사람에게 마음을 열면 꽤 많은 에너지를 쏟는 편이다. 좋아하면 좋아하는 만큼 친절하고, 궁금하면 궁금한 만큼 마음을 내어준다. 문제는 관계가 끝난 뒤에도 그 감정의 잔향이 오래 남는다는 것이다. 일상을 망칠 만큼 매몰되지는 않지만, 이미 지나간 감정을 한동안 품고 살아간다. 그래서 요즘은 타인에게 흘려보낸 에너지를 다시 내 쪽으로 거두어들이는 연습이 필요하다고 느낀다. 생각해 보면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나를 둘러싼 상황도, 타인의 마음도, 갑자기 들어오는 일의 제안도, 어떤 관계가 시작되고 끝나는 방식도 온전히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아이가 갑자기 다치는 일처럼 삶은 예고 없이 우리를 놀라게 하고, 예상하지 않았던 사람이 불쑥 나타나 마음을 흔들기도 한다. 내가 아무리 촘촘하게 계획해도 삶은 언제나 계획 바깥의 사건을 데리고 온다. 그 안에서 내가 온전히 통제할 수 있는 것은 결국 내 마음과, 그 마음을 가지고 다음에 무엇을 할 것인가 정도다.


당분간은 혼자 살아갈 사람이라는 전제로 인생을 설계해보려고 한다. 결혼의 가능성을 닫아두겠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누군가가 나타나야 완성되는 삶을 기다리지 않겠다는 뜻에 가깝다. 혼자서도 잘 굴러가는 삶을 만들어두고, 그 길을 걷다가 좋은 사람이 나타나면 함께 걸으면 된다.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것도 괜찮다. 애초에 내가 가던 길이 있었으니까. 조금 덜 친절해져도 좋겠다. 정확히는 모든 사람에게 내 마음을 선불처럼 내어주지 않는 사람이 되어보고 싶다. 해야 할 일들의 우선순위를 다시 세우고, 흐트러진 계획을 촘촘하게 정리하고, 내가 만드는 것들에 다시 집중해야겠다. 운동도 꾸준히 하고 몸을 건강하게 유지해야겠다. 요즘 그나마 마음이 흔들려도 일상을 계속 살아낼 수 있는 건 몸을 움직이는 시간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수영을 하고, 걷고, 몸을 움직이다 보면 머릿속에서 지나치게 커졌던 일들이 다시 제 크기로 돌아온다.


다만 가족은 예외다. 가족의 일 앞에서는 앞으로도 기꺼이 마음을 많이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 다친 아이가 얼른 나아서 다시 뛰어다녔으면 좋겠고, 놀란 동생 부부의 마음도 빨리 편안해졌으면 좋겠다. 엄마도 건강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 역시 잘 지냈으면 좋겠다. 올해는 행복한 날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나에게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도. 인생에는 내가 붙잡을 수 있는 것보다 붙잡을 수 없는 것이 훨씬 많다는 사실을 조금씩 배워가는 중이다. 그렇다면 붙잡을 수 없는 것을 붙잡느라 힘을 쓰기보다, 내 손안에 남아 있는 것을 잘 돌보는 편이 낫겠다. 내 몸과 마음, 내가 만드는 것들, 내가 사랑하는 가족, 그리고 오늘 하루. 지금의 나는 그것이면 충분하다.




글 지후트리 ghootree

그림 지후트리 ghootr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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