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의 산바카라의 기억

by유석

산바카라은 우리의 일상


나와 아내는 산바카라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캐나다 빅토리아에 살 때는 시간이 날 때마다 섬의 남쪽 끝, 태평양이 한눈에 펼쳐지는 Dallas Road를 자주 찾았다. 새해 첫날이면 시내 성당에서 신년 미사를 드린 후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구입하여 Dallas Road의 Clover Point에 주차하고 커피를 마시며 새해의 소망을 나누는 것이 우리의 작은 전통이었다.

20160101_155804.jpg?type=w800Clover Point에서 만난 갈매기떼

2022년 초 한국으로 돌아온 뒤에도 산바카라은 계속되었다. 건국대 근처에서 살면서 우리가 즐겨 찾은 산바카라로는 한강뚝섬공원, 건국대 일감호, 그리고 성수동의 서울숲이었다.


꽃과 문화가 있는 한강뚝섬공원


한강뚝섬공원은 집에서 천천히 걸어 10분 정도 거리에 있었다. 계절마다 피는 다양한 꽃들이 아내의 발걸음을 자주 이끌었고, 여러 문화 행사도 종종 열렸다. 평생 처음 본 드론쇼의 장관은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 또 한때는 편백나무 숲에서 맨발 걷기가 유행해 아내도 몇 달 동안 열심히 따라 했지만, 효과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일기를 보니 아내와 마지막으로 뚝섬공원을 걸었던 날은 2025년 1월 4일이었다.

20230911_133619.jpg?type=w800한강뚝섬공원 편백나무숲에서의 맨발 걷기

한때는 한강 남북을 따라 이어진 78km 수변도로를 도보로 완주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몇 차례 도전했지만, 전체의 25% 정도밖에 달성하지 못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빨간색으로 표시한 부분이 우리가 걸었던 수변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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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 시절을 떠올리게 한 일감호


건국대 캠퍼스 안의 작은 호수, 일감호도 우리의 단골 산바카라 코스였다. 둘레 약 1.4km의 호수를 천천히 돌면 15분 정도 걸렸다. 젊은 학생들로 가득한 캠퍼스를 걸으며 아내와 나는 자연스럽게 학창 시절을 떠올리곤 했다. 벤치에 앉아 쉬다 보면, 옆자리의 젊은 연인들의 과감하고 자유로운 모습에 세상이 많이 달라졌음을 실감하기도 했다.


아내와 마지막으로 일감호를 찾은 날은 2025년 4월 4일이었다. 점심식사로 아내가 좋아하는 물냉면을 먹은 뒤 아내가 직접 산바카라을 제안했지만, 다리의 병변으로 지팡이를 짚고 있던 때라 나는 걱정이 앞섰다. 다행히 한 바퀴를 돌 수 있었지만, 집으로 돌아올 때는 아내가 힘들어 더 이상 걸을 수 없다고 해서 내가 집으로 가서 차를 가지고 와야만 했다. 그것이 우리의 마지막 일감호 산바카라이 되었다.

2025-15.jpg?type=w800일감호 산바카라 중 휴식을 취하고 있는 아내

아내가 사랑한 서울숲


성수동의 서울숲도 빼놓을 수 없는 추억의 장소다. 우리가 알던 성수동은 오래 전과 달리 젊은이들로 붐비는 ‘핫플’이 되어 있었고, 그곳에서 서울숲을 알게 된 후 아내는 곧장 그곳의 매력에 빠졌다. 계절마다 만발하는 꽃들로 가득한 서울숲은 아내가 사랑한 산바카라길이었고, 뉴욕 센트럴파크를 연상케 했다. 다만 쉽게 걸어갈 수 있는 거리는 아니어서 다른 산바카라로만큼 자주 가지는 못했고, 대신 지인들과의 약속 장소로 자주 이용했다. 함께 식사 후 걷기에 적당했고, 산바카라 후의 커피 한 잔은 만남을 더욱 특별하게 만들었다.


아내와 마지막으로 서울숲을 찾은 날은 2025년 4월 10일이었다. 햇살이 화창한 봄날, 만개한 튤립이 생각나 휠체어를 빌려 함께 가자고 내가 먼저 제안했다. 아내는 내가 힘들까 걱정했지만 설득 끝에 함께 나섰다. 아버지가 계신 실버타운에서 휠체어를 빌려갔고, 주차장은 이미 만차라 인근 건물 지하주차장에 차를 댔다. 주차 요금은 꽤 비쌌지만 근처 찻집에서 음료 두 잔을 주문해 무료 주차 혜택을 받았다.


그날 공원에서는 아직 튤립이 활짝 피지 않아 아쉬웠지만, 나는 한 시간가량 휠체어를 밀며 아내와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며칠 뒤 아내가 지인에게 통화하며 그날을 이렇게 전했다.


“지난주에 날씨가 너무 좋은 거예요. 남편이 휠체어를 빌려서 같이 꽃밭을 보러 가자고 하길래 좋다고 갔죠. 남편이 휠체어를 30분 넘게 밀어줬는데 꽃은 많이 안 피었더라고요. 그래도 바람이 시원하고 햇볕이 따뜻해서 기분이 좀 전환됐어요. 근데 저녁에 남편이 몸살이 오더라고요. 공원 흙길이 울퉁불퉁해서 힘들었나 봐요. 그래서 내가 그랬죠, ‘아이고, 저 아저씨도 늙어서 이제 나 하나 돌보기도 힘들고, 거기에다 아버님까지 챙기니 안 됐다, 안 됐어.’ 하고 말이에요.”

Seoul-Forest-Tulips-1.jpg?type=w800서울숲에 만개한 튤립

아내와의 산바카라의 기억


아내와 함께했던 수많은 산바카라길은 단순한 운동이나 취미가 아니라, 우리의 삶과 사랑을 이어준 소중한 시간이었다. 걷는 동안 나눈 대화, 함께 본 풍경, 손잡고 맞이한 계절들은 이제 나에게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되었다.


아내는 더 이상 내 곁에 없지만, 그 길 위에 남아 있는 우리의 발자국과 웃음소리는 여전히 내 마음속에 살아 있다. 앞으로 혼자가 된 산바카라길이 외롭더라도, 나는 아내의 미소와 목소리를 기억하며 걸어갈 것이다. 언젠가 하늘나라에서 다시 아내와 함께 걷게 될 그날을 기다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