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랑한 도시, 빅토리아!

추억이 살아 있는 도시

by유석

다시 찾은 빅토리아


지난 글에서 밝힌 것처럼 올여름도 딸네 가족과 시간을 보내기 위해 6월 말 캐나다 빅토리아에 도착했다.

어느덧 시차에도 적응이 된 듯하다.


도착 직후에는 몸 여기저기가 불편해 조금 걱정했다. 왼쪽 발가락 끝이 불편하기도 하고, 피곤함도 쉽게 가시지 않았다. 혹시 건강에 이상이 생긴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지만, 시차가 풀릴 즈음 신기하게도 그런 증상들이 하나둘 사라졌다. 아마 긴 비행과 시차 때문이었을 것이다. 예전 같으면 대수롭지 않게 지나갔을 일을 이제는 몸이 더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보니, 이것도 노화의 한 모습인가 싶어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한국에서는 무더위가 한창 시작될 시기지만, 이곳의 여름은 전혀 다르다. 낮 기온은 20도 안팎.

햇볕 아래에서는 따뜻하지만 그늘에만 들어가면 긴 소매가 생각날 만큼 서늘하다.

매년 이곳에 올 때마다 너무 얇은 여름옷만 챙겨 와 후회하곤 했는데, 올해는 긴 옷도 넉넉히 준비했다.

덕분에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공기를 마음껏 즐기고 있다.

빅토리아는 북위 48도에 자리하고 있어 지금이 일 년 중 해가 가장 긴 계절이다. 밤 10시가 되어도 아직 훤하고, 퇴근 후 오후 5시에 골프를 시작해도 18홀을 모두 돌 수 있을 정도다. 이제부터는 조금씩 해가 짧아지겠지만, 겨울이면 오후 4시만 되어도 어둠이 내려앉는 것을 생각하면 같은 도시가 맞나 싶을 정도다.


2022년 한국으로 돌아간 뒤에도 나는 거의 매년 여름이면 빅토리아를 찾았다. 하지만 대부분 한 달을 넘기지 않고 한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한국 건강보험 자격 문제 때문이었다. 거소증이나 외국인등록증을 가진 외국인이 일정 기간 해외에 체류하면 건강보험 자격이 정지된다고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얼마 전에서야 실제 규정을 자세히 확인하게 되었다. 건강보험 자격이 일시 정지될 수는 있지만 일정한 조건만 충족하면 생각보다 어렵지 않게 바로 회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덕분에 이번에는 처음으로 두 달 동안 머물 계획을 세울 수 있었다.


그런데 정작 출국을 앞두고 나를 가장 망설이게 만든 것은 건강보험이 아니었다.

아흔여섯 살 아버지였다.

출국을 며칠 앞두고 아버지의 건강이 갑자기 나빠졌다. 고열과 설사가 계속되었고, 병원과 응급실을 오가며 한동안 마음을 졸여야 했다. '이번에는 가지 말아야 하나.' 하는 생각이 하루에도 몇 번씩 들었다.

다행히 상태가 더 악화되지는 않았다. 형이 아버지 집 가까이에 살고 있고, 24시간 간병인과 요양보호사가 함께 돌보고 있다는 점도 큰 위안이 되었다. 그래도 발걸음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2022년 초 한국으로 돌아온 이후, 내 삶의 상당 부분은 아버지를 중심으로 흘러갔다. 병원 진료를 함께 다니고,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며, 간병인과 요양보호사를 구하고, 용인으로 이사 가기 전에는 하루에도 몇 번씩 아버지 집을 오갔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열두 달 가운데 열 달 동안은 아버지를 옆에서 도와드렸으면 두 달 만큼은 나 자신을 위해 써도 되지 않을까.'

스스로를 합리화하고 설득하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예전 같으면 아버지는 "왜 그렇게 오래가느냐."며 못마땅해하셨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인지력과 기억력이 예전 같지 않으시다. 캐나다에 다녀오겠다고 몇 번이나 말씀드린 뒤에야 "언제 돌아오냐?"라고 물으셨다.

8월 말이라고 말씀드리자 달력을 한참 바라보시더니 조용히 한마디를 하셨다.

"오래가는구나."

그 한마디가 이상하게 오래 마음에 남았다.


이번 여행은 휴가가 아니다.

오랜만에 딸과 손자들을 만나 함께 시간을 보내는 여행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내 삶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간을 다시 찾아가는 여행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빅토리아는 내게 단순한 여행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수많은 도시를 거쳐 살아왔지만, 결국 내 마음속의 고향처럼 남은 곳이 바로 이 도시다.


빅토리아가 내게 특별한 이유


돌이켜보면 아내와 나는 참 많이도 이사를 다녔다. 42년을 함께하는 동안 모두 열다섯 번의 이사를 했다.

서울에서 시작해 미국 덴버로, 다시 대전과 분당으로. 캐나다로 이민을 간 뒤에는 캘거리, 에드먼턴, 밴쿠버를 거쳐 다시 빅토리아에 정착했고, 은퇴 후에는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지도를 펼쳐 놓고 보면 '역마살'이라는 말이 딱 어울릴 정도다.

하지만 우리는 단 한 번도 그 잦은 이사를 후회한 적이 없었다. 새로운 도시로 떠나는 일은 두려움보다 설렘이 더 컸다. 낯선 환경은 우리에게 부담이 아니라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기회였다.


그 많은 도시 가운데 가장 오래 머문 곳이 바로 빅토리아였다. 한 집에서 10년을 살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10년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었다.

딸이 결혼해 독립한 뒤, 아내와 나는 다시 둘만의 삶을 시작했다.

흔히들 '제2의 신혼'이라고 말하는데, 우리에게도 딱 그런 시간이었다.

큰 욕심 없이 함께 일하고, 산바카라을 하고, 여행을 다니고, 함께 장보고, 식사하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특별한 사건은 없었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 평범한 일상이야말로 가장 큰 행복이었다.


사실 처음부터 빅토리아를 목표로 했던 것은 아니었다.

추운 겨울이 오래 지속되는 앨버타주에서 살면서 언젠가 밴쿠버에 정착하리라 마음먹었다. 하지만 밴쿠버로 이사한 후에 마음에 드는 사업체를 찾지 못하던 중 빅토리아에서 마음에 드는 사업체를 발견하게 되었다.

'유명 관광지에서 살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으니 5년 정도만 살다가 다시 밴쿠버로 돌아오자.'

그렇게 시작한 생활이었다.


그런데 5년이 지나도, 10년이 지나도 우리는 돌아가지 않았다. 빅토리아라는 도시가 우리 마음을 붙잡아 버렸기 때문이다. 한국으로 돌아오기 직전까지 결국 10년을 살았고, 지금도 그 집은 처분하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 있다.


왜 그렇게까지 이 도시를 좋아하게 되었을까.

아마도 빅토리아는 우리 두 사람의 취향을 모두 만족시켜 주는 도시였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바다를 좋아했다. 여행을 가면 물만 보여도 카메라부터 꺼냈다.

아내는 꽃을 좋아했다. 예쁜 꽃을 발견하면 언제나 휴대전화를 꺼내 사진을 찍곤 했다.

빅토리아는 바다와 꽃이 함께 있는 도시다.

사계절 내내 꽃이 피고, 어디에서든 바다를 만날 수 있다.

나와 아내가 좋아하던 것들이 한 도시 안에 모두 있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우리가 그토록 많은 도시를 거쳐 살아온 것도 결국 이곳에 오기 위한 과정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2011년 7월, 밴쿠버에서 배를 타고 빅토리아로 이사 오던 날이 아직도 생생하다.

배에서 내려 시내로 향하는 길. 창밖으로 펼쳐진 하늘이 믿기 어려울 만큼 푸르렀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그래서 하늘색을 Sky Blue라고 하는구나.'

그날 이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색은 Sky Blue가 되었다.


처음 며칠 동안은 그런 날씨가 계속되길래 '이곳은 일 년 내내 이런가 보다.' 하고 기대했다.

물론 그것은 착각이었다. 빅토리아에도 비 오는 날은 많다.

하지만 적어도 7월과 8월 만큼은 내가 가 본 어느 도시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다고 생각한다.

이곳 사람들은 겨울이 끝나고 날씨가 좋아지기 시작하면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같은 말을 한다.

"Finally, summer's here!"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나도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아내와 함께 그 여름을 열 번이나 보냈다.

그리고 지금도 여름이 시작될 때면 그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것만 같다.

아마도 그래서일 것이다.

한국으로 돌아온 지 벌써 몇 년이 지났지만, 여름이 되면 나는 자연스럽게 다시 이 도시를 찾게 된다.

이곳에는 내가 가장 행복했던 계절과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추억이 살아 있는 도시


빅토리아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찾는 곳이 있다.

Grace Point.

딸네 집에서 차로 30분 정도 달린 뒤, 다시 숲길을 50여 분 걸어야 만날 수 있는 바닷가다.

험한 길은 아니지만 일부러 찾아가지 않으면 쉽게 닿을 수 없는 곳이다.

아내와 나는 이 길을 수도 없이 함께 걸었다. 아내와 내가 가장 사랑했던 하이킹 코스.


푸른 나무 사이를 지나고, 바위 해변에 앉아 파도 소리를 들으며 커피를 마시곤 했다.

중요한 대소사를 상의했던 장소이기도 했다. 한국으로 돌아가기를 함께 결정했던 곳도 이곳이었다.

사랑하는 아내의 육신을 자연으로 돌려보낸 곳도, 훗날 내가 자연으로 돌아갈 곳도 바로 이곳이다.

Grace Point

일 년 만에 다시 찾은 숲은 거의 변한 것이 없었다.

나무도 그대로였고, 오솔길도 그대로였고, 파도는 예전처럼 바위를 두드리고 있었다.

시간만 흐른 것이지 풍경은 그대로였다.


나는 아내가 그곳에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아내는 이미 하느님 품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살아가고 있다고 믿는다.

Grace Point는 아내의 영혼이 머무는 곳이 아니라, 사랑했던 사람의 육신을 자연으로 돌려보낸 상징적인 장소일 뿐이다. 그래서 그곳을 찾을 때마다 슬픔보다 감사가 먼저 떠오른다.


절벽 아래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나무 그늘에 앉아 묵주기도를 바쳤다.

그리고 아내를 떠올렸다.

함께 걸었던 시간. 함께 웃었던 시간. 함께 바라보았던 바다.

그 기억들을 하나씩 꺼내 보고 있으니 어느새 한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이번 주에는 두 번이나 이곳을 방문하게 되었다.

아내가 떠난 뒤 소식을 들은 가까운 지인 두 분이 꼭 이곳에 와서 추모하고 싶지만, 정확한 위치를 찾기가 쉽지 않아 지난해부터 내가 빅토리아에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잊지 않고 찾아와 주려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참 고마웠다.

아내는 살아 있는 동안 나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에게 따뜻한 사람이었다.

아마 그 따뜻함을 받은 사람들이 아직도 그녀를 기억하고 있는 것이리라.


그 첫 번째 방문이 어제였다.

아침 일찍 에드먼턴에서 오신 지인을 공항으로 마중 나가서 Grace Point로 데리고 갔다.

차 안에서 그녀는 아내 이야기를 조용히 꺼냈다.

"언니는 제게 대나무숲 같은 사람이었어요."

어떤 고민을 털어놓아도 끝까지 들어주었고, 힘든 마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사람이었다고 했다. 해결바카라을 얻지 못하더라도 아내에게 하소연하고 나면 답답했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고 한다.


아내의 부고 소식을 받고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 당장 한국행 비행기부터 알아보았다고 했다. 그러나 주변의 만류로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고, 내가 캐나다에 오기만을 1년 넘게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그녀는 한 가지를 솔직하게 고백했다.

처음에는 내가 아내를 보낸 방식 (무빈소 2일장, 자연장)을 이해할 수 없었다고 했다. 자신의 상식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웠고, 한동안은 나를 원망하는 마음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감정이 정리되었고, 오히려 그 방식이 아내의 뜻과 존엄을 존중한 선택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고 했다.

그리고 직접 Grace Point를 찾아와 숲길을 걷고 바다를 바라본 뒤에는 비로소 우리의 선택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저의 마지막도 이렇게 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마음에도 작은 위로가 찾아왔다.

누군가의 이해를 얻기 위해 그런 방식을 선택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뒤 우리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이해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위안이 되었다. 그녀는 마음이 많이 편해졌다고 말하며 에드먼턴으로 돌아갔다.

이틀 후에는 밴쿠버에서 오시는 또 다른 지인과 함께 다시 이 길을 걸을 예정이다.


지난 일요일에는 빅토리아 시내의 주교좌성당으로 미사를 드리러 갔다.

딸네 집에서 성당까지는 차로 30분 정도 걸린다.

일부러 고속도로를 타지 않고 예전에 수도 없이 다녔던 길을 천천히 달리고 싶었다.

그러다 보니 도시는 하나의 추억 앨범이 되었다.


'저곳은 새해 첫날이면 미사를 드린 뒤 스타벅스 커피를 사서 차 안에서 마시며 한 해의 계획을 세우던 곳.'

'저곳은 사소한 일로 다투고 혼자 바람을 쐬러 갔던 곳.'

'저 길은 지인들과 밤늦게 훌라 게임을 하고 돌아오며 "당신이 그 카드를 버렸으면 우리가 이겼을 텐데." 하며 아내와 함께 웃던 길.'


운전을 하다 문득 옆자리를 바라보았다.

순간, 아내가 거기에 앉아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런 내 모습을 보고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그 전날에는 나를 위로해 주려고 시간을 내준 지인 부부와 함께 식사를 마치고 우리 집 주변 산바카라로를 걸었다.

지금은 임대인이 살고 있는 집이지만, 나도 모르게 시선은 자꾸 그 집으로 향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면 아내가 웃으며 나를 맞아 줄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아마도 기억이라는 것은 그런 것인가 보다. 사람은 떠나도 함께했던 시간은 쉽게 떠나지 않는다.


오랜만에 빅토리아를 천천히 둘러보며 새삼 깨달았다.

'맞아. 이 도시가 이렇게 아름다웠지.'

오래 살다 보니 그 아름다움이 너무 익숙해져 소중함을 잊고 있었다.

마치 아내가 언제까지나 내 곁에 있을 것이라고 믿으며 살았던 것처럼.


내 삶은 크게 세 구간으로 나뉜다.

* 아내를 만나기 전의 시간 (22년).

* 아내와 함께한 시간 (42년).

* 그리고 아내 없이 살아가는 시간 (??년).

지금 나는 세 번째 시간을 살아가고 있다.


아내를 만나기 전에는 늘 생각했다.

'내 반쪽은 지금 어디에서 살고 있을까.'

하지만 그 얼굴은 언제나 상상 속에서 흐릿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우리는 차로 30분 정도 거리에서 오랫동안 같은 하늘 아래 살아가고 있었다.)


이제는 다르다.

내 반쪽의 얼굴은 너무도 선명하다.

사진을 바라볼 때마다 가슴 한편은 저려 오지만, 다른 한편은 따뜻해진다.

세속적인 기준으로 화려한 미인이라고는 할 수 없을지 몰라도, 내게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얼굴이다.

착하고, 따뜻하고, 누구보다 나를 사랑해 주었던 사람.

그리고 지금은 하늘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


그래서 나는 해마다 빅토리아를 찾는다.

과거를 붙잡고 살아가기 위해서가 아니다.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간을 잊지 않기 위해서다.

그 추억을 품은 채 남은 삶도 감사하며 살아가기 위해서다.


언젠가 나 역시 이 세상에서의 삶을 마치는 날이 오겠지만, 그때까지는 아내와 함께했던 시간들을 마음속에 소중히 간직하며 살아가려고 한다.

빅토리아는 내게 단순한 여행지가 아니다.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추억이 아직도 살아 숨 쉬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