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를 다시 만난다면
45년 지기 친구들의 모임이 한 달에 한 번 있다. 대부분은 아직도 현역으로 일하고 있다.
지난달 모임에서 한 친구가 나에게 물었다.
"일을 하지 않으면 그 많은 시간을 어떻게 보내니?"
그러면서 자신은 은퇴를 하면 할 일이 없을 것 같아 일을 그만두는 것이 두렵다고 말했다.
나는 요즘도 아버지를 돌보고, 운동을 하고, 봉사활동을 하고, 여행을 다니고, 글을 쓰다 보면 하루가 금방 지나간다. 아침에 눈을 뜨며 "오늘은 뭘 하지?"라고 고민한 적은 아직 한 번도 없다. 혼자 살기 시작하고 보니 생각보다 자잘한 집안일도 정말 많다.
아내와 함께 살던 행복했던 시절에는 집안일이 이렇게 많은 줄 몰랐다. 대부분 아내가 묵묵히 해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친구들에게 말한다.
"가능하면 아내를 가사노동의 굴레에서 조금이라도 빨리 해방시켜 주라."
내가 생각하는 한 가지 방법은 실버타운에 입주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모든 사람에게 정답일 수는 없다. 사람마다 가치관도 다르고 삶의 방식도 다르기 때문이다. 다만 나는 60대가 되어서도 대부분의 가사 부담을 여전히 아내에게 맡기는 것은 남편의 이기심이 어느 정도 작용한 결과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이 60대는 실버타운에 들어가기에는 너무 이른 나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언젠가는 입주할 계획이라면 건강하고 활동할 수 있을 때 들어가는 편이 더 행복한 노후를 보낼 수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요즘 내 일상에 새롭게 자리 잡은 것이 하나 있다. 바로 OTT 드라마 시청이다.
캐나다에 살던 시절 우리 부부는 주말이면 한국 예능 프로그램을 함께 보는 것이 큰 즐거움이었다. 2000년대 초에는 한인 식료품점에서 비디오 테이프나 CD를 빌려 보았고, 2010년대에 들어서는 인터넷 덕분에 거의 한국과 동시에 프로그램을 시청할 수 있게 되었다. 시차 덕분에 한국에서 일요일 저녁에 방송된 예능 프로그램을 캐나다에서도 같은 일요일 저녁에 볼 수 있었다.
아내는 예능 프로그램 자체보다도 나와 나란히 소파에 앉아 한가한 일요일 저녁 시간을 보내는 것을 더 즐겨했다. 그 평범한 시간이 이렇게 눈물 나게 그리워질 줄은 그때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당시 우리는 드라마를 거의 보지 않았다. 한 번 보기 시작하면 계속 챙겨 봐야 하고 다음 회를 일주일씩 기다리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화제가 되는 드라마도 대부분 지나쳤고, 대신 한두 번 놓쳐도 부담 없는 예능 프로그램을 즐겨 보았다. 그중 가장 오래 본 프로그램이 '1박 2일'이었다. 거의 16년을 함께 시청했다.
하지만 아내가 떠난 뒤 나는 이제 예능 프로그램을 보지 않는다. 혼자 웃는 내 모습이 어색하기 때문이다. 대신 혼자 조용히 몰입할 수 있는 드라마를 즐겨 보기 시작했다. 넷플릭스를 보다 보니 알고리즘이 계속 비슷한 작품을 추천해 주었고, 어느새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르가 '판타지 로맨스 사극'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배경은 과거 시대인데 인물들의 생각과 사랑은 현대적이다. 조선 시대 청춘 남녀가 거리에서 포옹하고 키스하는 일은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었겠지만, 이상하게도 그런 이야기에 감정이입을 하게 된다.
사극에 빠져있는 요즘, 며칠 전에는 ChatGPT에서 '전생의 나는?'이라는 기능을 보고 호기심에 내 사진을 넣어 보았더니 조선 시대 선비의 모습으로 만들어 주었다. 이번에는 왕으로, 또 망나니로도 만들어 달라고 주문했더니 재미있는 결과물이 나왔다. 그런데 ChatGPT는 내 얼굴은 왕보다는 유학자, 훈장, 서당 선생이나 향촌의 선비가 훨씬 잘 어울린다고 설명했다. 나 역시 왕보다는 선비가 더 자연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는 아내 사진도 넣어 보았다. 단정한 한복을 입고 붓을 들고 있는 모습이었다. 서예에 능한 양반가 부인, 규방의 문인 같은 분위기라고 했다. 대학 시절 서화반에서 붓글씨를 썼던 아내의 실제 모습과도 묘하게 닮아 있어 더욱 마음에 들었다.
마지막으로 우리 두 사람의 사진을 합쳐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아내가 내 팔짱을 끼고 있는 다정한 부부의 모습이 만들어졌다. 화려한 양반 부부라기보다는 학문과 글을 사랑하는 선비 부부라는 설명도 함께 붙었다. 우리가 살아오면서 추구했던 삶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아 오래 바라보게 되었다.
평소 아내는 함께 사진을 찍을 때마다 "내 얼굴이 더 크게 나온다."며 늘 내 등 뒤로 살짝 숨곤 했다. 남아 있는 부부 사진 대부분이 그런 자세다. 내 등 뒤로 숨는 그 모습이 항상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AI가 만들어 준 사진에서도 아내는 마치 예전처럼 내 곁에 바짝 붙어 있었다.
얼마 전에는 넷플릭스에서 2017년 SBS 드라마 '다시 만난 세계'를 보았다.
열아홉 살에 사고로 세상을 떠난 남자가 12년 뒤 다시 살아 돌아와 가족과 친구들, 그리고 성인이 된 첫사랑을 만나게 된다는 이야기다.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는 설정이지만, 마지막으로 갈수록 오히려 현실보다 더 진한 감정을 전해 주었다.
특히 주인공을 다시 잃게 될 운명을 받아들이며 첫사랑이 하는 대사가 오래 마음에 남았다.
"너를 다시 만난 건 기적이고 행운이었어.
네가 다시 돌아가도 그 행운이 없어지는 건 아니야.
내 인생 끝까지 행운으로 남을 거야.
주어진 행운에 최선을 다할 거야."
그 장면을 보며 문득 이런 상상을 했다.
혹시 어느 날 내 앞에도 아내가 다시 나타난다면?
긴 시간이 아니어도 좋다. 며칠만이라도 함께할 수 있다면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을까?
예전 같으면 여행을 계획했을지도 모른다. 특별한 맛집을 찾아가고, 아름다운 풍경을 보러 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내 대답은 다르다.
아침에 함께 눈을 뜨고, 함께 식사를 하고, 차를 마시고, 산바카라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저녁이 되면 같은 집에서 잠드는 것. 그것이면 충분하다.
행복은 특별한 이벤트가 아니라 그런 평범한 일상을 함께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어리석게도 아내가 떠난 뒤에야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가끔은 엉뚱한 상상도 해 본다.
긴 혼수상태에서 깨어났는데 침대 곁에서 아내와 가족들이 웃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 혹은 누군가 "지금까지 당신을 위한 몰래카메라 였습니다."라고 말하며 아내가 내 앞에 나타나는 장면.
그것들이 TV 안에서나 가능한 이야기라는 것, 현실에서는 이루어질 가능성이 없는 망상이라는 것도 잘 안다.
그래도 그런 상상을 잠시 하는 동안만큼은 아내가 아주 가까이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리고 그 상상은 우리가 인생에서 가장 소중하게 여겨야 하는 것은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평범한 하루라는 것을 다시 한번 내게 일깨워 준다.
그 평범한 하루를 함께 보낼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인생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선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