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세상에 살아있는 아내

아직도 불쑥 나타나는 아내

by유석

아내가 떠난 뒤, 내게 가장 아쉬웠던 것 중 하나는 아내의 목소리가 거의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사진은 많았지만, 살아 있는 듯한 목소리는 좀처럼 찾을 수 없었다. 물론 십수 년 전에 찍어둔 비디오들은 많지만, 최근 몇 년 사이의 목소리가 담긴 음성 파일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던 중 절친이 자신의 아내와 내 아내가 통화하던 녹음 파일 하나를 보내주었고, 처제도 아내와의 대화가 담긴 파일 몇 개를 건네주었다. 나도 내 휴대폰 속에서 아내와의 통화 녹음 파일 하나를 기적처럼 발견하기도 했다. 공대를 나와 IT 기기에 그다지 어둡지 않다고 생각해 온 나지만, 그 파일이 어떻게 녹음되었고 또 어떻게 내가 그것을 찾아냈는지는 지금도 설명할 수가 없다.

그 덕분에 오랜만에 아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지만, 늘 아쉬움은 남아 있었다.


그런데 얼마 전,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또 벌어졌다.

전화 컬러링 음악을 바꿔보려고 휴대폰을 만지다가 우연히 기기 안의 모든 음성 파일 목록이 화면에 나타났다. 그중 아내 이름이 적힌 파일이 스무 개 남짓 보였다.

‘이게 뭐지?’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를 열어보니 아내와 나의 통화 녹음 파일이었다.

순간 가슴이 두근거렸다. 마치 숨겨진 보물을 발견한 기분이었다.


살펴보니 녹음 파일들은 2024년 여름의 통화들이었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그 무렵 나와 아내가 캐나다로 여행을 떠나며 로밍 서비스를 신청하면서 휴대폰이 자동으로 ‘에이닷 전화기’로 변경되었고, 그 앱에 자동 통화 녹음 기능이 있었던 것 같다. 귀국 후에도 한동안 원래 전화 앱으로 바꾸지 않아, 그 시기의 통화들이 그대로 저장되어 있었던 것이다.


나는 오랜만에 아내의 목소리를 원 없이 들었다. 파일 속에는 아내의 웃음소리와 다정한 말투, 그리고 그 시절의 공기와 감정까지 고스란히 살아 있었다.


그런데 아내의 발견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문득 오래전 지워버렸던 인스타그램 생각이 났다.

사실 나는 SNS 활동을 거의 하지 않는 사람이다. Facebook이나 Instagram 같은 플랫폼도 사생활이 지나치게 노출되는 느낌이 들어 늘 거리를 두고 살았다.


2013년, 아내와 나는 각각 인스타그램 계정을 만들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작은 사건이 있었다. 어느 날 아내가 꽃 사진 수십 장을 한꺼번에 올린 것을 보고 내가 무심코 말했다.

“왜 그렇게 꽃 사진을 많이 올리는 거요?”

그러자 아내는 단호하게 말했다.

“내 SNS니까 내 마음대로 하는 거예요. 보기 싫으면 팔로잉하지 말던가요.”


지금 생각하면 별일도 아닌데, 그날은 서로 감정이 조금 상해 있었던 모양이다. 괜한 오기가 생긴 나는 정말로 아내 계정을 언팔로잉했고, 인스타그램 앱까지 휴대폰에서 삭제해 버렸다.


그런데 그 사실을 알게 된 아내는 예상보다 훨씬 큰 상처를 받았다. 나중에 들으니 하루 종일 가슴이 벌렁거릴 정도였다고 했다. 당시에는 ‘고작 SNS 하나인데 왜 저렇게 속상해할까’ 싶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아마 자신의 취미와 감성을 내가 인정해주지 않는다고 느꼈던 것 같다.


며칠 뒤 미안한 마음에 다시 앱을 설치하고 팔로잉 신청을 했지만, 아내는 끝내 받아주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그 후로 인스타그램을 완전히 잊고 살았다.


그런데 얼마 전, 문득 아내의 휴대폰 속 인스타그램을 열어보게 되었다.

그곳에는 2013년 이후 우리 부부의 시간이 거의 그대로 남아 있었다.

수많은 꽃 사진들, 함께 갔던 여행지, 하이킹 길에서 마주한 풍경들...

사진들을 보고 있자니 여행 중 내가 앞서 걸어가다 뒤돌아보면, 늘 어딘가에 멈춰 꽃과 나무와 하늘을 찍고 있던 아내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내는 사진 찍기를 참 좋아했다. 그리고 나보다 훨씬 잘 찍었다.

우리 딸이 가족 중 가장 사진을 잘 찍는데, 그래서 나는 종종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나는 눈으로 사진을 찍고, 아내는 마음으로 사진을 찍고, 딸은 영혼으로 사진을 찍는다.”


아내는 물욕이 거의 없는 사람이었지만 카메라만큼은 유독 애정을 가졌다. 내가 좋은 카메라를 사라고 여러 번 권했지만, 굳이 새 제품은 필요 없다며 지인이 쓰던 중고 카메라를 사서 사용했다. 빅토리아 대학교에서 사진 강좌까지 들었는데, 그래서인지 아내 사진에는 늘 구도와 색감의 감각이 살아 있었다. 젊은 시절에는 미대를 가고 싶었지만 장인어른의 반대로 포기했다는 이야기도 했었다.

여행 후 사진을 정리하다 보면, 결국 가장 좋은 사진은 늘 아내가 찍은 것들이었다.


기적 같이 휴대폰 속에서 아내의 목소리를 발견했고, 그리고 인스타그램 속에서 아내의 시선을 다시 만났다.

생각해 보면 사람은 떠나도, 함께 살아온 시간들은 이런 식으로 예상치 못한 곳에 남아 있는 모양이다. 디지털 파일이라는 차가운 형태로 남아 있지만, 그 안에는 여전히 한 사람의 웃음과 감정과 시선이 살아 숨 쉬고 있다.


그 이후 지금까지 꾸준히 그 목소리들과 사진들을 천천히 다시 들여다보고 있다.

그리고 이제야 조금 알 것도 같다. 왜 그날 아내가 그렇게 속상해했는지를.

“여보, 그때 인스타그램 언팔로잉해서 미안했어. 이제는 당신 사진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