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회장입니다.

속물 엄마라서 미안해

by선물

<2004년 4월에 쓴 글을 다시 꺼내 봅니다.>


이상하게 아들은 감투를 쓰는 일에 무관심했다. 아니, 정확히는 감투를 싫어했다.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 대장과 부하가 등장하는 동화바카라을 읽은 감상을 이야기하랬더니 대뜸 하는 말이 자기 장래희망이 '부하'라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아이가 잘못 말한 줄 알았다.


"부하는 나서서 싸움을 하지만, 대장은 가만히 서서 명령만 하니까 부하가 훨씬 더 멋있어."


잘못 말한 것이 아니었다. 나름 일리도 있었다. 하지만 장래희망이 부하라니 썩 달갑지 않았다.


학교에서 임원을 뽑는 때가 돌아왔다. 예전의 딸아이 입학식 날이 떠올랐다. 교실로 들어가서 선생님과 첫인사를 나누는 자리였다. 선생님은 초등학교 때 임원을 한 학생들에게 손을 들라고 하셨다. 절반이 넘는 아이들의 손이 올라갔다. 임원을 한 번도 해보지 못한 딸아이가 왠지 딱해 보였다.


그 생각에 6학년이 된 아들에게 떨어져도 괜찮으니 일단 한번 출마해 보라고 권했다. 자신의 소견도 발표해 보고 좀 더 적극적으로 살아보라고 했다. 사실 임원 출마를 권유한 것은 처음이 아니었다.


아이가 1학년 때 일이었다.


선생님이 반장 하고 싶은 사람은 손을 들어보라고 하셨다. 반 아이의 3분의 2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켜하지 않았던 아들도 엄마의 압력이 떠올라 어쩔 수없이 손을 들었다. 선생님은 후보가 너무 많으니 양보할 친구들은 양보를 하라고 하셨다. 나중에 전해 듣기로는 그 순간 신이 나서 첫 번째로 손을 내린 아이가 내 아들이었다고 한다.


사실 아이가 임원이 되면 엄마인 나도 어느 정도는 학급 일에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 사정이 여의치 않음에도 아이가 출마하기를 바랐던 것은 당선보다는, 아들이 보다 더 적극적이고 자신감을 가져주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싫다는 아이에게 계속 강요하기는 싫었다. 그렇게 학년이 올라갔고 아들이 6학년이 되자 나는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아들을 다그치게 된 것이다. 누나의 입학식 날 있었던, 임원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자 아들은 귀담아듣기 시작했다.


결정적으로 아들이 출마를 결심한 것은 남편의 금연 약속 때문이었다. 남편은 설마 하는 마음으로 아들의 출마를 의심했고, 설령 출마하더라도 당선이 될 확률은 낮으리라 예상했던 모양이었다.


"엄마, 나 당선되면 아빠가 담배 끊으시겠대!"


마침내 아들은 출마를 결심했다. 막상 출마한다니 더럭 겁이 났다.


"그럼 회장 말고 부회장 나가라. 회장 되면 엄마가 힘들어. 돈도 많이 들고."


능력 없는 엄마가 부끄러웠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아들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렇잖아도 회장직이 두려웠던 아이에게는 매우 다행한 일이었다. 그렇게 서로의 계산이 맞아떨어진 우리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아침에 아들은 이웃에 사는 친구와 함께 학교로 향했다. 아이들끼리 나눈 대화를 옮겨본다.


"우리 엄마가 부회장 나가래."

"응? 우리 엄마도 그랬는데..."


친구가 잠시 고민을 하다가 결심이 선 듯 말했다.


"그럼 넌 부회장 나가. 난 딴 거 할게. 너랑 경쟁하기 싫어."


아쉽게도 아들은 아빠와의 약속 때문에 친구처럼 그런 멋진 양보를 할 수 없었다.


학급에서 임원을 뽑는 시간이 왔다.


올해부터는 한 반에서 임원을 여섯 명 뽑았다. 반장, 남녀 부반장, 회장, 남녀 부회장이었다.

아들 친구는 '부'자가 달린 '부반장'이 있어 너무 반가웠다. 부반장에 출마하여 당당히 당선되었다.


아들은 기다리고 있다가 부회장이란 말이 나오기가 무섭게 손을 들었다. 정확히 엄마가 말한 '부회장'이었다. 그리고 당선되었다. 사실 나는 그런 것을 잘 몰랐다. 그냥 반장이 회장인 줄 알았다.


아들이 학교에서 돌아왔다.


"엄마, 나 부회장이야. 아빠한테 자랑해야지. 이젠 아빠도 담배 끊는다."

아이는 무진장 신이 나서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회장은 누가 되었니?"


"반장은 ○○. 부반장은 □□, 회장은 ☆☆. 그리고 부회장은 나 "


"그게 다 뭔데? 반장은 뭐고 회장은 뭐야?"


"반장은 학급 일을 하고 회장은..... 아, 몰라!"


"그럼 반장이 높니? 회장이 높니?"


"반장을 먼저 뽑았어"


"그럼 반장이 높은 거네. 그럼 부반장 나가지 그랬니?"


"엄마가 부회장 나가라고 그랬잖아. 그거 땜에 친구도 나한테 양보했는데."


"그럼 그 친구는 아무것도 안 된 거야?"


"아니, 걘 부반장 되었어. 부회장 나한테 양보하고."


"뭐야? 부반장이 더 높다면서."


아이 얼굴은 점점 일그러졌고 기뻐하던 모습도 사라졌다. 나는 그 순간 그야말로 자리를 따지는 속물이 되어 아들의 마음을 다치게 했다.


아들은 아빠에게 전화를 걸어 자랑스러워하며 당선 사실을 알렸다. 통화 중 아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나는 네가 회장이 되면 담배 끊을 거라고 했는데?"


맙소사, 남편까지 한몫을 했다. 그냥 웃으며 놀린 이야기였는데 아들은 울상이 되었다. 이래저래 부창부수 못난 부모가 되었다.


저녁에 집으로 돌아온 남편에게 왜 아이를 약 올렸냐며 한 소리 했다.


"정말 담배 끊게 생겼네."


남편은 심각한 얼굴로 읊조렸다. 술은 못하고 담배만 좋아하던 남편인데 정말 골치 아프게 생겼다. 아빠를 위해 그토록 몸을 사리던 임원 자리에 기꺼이 나가 준 아들이 고맙고 또 미안한 밤이다.


이제 공은 남편에게 넘어갔다. 과연 남편은 아들과의 약속을 지키고 담배를 끊을 수 있을까? 그것이 문제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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