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서로를 배신했다.

소심한 복수는 내 발등을 찍었다.

by선물

<2005년 3월에 쓴 글을 다시 꺼내 봅니다.>


아들이 중학생이 되었다.
신학기가 되면 늘 그렇듯, 아이의 가방에는 신상명세서나 자기소개서 같은 프린트물이 가득했다.
내가 작성해야 할 것은 두 장이었다. 아들도 두 장을 작성한다고 했다.

먼저 내가 작성해야 할 것을 대충 훑은 뒤, 아들 녀석이 빛의 속도로 작성한 프린트를 슬쩍 가져와 보았다.

부모님의 장단점을 적는 칸이 있었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원문 그대로 옮겨본다.

아빠의 장점
'무지 잘 놀아주고 잘 이해해 주신다.'

아빠의 단점
'무섭다.'

이제 엄마 차례다.

엄마의 장점
'잘 이해해 주신다.'

엄마의 단점
'아무 데나 막 때린다.'

흠...... 중학생이나 된 녀석이.......
기가 찰 노릇이었다.

하긴, 어릴 때부터 워낙 글쓰기를 싫어하던 아들이라 어떤 질문이든 답은 늘 짤막짤막했다.

'비밀로 하고 싶은, 인생에 대한 고민 등이 있으면 선생님께 살짝 털어놓아 보세요.'라는 질문에 대한 답도 고작 '고민 없다.' 네 글자였으니...

나중에 우리 집에 놀러 왔던 아들 친구가 한 말도 기가 막혔다.

"어머니 단점은 하나 더 있어요."
내 단점이라는 말에 살짝 긴장했다.

'아무거나 막 먹인다.'
토실토실 살이 찐 아들을 놀리는 말이었다. 유유상종이었다.

그나저나 이걸 읽으시는 선생님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실지 은근히 걱정되었다.
사람들은 나를 온순하고 얌전한 사람으로 아는 데, 그런 엄마의 이미지를 아들이 단 몇 글자로 망쳐버렸다. 아들 때문에 나는 그야말로 무지막지한 엄마가 되고 말았다.


가만히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나는 복수의 칼날 대신 펜을 꺼내 들었다. 그래도 학부모인지라 아들과는 달라야 했다. 한 자 한 자 정성껏 써 내려갔다.

아들의 장점
'항상 밝고 친구가 많습니다.'
아들의 단점
'무서운 아빠나 할아버지 말씀은 잘 듣지만, 순한 엄마의 말은 잘 듣지 않는 아이입니다!!!'

나는 복수에 눈이 멀어 한 글자도 고치지 않고 그대로 제출하게 했다. 아들은 읽어보지도 않았고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조차 괘씸했다.

나는 그렇게 아들을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비겁한 사나이로 만들어 버렸다. 그때는 속이 후련했는데, 돌아보니 생각할수록 부끄럽다.

아마도 선생님은 아들의 특이사항에 이렇게 적으셨을 것이다.

'피는 못 속인다'

내 소심한 복수는 결국 내 발등을 찍은 셈이다.

그런데...... 저, 어른 맞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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