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동맹이 남긴 세계유산의 도시
2026년 8월 3일 월요일 · 베르겐 브뤼겐과 베르겐후스 요새, 그리고 숙소에서의 저녁
베르겐 구시가지의 브뤼겐(Bryggen)은 한자(Hansa)동맹이 있던 지역으로 1979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한자동맹이 무엇인지 알고 보면 브뤼겐의 모습이 달리 보인다.
여기서 한자는 한문의 한자가 아니다. 한자(Hansa)라는 말 자체가 중세 독일어로 무리, 떼를 뜻했다. 한자(Hansa)동맹은 나라가 아니라 상인들의 조합이었다. 독일 항공사 루프트한자(Lufthansa)도 여기서 온 이름인데, 루프트(Luft)가 하늘이니 하늘의 한자(Hansa)인 셈이다.
십삼 세기 무렵 북독일 도시의 상인들이 뭉치면서 시작되었다. 바다에는 해적이 있고 항구마다 세금과 규칙이 달랐으니 혼자 다니는 것보다 뭉치는 편이 안전했다. 나중에는 왕들과 조약을 맺어 세금을 깎고 자기들 구역을 얻어 낼 만큼 힘이 세졌다. 베르겐, 런던, 브뤼헤, 현재 러시아에 위치한 노브고로드 이렇게 네 곳에 큰 거점을 두었는데 브뤼겐이 그중 하나다.
브뤼겐에서 한자동맹이 주로 다룬 것은 마른 대구였다. 그 좁고 긴 건물들은 애초에 사람이 살라고 지은 집이 아니라 대구를 쌓아 두는 창고였다.
노르웨이 북쪽 바다에서 잡은 대구를 소금도 치지 않고 찬 바람에 말리면 나무토막처럼 단단해진다. 몇 년을 두어도 상하지 않아 냉장이 없던 시대에 유럽에서 가장 믿을 만한 단백질이었다. 북부 노르웨이 어민들이 그것을 배에 싣고 베르겐으로 내려왔고, 반대편에서는 북독일 상인들이 곡물을 싣고 들어왔다. 마른 생선과 밀가루의 교환, 그것이 이 도시의 사업이었고 한자동맹은 그 교환의 관리자였다.
브뤼겐 안에서는 불을 피우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나무 창고에 마른 생선이 가득하니 불이 나면 도시가 통째로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도 불은 여러 번 났고 1702년에는 도시 대부분이 타 버렸다. 지금 서 있는 건물들은 그 뒤에 다시 지은 것이다.
다섯 시에 다시 나섰다. 팔월 초 이 위도에서 다섯 시는 저녁이 아니라 한낮이다. 차는 숙소에 두고 걷기로 했다. 구시가지로 가려면 다리를 하나 건너야 한다.
다리 아래로는 항구가 내려다보였다. 부두에 컨테이너가 색깔별로 층층이 쌓여 있고 그 옆에 크레인이 한 대 서 있었다. 눈에 보이는 베르겐 항구는 부산항이나 인천항에 비할 규모가 아니었다. 크레인 한 대에 컨테이너 몇 줄, 그 옆에 배 몇 척. 노르웨이 제2의 도시인데 항구가 이 정도다.
나중에 찾아보니 이 부두는 도켄이라고 불리는 곳인데, 머지않아 사라진다고 한다. 항만 기능을 서쪽 바깥으로 옮기고 이 자리는 시가지로 바꾼다는 것이다. 부산 북항이 떠올랐다. 항구가 도시에 밀려 바깥으로 물러나는 일은 어디서나 비슷하게 일어나는 모양이다.
다리를 건너자 바로 오래된 동네가 시작되었다. 노르드네스라는 곳이다. 큰길로 곧장 가지 않고 골목을 따라 걸었다.
이 동네 남쪽 비탈에는 옛 목조 주택가가 비교적 온전히 남아 있다. 관광객은 브뤼겐과 어시장 쪽에만 몰리고 이쪽까지는 잘 오지 않는다. 골목에서 마주친 사람이 손에 꼽을 정도였다.
오르막 골목 아래에서 엄마와 아이가 올라왔다. 월요일 저녁 여섯 시가 다 된 시각이니 일을 마치고 아이를 데리고 간단한 반찬거리를 사 들고 오는 길인 것 같았다. 차가 들어올 수 없는 골목이라 이 가파른 길을 걸어 올라가야 한다. 우리 눈에는 그림 같은 골목인데 사는 사람에게는 매일 오르내리는 삶의 공간일 것이다.
조금 더 걸으니 다른 골목이 나왔다. 이쪽은 평평했고 노랑, 하늘색, 살구색, 연두색 집들이 나란히 서 있었다. 배경이 예뻐서 여기서 사진 몇 장을 찍었다.
골목을 빠져나오니 넓은 잔디밭 너머로 흰 석조 건물이 서 있었다. 정면에 1850 DEN NATIONALE SCENE 1909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베르겐의 국립극장이다.
그 앞 잔디밭에 커다란 돌조각이 하나 있었다. 망토를 둘러쓴 사람인데 몸은 기둥처럼 뭉뚱그려져 있고 얼굴만 또렷하다. 받침돌에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HENRIK IBSEN.
의아했다. 입센은 오슬로 사람인 줄로만 알았고, 이틀 뒤 오슬로에서 들어간 입센 박물관도 그의 집이라고 했다. 그런데 왜 베르겐 한복판에 이만한 입센이 서 있나.
돌아와 찾아보고 알았다. 입센이 연극을 처음 배운 곳이 이 극장이다. 1851년, 스물세 살의 입센이 여기 자리를 얻었다. 무대감독 겸 전속 작가였고 해마다 새 희곡을 한 편씩 써야 하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여섯 해 동안 백 편이 넘는 연극을 무대에 올렸고 평생의 아내가 될 사람도 이 도시에서 만났다.
1857년에 그는 크리스티아니아로 떠났다. 지금의 오슬로다. 그 뒤로 스물일곱 해를 외국에서 떠돌며 『페르 귄트』와 『인형의 집』을 썼고, 예순이 넘어 돌아와 마지막 십여 년을 그 도시에서 살았다. 이틀 뒤에 내가 들어간 그 집이다.
오슬로의 그 집은 다 이룬 사람이 돌아와 죽을 때까지 산 집이고, 이 극장 앞은 아직 아무것도 아니던 스물세 살의 청년이 처음 밥벌이를 시작한 자리인 셈이다.
노르웨이 닷새 일정에 베르겐을 넣으면 무리라는 것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래도 넣었다. 사진 한 장 때문이었다. 물가에 늘어선 그 목조 건물들을 꼭 내 눈으로 보고 싶었다.
브뤼겐은 항구를 따라 한 줄로 서 있었다. 노르웨이어로 부두라는 뜻이다. 삼각형 지붕이 나란히 이어지고 붉은색과 노란색과 흰색이 차례로 놓인 목조 건물들. 사진으로 수없이 본 그 모습 그대로이다. 이날은 하늘이 환해서 건물 색이 한층 선명했다.
브뤼겐 전체가 한눈에 들어오는 만 건너편에서 사진을 많이 찍었다. 딸과 찍은 사진도 여기서 건졌다.
브뤼겐으로 들어가는 길목이 어시장이었다. 연어를 비롯해 먹을 것을 팔았는데, 관광지라 그런지 사람이 북적였고 값도 생각보다 비쌌다.
멀리서 볼 때는 옛 건물 그대로였는데 가까이 와서 보니 안은 대부분 기념품 가게와 옷 가게로 바뀌어 있었다. 통로 안쪽으로 들어가니 문마다 상점이 들어 있었다. 털실로 짠 스웨터, 순록 가죽, 트롤 인형, 연어 통조림. 유네스코 세계유산의 내부는 대체로 기념품 가게였다.
가게마다 트롤 인형이 가득했다. 하나같이 생김새가 달라서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그런데 머리카락이 꼭 사람 머리 같아서 조금 징그러웠다. 양모나 합성 섬유를 쓴다는데도 그랬다. 그래서 사지 않았는데 지금 생각하니 하나쯤 사 올 걸 그랬다.
조금 전에 지나온 노르드네스 골목이 떠올랐다. 거기도 나무집 사이로 난 좁은 길이었고 폭도 여기와 비슷했다. 다른 것은 그 길에는 장바구니를 든 사람이 걸어 다녔고 이 길에는 사진을 찍는 사람만 걸어 다닌다는 점이다.
브뤼겐의 좁은 골목을 걸으면서 직업병 비슷한 것이 발동했다. 국경 안에 들어와 있지만 아직 통관되지 않은 물건이 쌓여 있는 곳을 보세구역이라고 부른다. 내가 이십오 년째 다루어 온 자리다. 혹시 이곳도 보세구역 같은 곳은 아니었을까 싶어 나중에 검색해 보았다.
엄밀히 말하면 이곳은 보세구역보다 부산에 있었던 왜관에 더 가까웠다. 조선 땅 안에 조선 법이 온전히 미치지 않는 구역이 있었고, 일본 상인들이 그 안에서 자치를 인정받아 교역했다. 브뤼겐도 그런 곳이었다.
일곱 시에 베르겐후스 요새로 갔다. 베르겐후스는 베르겐과 집을 뜻하는 후스(hus)가 붙은 말이다. 왕의 성을 두고 거창한 말 대신 그냥 집이라고 부른 셈이다.
입구에 큼직한 안내판이 서 있었다. 요새 전체를 조감도로 그려 놓고 번호를 쉰 개 넘게 붙여 둔 지도였다. 그중에 내가 보러 온 것은 하나, 호콘스할렌이었다.
안마당에 1260년 무렵 호콘 4세가 지은 회색 석조 건물이 서 있었다. 왕의 연회장이라기에 큰 집을 생각했는데 규모는 작았고, 돌벽에 세월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 건물이 서기 스무 해쯤 전, 호콘 4세는 사람을 보내 스노리 스투를루손을 죽였다.
나는 이 여행에 신화바카라을 한 권 넣어 왔다. 오딘과 토르 등의 이야기인 북유럽 신화의 상당 부분은 아이슬란드 사람 스노리 스투를루손이『산문 에다』에 정리해 둔 덕분에 남았다. 그는 젊은 시절 노르웨이에 건너와 호콘 왕과 가까이 지냈고, 나중에 왕의 눈 밖에 났고, 결국 왕이 보낸 자들의 손에 아이슬란드 자기 집 지하에서 죽었다.
내 가방 속 바카라에 적힌 신들의 이야기를 남긴 사람과 그 사람을 죽이라고 명한 사람. 눈앞의 저 돌집은 후자의 것이다. 신화는 종이로 남아 이야기가 널리 퍼졌고, 권력은 돌로 남아 겨우 흔적만 찾을 수 있었다.
요새 근처에 플로이바넨(Fløibanen)이라는 푸니쿨라가 있다. 이것을 타고 산에 오르면 베르겐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고 한다. 키오스크 앞까지 가서 표를 끊으려다 그만두었다. 갔다 오면 너무 늦어 저녁을 못 먹을 것 같았다.
다시 다리를 건너 숙소로 돌아갔다.
부엌에 밥솥은 없고 냄비가 있었다. 딸이 하겠다고 나섰다. 휴대폰으로 한참 검색을 하더니 물을 맞추고 불을 올리고, 김이 오르자 불을 줄이고, 마지막에는 꺼서 뜸까지 들였다. 제법 그럴싸한 냄비밥이 나왔다.
우리 딸이 언제 이렇게 컸나 싶었다.
세 개 대륙에서 온 먹거리로 그럴듯한 저녁상이 차려졌다. 미역국은 한국에서 가져간 비비고 미역국이었고, 와인은 오전에 뵈르데에서 산 칠레 와인이었다. 거기에 베르겐 북쪽 마트에서 산 쌀과 반찬.
낮에 알게 된 것이 떠올랐다. 저 건너편 목조 창고에서 살던 사람들은 밥을 먹으려면 화재 위험 때문에 따로 마련된 방에 모여야 했다고 한다. 불 하나를 가운데 두고 둘러앉아 국을 떠먹고 이야기를 하고 몸을 녹였을 것이다.
우리 셋도 지금 그렇게 앉아 있었다. 만 하나를 사이에 두고, 칠백 년쯤을 사이에 두고.
비가 가장 많이 온다는 도시에서 우리는 노르웨이에서 가장 맑은 하루를 얻었고, 그 하루의 끝에서 밥다운 밥을 처음 먹었다.
내일은 하르당에르비다로 가는 여정이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멋진 풍경이 펼쳐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