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장. 베르겐 가는 길

리드에서 베르겐까지 240킬로미터

by간서치

2026년 8월 3일 월요일 · 리드 캠핑장에서 베르겐까지, Rv60과 E39 240km 3시간 50분



베르겐으로 출발


리드 캠핑장에서의 아침은 어제 마트에서 사 둔 빵과 한국에서 가져온 커피이다.


어제 온종일 비가 내렸으니 오늘은 좀 그쳐 주려나 했는데 그렇지 않다. 그래도 젖은 옷을 히터 앞에 널어 둔 덕분에 만져 보니 다 말라 있었다. 그만해도 다행이다.


오늘의 목적지는 노르웨이 제2의 도시 베르겐이다. 240킬로미터, 3시간 50분. 어제 헬레쉴트에서 1시간 30분을 더 달려 여기까지 와 둔 덕분에 그만큼 줄어든 거리다.


리드를 떠나 남쪽으로 내려가니 길이 좁고 깊은 골짜기로 접어들었다. 한적한 스위스 시골 마을 같은 풍경이 이어졌다. 어제 굽이길을 오르내린 뒤라 이런 곧은길은 그냥 쉬는 시간 같았다. 날씨만 좋았으면 최고의 드라이브 코스가 되었을 텐데 아쉽다.


스케이를 지나면서 계기판을 보니 바깥 온도가 8.5도였다. 8월 3일 아침도 추위로 시작한다. 올여름은 정말 피서 하나는 제대로 하는 셈이다.


달리다가 길가에서 이상한 것을 보았다.


흰 판에 여자아이의 얼굴이 크게 인쇄되어 있는데 얼굴 아래쪽이 뭉개져 흐릿했다. 처음 보고는 귀신인가 싶었다. 판 아래에 노르웨이어로 한 줄이 적혀 있었다.


Over fartsgrensa?


제한 속도를 초과하셨나요,라는 뜻이다.


과속을 막으려고 세운 공익 캠페인 표지판이었다. 그런데 이 표지판에는 숨은 장치가 하나 있다. 차가 빠르게 지나갈수록 아이의 얼굴이 번지고 흐려지도록 만들어 둔 것이다. 천천히 지나가면 아이가 또렷하게 보이고, 속도를 올리면 아이가 사라진다.


돌아와 사진을 다시 보아도 아이의 얼굴 아래쪽은 그대로 뭉개져 있다. 나는 그렇게 빨리 달리지도 않았는데 왜 귀신처럼 보였을까.



술은 보일 때 사 둔다


한 시간쯤 달려 뵈르데에 잠시 들렀다. 길가에 수입차 매장도 보이고, 지금까지 지나온 마을들에 비하면 제법 큰 도시 같았다. 이곳에 볼 것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검색해 보니 국영 주류 판매점 빈모노폴레트가 있다고 해서 일부러 찾아갔다.


이틀 연속 술 때문에 애를 먹고 나니 살 수 있을 때 미리미리 사 두어야 안심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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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께 오타에서 산 포르투갈 와인 포르타다(Portada)가 맛있었던 터라 같은 것으로 두 병을 집었다. 칠레 와인도 한 병 골랐다. 129.9 크로네, 우리 돈으로 이만 원이 조금 넘는다.


세 병을 계산대에 올렸다. 한 병은 오늘 저녁 베르겐의 부엌에서, 나머지 두 병은 이어지는 이틀 밤에 차례로 열리게 된다.



송네 피오르드를 페리로 건너다


뵈르데를 지나 E39를 타고 내려가다 라비크에서 페리를 탔다. 송네 피오르드를 건너 오페달로 넘어가는 배다. 이십 분 남짓 걸린다.


어제 게이랑에르에서 헬레쉴트까지 탄 배는 사실상 유람선이었다. 사람들은 폭포를 보려고 그 배에 올랐다. 오늘 배는 그렇지 않다. 어제 트롤스티겐에서 내려오는 길에 잠깐 탔던 배와 같은 종류다. 구경거리가 아니라 그냥 길이다.


차량 페리로는 두 번째인데, 처음 탔을 때는 차에서 내리지도 못했다. 언제 내려도 되는 건지 몰라 그냥 운전석에 앉아 있었다. 이번에는 달랐다. 차를 세워 두고 위층으로 올라가 창밖을 내다볼 여유가 생겼다.


아래 갑판에는 캠핑카와 트럭과 오토바이가 나란히 서 있었다. 번호판을 보니 노르웨이 차가 대부분이고 프랑스와 독일에서 온 차도 섞여 있었다. 유럽 사람들은 부럽다. 자기 차를 몰고 이렇게 노르웨이까지 달려올 수 있으니.


건너는 동안 날이 조금씩 개기 시작했다.



주유소에서 먹은 늦은 점심


베르겐에 다 와 갈 무렵에는 햇빛까지 났다. 베르겐은 일 년에 이백 일 넘게 비가 온다는 도시다. 오늘 아침만 해도 우리는 빗속을 달렸다.


북쪽 외곽 울세트에서 차를 세웠다. 오후 두 시였다. 여기서 충전도 하고 점심도 먹고 저녁 먹거리까지 사기로 했다.


충전은 써클 K 주유소에 마련된 급속충전기에서 했다. 며칠 다녀 보니 노르웨이는 주유소 여유 공간에 충전기를 넉넉히 설치해 두었다. 기름을 넣으러 온 차와 전기를 넣으러 온 차가 같은 마당을 쓰는 셈이다. 우리나라도 주유소 부지를 이렇게 쓰면 주유소는 새 수익이 생기고 전기차 보급도 훨씬 빨라질 것 같다. 전기차가 먼저 자리 잡은 나라에서 이런 점은 배웠으면 좋겠다.


충전기 근처에 붉은 입간판이 서 있었다. 소시지를 빵 사이에 끼운 사진이 먹음직스러웠고, 무엇보다 값이 두 개에 39.9 크로네였다. 우리 돈으로 육천 원쯤이니 가성비가 아주 좋다. 이걸로 점심을 대신하면 되겠다 싶었다. 어제 게이랑에르에서 어묵 샌드위치를 찾아내느라 딸과 조카가 한참 검색했던 것을 생각하면, 이 가격표는 그냥 반가웠다.


그런데 계산대에 올리니 찍히는 값이 달랐다. 간판보다 비쌌다. 방금 찍어 둔 사진을 꺼내 점원에게 보여 주며 두 개에 이 값 아니냐고 물었다. 점원은 그건 회원 가격이라고 했다. 써클 K 앱에서 회원 가입을 하고 오라는 것이다.


그 자리에서 앱을 깔아 보았다. 노르웨이 주소를 넣으라는 칸이 나왔다. 포기하고 돌아서려는데 점원이 우리를 불렀다. 딱해 보였던 모양이다. 자기 회원 카드로 할인을 넣어 주겠다고 했다. 그래서 간판에 적힌 값 그대로 살 수 있었다.


계산을 마치고 나오는데 딸이 잔소리 비슷한 푸념을 했다.


"오늘 아침도 빵, 늦은 점심도 소시지 빵. 우리 너무 없이 다니는 거 아니야? 근데 아빠 술은 안 아끼고 사네."


딱히 할 말이 없었다.


매장 한쪽에 서서 그렇게 어렵게 산 소시지 빵으로 늦은 점심을 때웠다. 맛있게 먹었다기보다 말 그대로 때운 것이다.




코옵 엑스트라에서 장보기


길 건너편에 큰 마트가 있어 들렀다. 차는 그대로 충전기에 꽂아 둔 채 셋이 걸어서 건넜다.


오늘 저녁과 내일 아침까지 먹을 것을 제대로 사기로 했다. 불닭볶음면, 미트볼, 냉동피자, 흰쌀, 납작복숭아 그리고 맥주. 각자 먹고 싶은 것을 골라 담았다. 노르웨이 마트에 불닭볶음면이 있는 것이 신기했다.


맥주 진열대 앞에서는 한참 서 있었다. 여전히 모르는 상표가 가득했다. 그러고는 결국 프뤼덴룬을 집었다. 그제 레샤스코그 캠핑장에서 마셔 보고 그 뒤로 계속 찾게 된 맥주다.


와인도 그렇고 맥주도 그렇고, 고를 것이 아무리 많아도 결국 익숙한 것으로 손이 간다.


계산대로 가는 길에는 코카콜라 진열대가 서 있었다. 노르웨이 국가대표 선수들이 붉은 유니폼을 입고 큼직하게 인쇄되어 있고, 그 옆에 HELE NORGE HEIER라고 적혀 있었다. 온 노르웨이가 응원한다는 뜻이다.


그럴 만했다. 바로 지난달 북중미 월드컵에서 노르웨이가 사상 처음으로 8강에 올랐다. 나라 전체가 아직 그 기분에서 내려오지 않았을 것이다. 익숙한 홀란이 제일 앞에 보인다. 며칠 뒤 오슬로에 가서 알았는데, 홀란은 콜라 광고에만 나오는 게 아니었다. 안경 광고에도 옷 광고에도 시내 곳곳에 등장한다. 정말로 국민 영웅인 모양이다.



베르겐 모던 하우스


숙소는 베르겐 구시가지 다리 건너 락세보그에 있었다. 예약할 때 찾아보니 그 지명은 연어를 뜻하는 옛말 lax와 만을 뜻하는 vágr가 붙은 것이어서, 그대로 옮기면 연어 만이 된다. 옛날에는 노르웨이 연어가 이곳에서 많이 잡혔을까. 정작 몇 시간 뒤 구시가지 어시장에서 본 연어는 상상 이상으로 비쌌다.


아파트 한 채를 통째로 쓰는 숙소였다. 하룻밤에 32만 원, 주차 무료. 그제 레샤스코그 캠핑장 캐빈이 16만 원이었으니 꼭 두 배다.


노르웨이의 비싼 물가 앞에서도 이 집만은 망설이지 않고 예약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 방이 둘이고 거실이 있고 부엌이 따로 있는 것을 확인했을 때, 우리 셋은 동시에 이게 사람 사는 거지 하며 환호성을 질렀다.


화장실도 샤워실도 없어 공용 시설을 써야 했던 그제 캠핑장을 생각하면, 캐빈 안에 화장실이 있다는 것만으로 천국 같았던 어제도 이미 호강이었다. 숙소가 날마다 좋아진다. 그런데 내일 묵을 숙소는 1630년대에 지어진 농가를 고쳐 만든 집이라 슬슬 걱정된다.


나는 베란다로 나가 맥주를 한 캔 마셨다. 아침부터 이백사십 킬로미터를 달려와 이제 운전대를 놓은 참이었다. 크루즈선이 보이는 풍경에 하늘까지 맑으니 맥주가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잠시 충전을 하고 이제 구시가지로 향한다. 다음 글은 다리 건너편 이야기다. 브뤼겐과 베르겐후스 요새.

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