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다란 실외기를 대체한 손가락 두 개 크기의 소자
에어컨을 설치하는 날은 집 안팎이 바빠집니다. 실내기를 벽에 걸고, 배관을 뚫고, 베란다 한쪽을 떡하니 차지하는 실외기를 고정합니다. 아무리 가정용 소형 에어컨이라도 실외기만큼은 피할 수 없습니다. 왜일까요?
에어컨이나 냉장고의 원리는 같습니다. 냉매를 압축기(컴프레서)로 강하게 압축한 뒤, 갑자기 팽창시키면 온도가 뚝 떨어집니다. 이 차가워진 부분으로 실내 공기를 통과시키고, 열을 흡수해 뜨거워진 냉매는 바깥쪽으로 내보내 방열합니다. 에어컨은 이 방열을 실외기가 담당하고, 냉장고는 뒷면이 그 역할을 합니다. 냉장고 뒷면이 뜨거운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냉장고 안의 열을 뒷면을 통해 주방으로 뱉어내고 있는 것이지요.
이 원리는 1800년대 후반부터 산업 현장에서 쓰이기 시작했고, 1920년대 후반 가정용 냉장고가 등장했습니다. 1930년대에 프레온 냉매가 도입되면서 본격적으로 퍼졌고, 에어컨은 같은 시기 영화관과 백화점을 중심으로 확산됐습니다. 가정까지 들어온 건 그보다 한참 뒤의 일입니다. 이후 100년 가까이 압축기는 냉각의 유일한 방법으로 자리를 지켜왔습니다.
그런데 요즘 주변을 잘 살펴보면 압축기 없이 차가워지는 물건들이 눈에 띕니다. 화장대 위 화장품 냉장고, 바카라상 위 미니 정수기, 차 안에서 쓰는 소형 냉온수기. 이런 제품들을 뜯어보면 컴프레서는 없습니다. 있을 자리도 없지요. 도대체 어떻게 냉각이 되는 걸까요?
비밀은 손가락 두 마디만 한 얇은 판 하나에 있습니다. 펠티어 소자(Peltier element)입니다.
펠티어 소자는 두 종류의 반도체를 접합한 구조물입니다. 여기에 전기를 흘려보내면 한쪽 면은 차가워지고 반대쪽 면은 뜨거워집니다. 냉매도 압축기도 필요 없습니다. 전기만 있으면 됩니다. 이 현상은 1834년 프랑스 물리학자 장 샤를 펠티어(Jean Charles Peltier)가 처음 발견했습니다. 두 금속의 접합부에 전류를 흘리면 한쪽에서 열이 흡수되고 다른 쪽에서 열이 방출된다는 것을 실험으로 보인 것이지요. 당시에는 기초 물리 현상 정도로만 여겨졌지만, 반도체 기술이 발전한 20세기 후반부터 실용 소자로 만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첫째, 작습니다. 압축기처럼 모터와 배관이 필요 없으니 크기를 극단적으로 줄일 수 있습니다. 기존에는 냉각 기능 자체를 담을 수 없었던 소형 기기들이 가능해집니다.
둘째, 조용합니다. 구동 부품이 없으니 진동도 소음도 없습니다. 샘플링 장비나 의료기기처럼 진동에 민감한 환경에서 오래전부터 쓰여온 이유입니다.
셋째, 전류 방향만 바꾸면 냉각과 가열을 모두 할 수 있습니다. 냉온 양방향이 하나의 소자로 해결됩니다.
단점도 분명합니다. 에너지 효율이 낮습니다. 압축기 방식에 비해 같은 냉각 효과를 내는 데 전기가 훨씬 더 듭니다. 그래서 대용량 냉장·냉방에는 쓰기 어렵습니다. 펠티어 소자가 손바닥만 한 화장품 냉장고에는 어울려도, 200리터짜리 냉장고에는 맞지 않는 건 이 때문입니다.
펠티어 소자에 대해 알게 된 것은 양조장을 처음 설계할 때였습니다. 발효 과정에서는 계절에 따라 온수와 냉수가 번갈아 필요합니다. 겨울엔 발효탱크를 데워야 하고, 여름엔 식혀야 합니다. 펠티어 소자는 그 자체로 냉온 겸용이니 이론상으로는 딱 맞는 해법이었습니다. 테스트를 위해 간단한 장치를 만들어 실험을 해 보았습니다.
하지만 결국 포기했습니다. 양조에 필요한 물의 양과 온도 변화를 감당하려면 소자를 엄청나게 많이 써야 했고, 그만큼 전력 소모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었습니다. 결국 냉장창고 안에 물탱크를 들여놓고 여기서 찬물을 끌어오는 방식을 선택했습니다. 냉장창고가 알아서 온도를 유지해 주니, 물탱크에서 끌어온 물은 늘 차갑습니다. 펠티어 소자의 섬세함 대신, 이미 있는 인프라를 활용하는 쪽이 훨씬 현실적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때 인상적으로 남은 것이 있습니다. 커다란 압축기 앞에서는 손도 못 대겠다 싶었던 냉각 기능을, 손가락 두 개 크기의 소자를 구해서 전선 몇 개 연결하는 것만으로도 구현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직접 다룰 수 있다는 느낌, 재미있는 무엇인가를 만들어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펠티어 소자는 인터넷 쇼핑몰에서 몇천 원에 살 수 있습니다. 아두이노 같은 소형 컨트롤러와 연결하면 온도에 따라 냉각과 가열을 자동으로 전환하는 장치를 만드는 것도 어렵지 않습니다. 방을 시원하게 만드는 일은 에어컨에게 맡기더라도, 머그컵의 아이스커피를 차갑게 유지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코딩을 몰라도 이제는 AI에게 "온도 센서가 25도를 넘으면 펠티어 소자를 냉각 방향으로 작동시키는 코드 짜줘"라고 하면 쓸 만한 코드가 나옵니다. 부품값 몇만 원이면 나만의 머그컵 냉각 받침대를, 혹은 소형 샘플 보관 냉장고를 직접 만들 수 있는 시대가 됐습니다.
올여름에는 테스트를 위해 구입했던 펠티어 소자를 사용해서 머그컵 냉각기를 만들 생각입니다. 시간이 날지 모르겠지만...
혹시 주변에서 펠티어 소자가 쓰인 제품을 발견하신 적 있으신가요?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을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