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류, 인류 천 년의 지혜가 술잔에 담기기까지
양조장 한편에 자리 잡은 구리 증류기는 생긴 것부터 예사롭지 않습니다. 허리가 잘록한 적갈색의 구리 항아리는 그 자체로 훌륭한 양조장 인테리어 소품입니다. 항아리에 탁주를 담아 불에 얹고, 머리 꼭대기에서 가늘게 뽑아낸 파이프를 냉각기에 연결하면 증류 준비는 끝납니다. 막걸리를 끓여 소주를 만드는 이 장치는 외관만큼이나 원리도 우아합니다. 에탄올은 78도에서 끓고, 물은 100도에서 끓습니다. 불과 22도 차이. 증류는 그 미세한 차이를 붙잡아 술을 진하게 만드는 기술입니다.
증류의 역사는 8세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페르시아 출신의 연금술사 자비르 이븐 하이얀(Jabir ibn Hayyan, 721~815)이 증류 장치인 알렘빅(alembic)을 개량하고 증류의 원리를 체계화한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그가 술을 만들려 한 게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이슬람 율법은 음주를 금지했으므로, 그에게 증류는 순수한 화학적 탐구였습니다. 식물에서 향을 추출하고, 의약품의 유효 성분을 농축하는 것이 목적이었죠. 덕분에 아라비아 세계는 증류로 만든 향수를 꽃피웠지만, 증류로 만든 술은 정작 마시지 않았습니다.
이 기술이 유럽으로 건너온 것은 12세기의 일입니다. 많은 아랍어 학술서가 라틴어로 번역되면서 유럽의 연금술사들이 증류를 배웠고, 이탈리아 살레르노 대학에서 와인을 증류해 처음으로 "아쿠아 비타에(aqua vitae)", 즉 '생명의 물'이라는 이름으로 증류주를 마시기 시작했습니다. 약으로 처음 쓰였지만 곧 그 경계는 흐릿해졌습니다. 인간이란 그런 존재이니까요.
우리나라에 증류 기술이 들어온 것은 고려 시대입니다. 13세기 몽골의 침입이 그 경로였습니다. 원나라 군대가 주둔하면서 몽골의 아라크(araq) 제조법이 함께 들어왔고, 군사 기지였던 개성, 안동, 제주를 중심으로 증류주 문화가 뿌리를 내렸습니다. 안동소주가 지금도 명성을 이어오는 것은 그 역사적 흔적입니다.
그 이전 한반도 사람들은 오직 발효주만 마셨습니다. 막걸리와 청주가 전부였죠. 발효주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습니다. 여름이면 쉽게 상한다는 것입니다. 알코올 도수가 낮으니 세균이 쉽게 번식합니다. 조선의 어머니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혜를 짜냈고, 발효가 진행 중인 술에 증류주를 섞어 도수를 높인 '과하주(過夏酒)'를 고안해 냈습니다. 여름을 넘긴다는 이름 그대로, 더위를 이겨내는 술이었습니다.
비슷한 시기 유럽에서도 유사한 발상이 등장합니다. 대항해시대, 배에 실린 포도주가 적도를 건너며 줄줄이 상해 버리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포르투갈 상인들은 포도주에 증류주(브랜디)를 섞어 도수를 높이는 방법을 택했고, 그렇게 탄생한 것이 셰리와인과 포트와인입니다. 동서양이 각자의 방식으로, 같은 문제를 같은 방향으로 풀어낸 것입니다.
양조장에서 술을 빚으면 보통 16도 정도의 탁주가 나옵니다. 이걸 증류기에 넣고 증류해서 45도짜리 소주를 만든다고 해 봅시다. 얼마나 필요할까요? 계산은 간단합니다. 알코올의 양은 보존되어야 하므로, 45% × 350ml = 16% × 탁주의 양, 이 방정식을 풀면 탁주의 양 ≈ 984ml, 약 1리터가 나옵니다. 이론상 16도 탁주 1 리터면 45도 소주 350ml 한 병이 나와야 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조금 다릅니다. 증류 초반에 나오는 ‘초류'는 메탄올과 불순물이 섞여 버려야 하고, 후반의 '후류'도 잡내가 있어 쓰기 어렵습니다. 오직 맑고 향긋한 '본류'만이 소주로 쓰입니다. 실제로는 탁주 1.2~1.5리터는 준비해야 한 병의 소주를 온전히 얻을 수 있습니다. 증류는 정제의 대가로 양을 내주는 기술이기도 합니다.
증류는 끓는점 차이를 이용합니다. 그런데 반대로 어는점 차이를 이용해서도 같은 효과를 낼 수 있습니다. 에탄올의 어는점은 영하 114도, 물의 어는점은 0도입니다. 맥주를 영하로 냉각하면 물 성분이 먼저 얼음 결정을 만들고, 그 얼음을 걷어내면 남은 액체에는 알코올이 농축됩니다. 이것이 '냉동 여과(freeze distillation)'입니다.
독일의 전통 아이스복(Eisbock)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맥주를 빚어 영하로 얼린 뒤 얼음을 제거해 보통 10~15도짜리 맥주를 만듭니다. 그런데 이 방법을 극단까지 밀어붙인 맥주가 있습니다. 스코틀랜드의 양조장 브루마이스터(Brewmeister)가 만든 스네이크 베놈(Snake Venom)이 그 주인공입니다. 훈연 피트 맥아와 맥주 효모, 샴페인 효모로 발효시킨 뒤 냉동-제빙 과정을 수 차례 반복해 무려 67.5%의 도수를 달성했습니다. 소주보다 세고 일반 위스키보다도 독합니다. 병에는 '한 번에 35ml 이상 마시지 마시오'라는 경고 문구가 붙어 있습니다.
이 정도 극단에 이르면 맥주라는 이름이 어울리는지 물음표가 붙기도 합니다. 독일 맥주순수령(Reinheitsgebot)의 기준에서 보면 이런 술을 맥주라고 부르기는 조금 어렵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그러나 스네이크 베놈의 출발점은 분명 맥주 발효입니다. 끓이지 않고 얼려서 강해진, 열이 아닌 냉기의 자식입니다.
8세기 아라비아에서 향을 추출하던 기술이 12세기 유럽의 의약품이 되고, 고려를 거쳐 조선의 과하주가 되고, 대항해시대에는 셰리와인이 되고, 오늘날 막걸리를 증류해 소주가 됩니다. 인류가 끓는점 22도의 차이를 발견하고 다룰 줄 알게 된 지 어느새 1,000년이 흘렀습니다.
저는 오늘도 양조장 한편에 자리하고 있는 증류기를 보면서 그 오랜 지혜의 역사를 생각해 봅니다. 막걸리가 소주가 되는 두 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에탄올이 가득 담긴 증기가 관을 타고 올라가 방울방울 맺히는 것을 바라보면 저절로 경건해집니다. 과학이란 결국 자연의 이치를 발견해 삶에 끌어들이는 일입니다. 그리고 때로 그 결실은, 이렇게 투명한 한 잔으로 맺히기도 합니다.
기회가 된다면 증류에 관한 또다른 이야기를 들려드릴께요. 상압증류와 감압증류에 대해서도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은데 분량이 넘쳐 다음 기회를 노려 봅니다. 여러분은 어떤 술을 제일 좋아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