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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에 신부가 맞아 죽은 이유는?

신의 뜻은 인간이 알 수 없는 방식으로 나타나는 법이다

byFrancis Lee

에콰도르의 한 성당에서 미사를 집전하던 신부가 대형 십자가에 머리를 맞아 사망했다. 성당의 제대 뒤편에 설치된 십자가가 떨어졌고, 신부는 목숨을 잃었다. 신앙의 상징인 십자가가 신앙을 실천하던 사제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이다. 그 자체로도 충격적인 사고다.

그런데 사고를 바라보는 일부 사람들의 해석은 더욱 놀랍다. 누구는 이를 신의 뜻이라고 하고, 누구는 교회에 대한 신의 분노라고 한다. 십자가에 맞아 죽었으니 무슨 특별한 의미가 있지 않겠느냐는 식이다. 사고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 인간의 심리는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해할 수 있다는 것과 그 해석이 합리적이라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그런 결론을 내리는가? 신부가 십자가에 맞아 죽었다는 사실이 어떻게 신의 분노를 입증하는 증거가 되는가? 십자가가 떨어진 원인은 중력과 구조물의 상태, 고정 장치의 문제에서 찾아야 한다. 신의 분노라는 설명은 그 어떤 원인도 밝혀 주지 못한다. 오히려 조사해야 할 물리적 원인을 종교적 상상력으로 덮어 버릴 뿐이다.

더구나 그 논리를 받아들인다면 질문은 끝없이 이어진다. 십자가에 맞아 죽은 신부는 신에게 버림받은 사람인가? 그 신부가 봉사하던 교회는 신의 심판을 받은 것인가? 그렇다면 같은 성당에서 기도하던 다른 신자들은 왜 살아남았는가? 그들은 신의 보호를 받았고 죽은 신부만 특별히 벌을 받은 것인가?

이런 질문에 일관되게 답할 수 있는가? 답할 수 없다면 적어도 그 사고를 신의 분노라고 단정할 근거는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사고는 성당에서도 일어난다. 교회에서도 화재가 발생하고, 수도원에서도 질병이 퍼지며, 성직자도 교통사고를 당하고 암에 걸린다. 기도하는 사람도 병에 걸리고, 선하게 살아온 사람도 불행을 겪는다. 신앙은 인간을 자연법칙의 예외로 만들어 주지 않는다. 성당이라는 공간도 중력의 법칙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중세 유럽의 페스트는 이 문제를 더욱 분명하게 보여 준다. 페스트가 유럽을 휩쓸었을 때 수많은 사람이 죽었고, 종교시설에 모여 있던 사람들 역시 감염과 죽음을 피할 수 없었다. 당시 사람들은 이를 신의 진노나 죄에 대한 심판으로 해석하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페스트가 병원체에 의해 전파되는 감염병이라는 사실을 안다. 신의 분노라는 설명으로는 감염 경로도, 전염의 확산도, 치료와 예방의 방법도 밝혀낼 수 없다.

물론 과거의 사람들이 질병의 원인을 충분히 알지 못했다는 사실을 오늘날의 지식으로만 비난할 수는 없다. 문제는 과학적 지식이 축적되고 인간의 이성적 탐구가 발전한 뒤에도 여전히 모든 불행을 신의 의도와 직접 연결하려는 태도다. 설명할 수 없는 사건을 만났다고 해서 설명할 수 없는 존재를 원인으로 끌어들이는 것은 논증이 아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이러한 사고방식이 종교적 위로를 넘어 현실의 불평등과 고통을 정당화할 때 나타난다.

가난한 사람이 평생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신의 뜻이라고 한다. 성실하게 살아온 사람이 사업에 실패하면 그에게 주어진 시련이라고 한다. 선량한 사람이 병에 걸리면 더 큰 뜻이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반대로 부유하고 성공한 사람에게는 신의 축복이라는 해석을 붙이기도 한다.

그렇다면 묻자. 가난한 사람의 가난은 정말 신이 원한 결과인가? 부유한 사람의 부는 신이 특별히 허락한 보상인가? 태어날 때부터 교육과 기회의 차별을 겪은 사람에게도 그 모든 불리한 조건이 신의 뜻이었다고 말할 것인가? 전쟁과 재난으로 가족을 잃은 사람에게도 그 죽음이 신의 계획이었다고 설명할 것인가?

그렇게 말하는 순간 신앙은 고통받는 사람을 위로하는 언어에서 고통을 감수하라고 강요하는 언어로 변질된다. 불평등을 만들어 낸 슬롯구조와 부당한 제도를 비판하는 대신, 피해자의 불행을 신의 뜻으로 포장하기 때문이다.

가난은 구체적인 원인을 가진다. 불평등한 자산 분배, 교육 기회의 격차, 불안정한 노동시장, 슬롯안전망의 부족, 차별과 불공정이 사람을 가난하게 만들 수 있다. 질병에는 생물학적 원인이 있고, 사고에는 물리적 원인이 있으며, 슬롯적 재난에는 제도적 실패와 인간의 판단 착오가 개입할 수 있다. 이런 원인을 조사하고 바로잡는 것이 이성적인 인간의 바카라임이다.

그런데 모든 것을 신의 뜻이라고 설명해 버리면 어떻게 되는가? 원인을 조사할 필요가 없어진다. 바카라임자를 찾을 이유도 없어진다. 슬롯를 바꿀 의무도 사라진다. 가난한 사람은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부당한 대우를 받은 사람은 침묵하며, 권력을 가진 사람은 자신이 누리는 특권을 신의 축복으로 착각할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종교적 언어가 저지를 수 있는 가장 위험한 지적 폭력이다. 고통받는 사람에게 위로를 건네는 대신 그 고통에 신성한 의미를 부여하고, 부당한 현실을 바꾸려는 의지를 꺾기 때문이다.

물론 기독교 신앙에서 신의 섭리와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는 신비를 이야기할 수는 있다. 인간이 세상의 모든 일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겸손도 신앙의 중요한 태도다. 그러나 인간이 신의 뜻을 완전히 알 수 없다는 주장과 특정한 사고가 신의 분노 때문에 발생했다는 주장은 전혀 다르다.

전자는 인간의 한계를 인정한다. 후자는 인간이 알 수 없는 신의 의도를 자신은 알고 있다고 주장한다. 신의 뜻은 인간이 알 수 없는 방식으로 나타난다고 말하면서, 정작 눈앞의 사고를 신의 심판이라고 단정한다면 그것은 겸손이 아니라 독선이다.

성경의 욥기는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다. 욥은 의로운 사람이었지만 극심한 고난을 겪었다. 그의 친구들은 그 고통을 설명하기 위해 죄와 응보의 논리를 들이댔다. 고난이 있으니 죄가 있을 것이라는 식이었다. 그러나 욥기의 서사는 고통받는 사람에게 손쉽게 죄의 원인을 뒤집어씌우는 인간의 판단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보여 준다.

예수 역시 고통을 겪는 사람을 단순히 죄의 결과로 규정하는 태도를 경계했다. 그러므로 누군가의 불행을 보고 신의 심판이라고 성급하게 단정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을 깊이 이해한 태도라기보다, 인간의 고통을 손쉽게 설명하고 싶어 하는 오래된 사고방식에 가깝다.

십자가에 맞아 죽은 신부의 죽음 앞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신의 분노를 추측하는 것이 아니다. 무엇이 십자가를 떨어뜨렸는지 조사하고, 시설 관리에 문제가 있었다면 바카라임을 묻고, 같은 사고가 반복되지 않도록 예방바카라을 마련해야 한다. 유가족을 위로하고 공동체의 슬픔을 함께 나누는 일도 필요하다.

이것이 신앙과 이성이 만나는 자리다. 신앙이 인간의 존엄과 생명을 소중히 여긴다면 이성적 조사와 안전 관리에 반대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이웃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더 철저하게 현실을 살펴야 한다.

신의 이름을 빌려 인간의 무지를 정당화하지 말자. 신의 뜻을 모른다고 고백하는 것과 신의 뜻을 함부로 지어내는 것은 다르다. 세상의 모든 불행을 신의 계획이라고 설명하는 사람은 겸손한 신앙인이 아니라 자신이 모르는 것을 안다고 착각하는 사람일 수 있다.

가난한 사람의 가난을 신의 뜻이라고 말하기 전에 가난을 만들어 내는 슬롯를 살펴보라. 선량한 사람의 불행을 신의 시련이라고 말하기 전에 그가 겪는 고통을 줄일 방법부터 찾아보라. 성당에서 사람이 죽었다면 신의 분노를 추측하기 전에 왜 사람이 죽었는지부터 밝혀라.

인간의 무지를 신의 뜻으로 포장하는 것은 신앙이 아니다. 그것은 질문을 멈추게 하는 지적 게으름이며, 때로는 불의한 현실을 유지하는 가장 편리한 변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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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서 오래 살면서 종교와 여행과 문화 탐방에 관심을 기울인 결과 지식으로 농사를 짓게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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