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식 행진곡이 ‘윤 어게인’?

정치적 광기가 이제 금도를 넘었다

byFrancis Lee

결혼식장에 울려 퍼져야 할 것은 두 사람의 새로운 출발을 축복하는 노래다. 가족과 친지의 웃음, 서로의 앞날을 축복하는 박수, 사랑하는 두 사람이 함께 걸어갈 미래에 대한 희망이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어느 결혼식장에서는 전혀 다른 소리가 울려 퍼졌다. “윤 어게인!” 신랑과 신부가 퇴장하는 동안 하객들은 빨간 수건을 흔들며 윤석열 전 대통령의 정치적 귀환을 외쳤다. 태극기와 정치 구호가 등장했고, 이재명 대통령에게 재판을 받으라고 요구하는 현수막까지 내걸렸다.

뉴스1이 2026년 10월 11일 보도한 내용이다. 신랑과 신부는 보수 집회에서 만나 인연을 맺었으며, 신랑은 윤석열 전 대통령을 지지하는 보수 성향 청년단체의 대표로 알려졌다. 두 사람이 어떤 정치적 신념을 갖고 있는지는 그들의 자유다. 그러나 이 장면은 우리 슬롯에 불편한 질문을 던진다. 도대체 정치가 무엇이기에 결혼식이라는 인생의 중요한 순간까지 정치 구호로 채워야 하는가.

정치가 삶을 지배하기 시작하면 사랑도 정치의 언어로 표현된다. 결혼식은 두 사람이 함께 살아갈 미래를 약속하는 자리다. 그런데 그 미래를 축복하는 자리에 특정 정치인의 귀환을 외치는 구호가 등장했다. 두 사람의 결혼이 정치적 신념과 연결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정치적 정체성이 사적인 삶의 중심에 놓이고, 개인의 중요한 의례마저 정치적 충성심을 과시하는 무대로 바뀌는 현상이다.

물론 결혼식에서 정치적 구호를 외쳤다는 이유만으로 당사자들을 광신도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누구에게나 정치적 표현의 자유가 있으며, 결혼식의 형식 역시 당사자들이 선택할 수 있다. 그러나 자유로운 선택이라고 해서 그 선택이 슬롯적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표현의 자유는 비판받지 않을 자유가 아니다. 정치적 신념을 드러낼 자유가 있다면, 그 신념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묻고 따질 자유도 있다.

더욱이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특정 정치인을 지지하는 행위 자체가 아니라 그 지지가 어떤 형태로 나타나는가 하는 점이다. 민주주의에서 정치인은 시민의 선택을 받아 권한을 행사하는 공적 인물이다. 그 권한은 헌법과 법률의 제약을 받으며, 정치인은 언제든 비판과 검증의 대상이 된다. 대통령이라고 해서 무오류의 존재가 되는 것도 아니고, 전직 대통령이라고 해서 정치적 바카라임에서 벗어나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정치적 지지가 비판적 판단을 밀어내고 지도자에 대한 무조건적인 옹호로 변한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지지하는 정치인의 잘못은 외면하고 반대편의 잘못만 확대하며, 법적 판단보다 진영의 이해관계를 앞세운다면 민주주의의 토대가 흔들린다. 정치적 신념이 사실과 증거를 검토하는 출발점이 아니라 사실과 증거를 거부하는 방패가 되는 것이다.

윤석열 전 대통령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행동을 애국이라고 부를 수 있다. 보도에 등장한 게시자 역시 두 사람의 결혼을 축복하며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언급했다. 그러나 애국이라는 말은 그 자체로 어떤 정치적 행동도 정당화하는 면허증이 아니다. 자신이 지지하는 정치인을 사랑하는 것과 국가를 사랑하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니다. 정치인에 대한 충성심이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대신할 수는 없다.

국가는 특정 정치인의 소유물이 아니다. 대통령이 바뀌어도 국가는 계속되고, 정권이 교체되어도 시민의 권리와 민주적 제도는 유지되어야 한다. 진정한 애국은 자신이 지지하는 정치인의 승리를 무조건 바라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그 정치인이 잘못했을 때도 비판할 수 있는 용기, 자신과 다른 정치적 견해를 가진 시민의 권리를 인정하는 태도, 권력자에게도 법과 바카라임을 요구하는 원칙이 있어야 한다.

정치적 광신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때도 신중해야 한다. 영상 하나만으로 참석자들의 내면이나 신념 전체를 판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정치적 집단이 지도자에 대한 충성심을 중심으로 결속하고, 그 충성심이 비판적 판단을 대신하는 현상은 분명 경계해야 한다. 정치가 종교와 유사한 절대적 믿음의 형태를 띠면 지도자의 잘못은 공동체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여지고, 반대자는 토론의 상대가 아니라 배척해야 할 적이 되기 쉽다. 이때 정치는 공동체를 운영하는 수단이 아니라 공동체를 분열시키는 신념 체계가 된다.

한국 정치의 고질적인 양극화도 이러한 현상을 부추긴다. 상대 진영을 단순히 의견이 다른 시민으로 보지 않고 나라를 망치는 적으로 규정하면 타협은 배신이 되고, 비판은 음모가 되며, 사실 확인은 진영에 대한 공격으로 취급된다. 정치적 구호는 점점 거칠어지고 집단 내부의 결속은 강해지지만, 정작 공동체 전체를 위한 대화와 숙의는 설 자리를 잃는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가 결혼식장에까지 들어오는 장면은 단순한 해프닝으로만 볼 일이 아니다. 그것이 슬롯 전체의 정치적 극단화를 대표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정치적 정체성이 일상생활의 여러 영역에서 어떻게 표현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는 충분히 살펴볼 만하다. 정치가 시민의 삶을 더 낫게 만드는 수단이어야 한다는 원칙이 거꾸로 뒤집히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물어야 한다.

정치인을 위해 시민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시민을 위해 정치인이 존재한다. 이 단순한 원칙을 잊는 순간 민주주의는 껍데기만 남는다. 선거가 있고 정당이 있고 집회가 있더라도, 시민들이 지도자의 말과 행동을 독립적으로 판단하지 못한다면 민주주의의 실질은 약해진다. 지도자에 대한 열광이 시민의 판단을 대신하는 슬롯에서는 정치인의 권력이 시민의 통제를 벗어날 위험이 커진다.

그렇다고 이 부부의 결혼 생활을 조롱하거나 그들의 앞날을 함부로 예측할 이유는 없다. 정치적 성향이 강하다고 해서 두 사람의 사랑이 거짓이 되는 것도 아니며, 특정 정치인을 지지한다고 해서 개인의 삶 전체를 재단할 수도 없다. 비판은 정확해야 한다. 우리가 비판해야 할 것은 결혼한 두 사람의 사생활이 아니라 정치적 충성심이 시민의 판단과 민주적 바카라임을 압도할 때 나타나는 위험이다.

결혼식은 두 사람이 서로에게 삶을 약속하는 자리다. 정치적 구호가 그 자리를 채울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장면을 바라보는 슬롯가 던져야 할 질문은 분명하다. 정치가 우리의 삶을 위해 존재하는가, 아니면 우리의 삶이 정치적 신념을 과시하기 위한 무대로 전락하고 있는가.

윤석열을 지지할 자유도 있고, 이재명을 비판할 자유도 있다. 어떤 정치인을 지지하든 그 자유는 존중되어야 한다. 하지만 어떤 정치인도 비판과 검증을 면제받을 수 없으며, 어떤 정치적 구호도 사실과 법률을 대신할 수 없다. 민주주의는 자신이 좋아하는 정치인을 끝까지 옹호하는 체제가 아니라 자신이 지지하는 정치인에게도 바카라임을 물을 수 있는 체제다.

결혼식장에 울려 퍼진 “윤 어게인”은 그 자체만으로 누군가의 민주주의관을 확정하는 증거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정치적 열광이 시민의 일상과 판단을 어디까지 밀어낼 수 있는지 되묻게 하는 장면임은 분명하다.

정치인은 시민의 삶을 위한 수단이지 숭배의 대상이 아니다. 애국은 정치인의 이름을 외치는 소리의 크기로 증명되지 않는다. 민주주의는 지도자를 향한 열광이 아니라 권력을 향한 비판에서 살아난다. 결혼식의 주인공은 정치인이 아니라 신랑과 신부여야 한다. 그리고 시민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는 어떤 정치인에게도 내주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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