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정치에서 더 이상 영원한 우방은 없다
국제정치에서 동맹은 영원하지 않다. 공동의 가치와 안보를 내세우던 국가들도 자국의 이익 앞에서는 언제든 등을 돌릴 수 있다. 그러나 동맹의 변화가 불가피하다는 사실과 강대국이 약소국의 생존을 거래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러시아산 경유 공급 합의와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향한 발언은 바로 이 문제를 정면으로 드러낸다.
트럼프는 푸틴과 러시아산 경유 480만 톤을 미국과 세계 시장에 공급하기로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중동 전쟁으로 치솟은 연료 가격을 낮추기 위해 러시아산 경유에 대한 제재를 한시적으로 완화하겠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동안 미국이 무엇을 명분으로 러시아를 제재해 왔느냐는 데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규탄하고, 전쟁 자금줄을 차단하며, 침략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는 것이 미국을 비롯한 서방의 공식적인 정바카라이었다.
그런데 미국의 국내 유류 가격이 부담스러워지자 그 원칙은 얼마나 쉽게 흔들리는가. 러시아의 전쟁 수행 능력을 약화하겠다던 미국이 이제 러시아산 경유를 공급받겠다고 나섰다. 불과 얼마 전까지 적대국이었던 러시아가 미국 소비자의 기름값을 낮추기 위한 거래 상대가 된 것이다.
물론 외교에서 적대국과 거래하는 것 자체가 잘못은 아니다. 적국과도 협상해야 하고, 경제적 이해관계를 활용해 전쟁을 끝낼 수도 있다. 제재 역시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평화와 안보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다. 그러나 제재를 완화하려면 그에 상응하는 전략적 성과가 있어야 한다. 러시아의 공격 중단, 실질적인 휴전, 검증 가능한 평화협정 같은 결과가 뒤따라야 한다.
그런데 이번 거래에서 미국이 확실하게 얻으려는 것은 무엇인가. 연료 가격을 낮추겠다는 목표는 분명하다. 하지만 러시아산 경유 공급이 미국의 가격을 얼마나 낮출 수 있을지는 불확실하다. 국제 유가는 중동 정세와 원유 공급, 정유시설 가동률, 운송비 등 여러 요인에 따라 움직인다. 공급 물량을 추가한다고 해서 가격이 그만큼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반면 러시아는 에너지 판매를 통해 수입을 확보할 기회를 얻는다. 미국이 기대하는 경제적 효과는 불확실한데, 러시아가 얻을 수 있는 경제적 이익은 거래의 구조상 분명히 존재한다.
더욱 주목해야 할 것은 트럼프가 이 거래를 비판한 젤렌스키에게 바카라임을 돌렸다는 사실이다. 그는 젤렌스키가 자신의 만류에도 러시아 정유시설을 공격해 전 세계적인 경유 부족을 초래했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젤렌스키가 여러 차례 전쟁을 끝낼 기회를 거부했다면서 우크라이나에 새로운 대통령이 필요하다고까지 말했다.
이것은 단순한 외교적 설전이 아니다. 미국이 자신의 정바카라에 반대하는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공개적으로 압박하고, 심지어 지도자 교체의 필요성까지 거론했다는 점에서 심각한 정치적 함의를 갖는다.
우크라이나의 군사작전은 비판과 검증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러시아 정유시설에 대한 공격이 국제 에너지 시장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도 따져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것이 미국의 경유 가격 상승을 젤렌스키의 바카라임으로 돌릴 근거가 되지는 않는다. 중동 전쟁과 국제 공급망의 불안정 등 복합적인 원인을 무시한 채 가격 상승의 바카라임을 한 사람에게 전가하는 것은 정치적 주장이지, 충분히 입증된 경제적 분석이 아니다.
무엇보다 러시아의 침공으로 전쟁이 시작됐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전쟁을 끝내는 것은 필요하다. 그러나 전쟁을 끝내야 한다는 당위가 우크라이나에 일방적인 양보를 강요할 권리를 미국에 부여하지는 않는다. 평화협상이란 방어국이 강대국의 요구를 무조건 수용하는 절차가 아니다. 영토와 주권, 안전보장, 휴전 이후의 재침략 방지까지 포함해 지속 가능한 합의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어야 한다.
트럼프의 발언에서 특히 우려스러운 대목은 우크라이나에 새로운 대통령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우크라이나의 대통령을 선출할 권리는 우크라이나 국민에게 있다. 미국 대통령이 협상하기 편한 지도자를 원한다고 해서 다른 나라의 정치적 선택을 좌우할 정당성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동맹국의 지도자가 미국의 요구에 순응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 교체를 공개적으로 거론한다면, 동맹은 공동의 가치와 상호 존중이 아니라 강대국의 요구에 대한 복종으로 변질될 수 있다.
더구나 이 발언이 나온 시점은 미국의 중간선거를 불과 몇 주 앞둔 때다. 치솟는 연료 가격은 미국 유권자의 생활비와 직결된다. 경유 가격은 화물 운송과 농업, 식료품 가격에도 영향을 미친다. 트럼프에게 연료 가격 안정은 외교적 성과인 동시에 국내 정치적 부담을 줄일 수 있는 과제다. 따라서 이번 거래를 평가할 때 미국의 경제적 필요와 국내 정치적 이해관계를 함께 살펴야 한다.
다만 선거를 앞두고 거래가 추진됐다는 사실만으로 트럼프의 유일한 목적이 선거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실제로 에너지 공급 부족을 완화하려는 정바카라적 동기도 있을 수 있다. 문제는 그러한 국내적 목표를 달성하는 과정에서 미국이 그동안 내세웠던 국제적 원칙과 동맹국의 안보를 얼마나 고려했느냐는 것이다.
이 사건은 유럽에도 불편한 질문을 던진다. 유럽 국가들은 러시아의 침공 이후 우크라이나를 지원하고 러시아에 대한 압박을 유지해 왔다. 그런데 미국이 자국의 경제적 필요에 따라 러시아와 별도의 거래를 추진하고 제재를 완화한다면, 유럽은 미국의 대러시아 정바카라을 어디까지 신뢰할 수 있겠는가. 미국과 유럽이 러시아를 상대로 서로 다른 정바카라을 추구할 경우, 서방의 공조는 약해지고 러시아는 그 틈에서 외교적 공간을 확보할 수 있다.
그렇다고 미국과 유럽의 모든 정바카라 차이를 동맹의 붕괴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 동맹국 사이에도 이해관계의 차이는 존재한다. 그러나 동맹의 신뢰는 선언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공동의 안보 목표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서로의 핵심 이익을 존중하고, 정바카라을 바꿀 때 그 이유와 조건을 설명하며, 합의한 원칙을 일관되게 지키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여기서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우리는 미국과의 동맹이 한국의 안보에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다. 동시에 강대국의 외교정바카라이 언제나 동맹국의 이익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도 냉정하게 인식해야 한다. 미국이 자국의 유류 가격을 낮추기 위해 러시아와 거래할 수 있다면, 다른 사안에서도 미국은 자국의 경제적·전략적 이익에 따라 정바카라을 조정할 수 있다. 동맹이라는 이름만으로 상대국의 선택이 언제나 우리에게 유리할 것이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국제정치에서 영원한 우방은 없다. 영원한 적도 없다. 국가들은 상황에 따라 협력하고 경쟁하며, 때로는 어제의 적과 손을 잡는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중요한 것은 국가 간 관계를 무조건적인 우정으로 이해하지 않는 현실주의와, 힘의 논리만으로 모든 것을 정당화하지 않는 원칙의 균형이다.
트럼프의 러시아산 경유 거래가 실제로 미국의 연료 가격을 얼마나 낮출지는 앞으로 검증해야 한다. 이 거래가 전쟁 종식에 기여할 수 있는지도 아직 단정할 수 없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경제적 거래를 위해 제재를 완화하면서 그 비용을 우크라이나에 일방적으로 부담시키거나, 협상에 불편한 지도자의 교체까지 거론한다면 평화라는 명분은 설득력을 잃게 된다.
미국이 진정으로 전쟁을 끝내려 한다면 필요한 것은 젤렌스키를 몰아내라는 압박이 아니라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지속 가능한 합의에 도달하도록 만드는 실질적인 외교다. 러시아의 침공 바카라임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 우크라이나의 주권을 어떻게 보장할 것인지, 휴전 이후 전쟁이 재발하지 않도록 어떤 장치를 마련할 것인지에 대한 답이 있어야 한다.
동맹은 영원하지 않다. 그러나 그렇다고 원칙까지 매번 거래의 대상으로 삼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강대국의 이익이 바뀔 때마다 약소국의 운명이 흔들리고, 선거가 다가올 때마다 국제적 약속이 뒤집힌다면 국제질서는 힘센 자의 편의에 따라 움직이는 시장으로 전락한다.
국제정치에서 신뢰는 선언이 아니라 행동으로 증명된다. 미국이 러시아와 거래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 거래가 미국의 단기적 이익을 위해 우크라이나의 주권과 유럽의 안보를 희생하는 방식이어서는 안 된다. 평화를 말하려면 거래의 이익뿐 아니라 그 비용도 정직하게 따져야 한다. 그리고 동맹을 말하려면 상대가 순종할 때만이 아니라 서로의 이해가 충돌할 때에도 지켜야 할 원칙이 무엇인지 분명히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