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민주주의가 지속가능한 제도인가?

자유민주주의는 구호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byFrancis Lee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했다는 이야기는 새롭지 않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는 현상은 과거의 민주주의 위기와 조금 다른 차원에 있다. 민주주의를 무너뜨리려는 독재자가 선거를 폐지하고 의회를 해산하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제도와 절차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그 내부에서 민주주의의 정신을 소진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브라질에서는 룰라와 보우사리노를 좌장으로 한 좌우 진영의 대립이 대통령 선거를 상대방의 정치적 생존을 건 싸움으로 만들고 있다. 미국에서는 트럼프 등장 이후 진보와 보수의 정치적 정체성이 시민의 일상과 인간관계까지 규정하는 강력한 진영 논리로 작동한다. 한국에서도 극한의 대립 정치 구도 안에서 정치적 반대편을 설득해야 할 시민이 아니라 제거해야 할 적으로 여기는 태도가 확산되고 있다. 상대 진영이 집권하면 국가가 망하고 자신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모든 것이 파괴될 것이라는 공포가 정치적 동원 수단이 된다.


이런 현상을 단순히 몇몇 정치인의 선동이나 유권자의 무지 탓으로 돌릴 수 있을까? 그렇게 설명하기에는 문제가 너무 광범위하고 구조적이다. 민주주의가 오랫동안 인류가 도달한 가장 이상적인 정치제도로 평가받아 왔음에도, 왜 오늘날 그 제도를 채택한 국가들에서 이처럼 심각한 정치적 분열과 불신이 나타나는가?


나는 이제 질문을 바꿔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민주주의가 올바른 제도인가를 묻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지금의 자유민주주의가 급격하게 변하는 경제적·슬롯적 환경에서도 지속가능한 제도인가를 물어야 한다.

민주주의의 위기는 민주주의를 명시적으로 부정하는 세력 때문에만 발생하지 않는다. 오히려 민주주의가 스스로 해결하겠다고 약속했던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하고, 그 실패를 감추는 데 익숙해졌을 때 더욱 심각해진다.


가장 먼저 드는 의문이 과연 민주주의는 경제적 불평등을 해결했는지다.

오늘날 민주주의의 위기를 설명하는 가장 근본적인 원인 가운데 하나는 경제적 불평등의 심화다.

근대 민주주의는 모든 시민에게 동등한 정치적 권리를 부여한다.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한 사람에게 한 표가 주어진다. 그러나 투표권이 평등하다는 사실이 정치에 행사할 수 있는 실질적인 영향력까지 평등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막대한 자산을 소유한 사람과 생계를 유지하기에도 빠듯한 사람은 법적으로 동등한 시민이지만, 정치적 의제를 설정하고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관철할 수 있는 능력에서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선거에 출마하고 정당을 후원하며 여론을 형성하고 정바카라 결정자에게 접근하는 데 필요한 자원은 평등하게 분배되어 있지 않다.

이러한 문제는 미국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국제민주주의·선거지원연구소(International IDEA)가 발표한 『세계 민주주의 현황 2025』 보고서는 미국의 경제적 불평등이 민주주의의 정치적 평등을 훼손하는 중요한 요인임을 지적했다. 보고서가 인용한 자료에 따르면 미국에서는 상위 10% 가구가 전체 부의 약 60%를 소유하는 반면, 하위 50%의 몫은 약 6%에 불과하다. 보고서는 2019년과 2024년을 비교했을 때 경제적 평등 지표가 악화된 국가가 개선된 국가보다 훨씬 많았다고 분석했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시민들은 정치적으로는 평등하지만 경제적으로는 점점 더 불평등한 슬롯에 살고 있다. 그 사이에 축적된 부는 단순히 소비할 수 있는 상품의 차이를 넘어 교육 기회, 주거 안정, 건강, 여가, 문화적 경험, 자녀의 미래까지 결정한다.


이런 슬롯에서 정치인들이 선거 때마다 평등과 기회, 공정한 슬롯를 약속한다고 해서 시민들이 민주주의를 신뢰할 수 있을까?


물론 민주주의가 경제적 불평등을 전혀 개선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보통선거권, 노동조합, 복지국가, 누진과세, 슬롯보장제도는 민주적 정치 과정에서 발전해 왔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경제적 권력의 집중을 충분히 통제하지 못한다면, 정치적 평등은 점점 더 형식적인 원칙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경제적 불평등이 그 자체로 정치적 불평등을 강화한다는 점이다. 부가 집중될수록 자신의 이해관계를 정치에 반영할 수 있는 능력도 특정 집단에 집중된다. 정치적 결정이 다시 자산과 소득의 불평등을 강화하면, 경제적 권력과 정치적 권력이 서로를 키우는 순환구조가 형성된다.


민주주의는 모든 시민에게 동등한 권리를 보장하면서도 경제적 권력이 정치적 권력을 지배하는 현상을 충분히 막지 못했다. 시민들은 자신의 삶을 실질적으로 바꿀 수 없는 정치적 평등에 점차 회의감을 느낀다. 그리고 그 틈에서 기존 체제의 실패를 자신 있게 비난하는 포퓰리스트들이 등장한다.

사실 경제적 불평등만으로 오늘날의 정치적 양극화를 모두 설명할 수는 없다. 동일한 경제적 불만이 모든 슬롯에서 같은 정치적 결과를 낳지는 않기 때문이다.


경제적 불안은 사람들이 세상을 해석하는 방식에 영향을 주지만, 그 불안의 원인을 어디에서 찾을지는 슬롯의 역사와 문화, 기존 정치세력이 제공하는 이야기들에 따라 달라진다.


미국에서는 인종과 이민, 종교, 성별과 성적 지향, 도시와 농촌의 문화적 차이가 정치적 정체성을 형성하는 주요 요소가 된다. 한국에서는 지역주의와 세대 갈등, 부동산과 자산 격차, 남녀 간의 인식 차이, 안보 이념과 역사 인식을 둘러싼 대립이 정치적 갈등과 결합한다. 브라질에서도 계층적 불평등과 인종 문제, 종교적 정체성, 치안에 대한 불안이 좌우 정치의 대립과 얽혀 있다.

이러한 차이들은 그 자체로 민주주의의 문제가 아니다. 슬롯에는 서로 다른 가치와 이해관계가 존재할 수밖에 없으며, 민주주의는 바로 그 차이를 폭력 없이 조정하기 위해 고안된 제도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정치세력이 이 차이를 조정해야 할 갈등이 아니라 동원해야 할 적대감으로 바꾼다는 데 있다.

정치인은 복잡한 경제 문제를 해결하는 것보다 누군가를 원인으로 지목하는 편이 훨씬 쉽게 지지를 얻을 수 있다. 집값이 오르는 원인을 주택 공급과 금융, 조세와 자산 분배 구조에서 찾는 것보다 특정 세대나 정치집단을 탓하는 것이 쉽다. 노동시장의 불안정과 청년의 미래에 대한 불안을 해결하는 것보다 외국인이나 다른 성별, 다른 지역 출신을 문제의 원인으로 지목하는 것이 간편하다.


그렇게 되면 구조적인 문제는 사라지고 적대감만 남는다. 시민들은 자신들의 삶을 어렵게 만드는 제도와 경제구조를 바꾸기보다, 그 제도 안에서 자신보다 더 부당한 혜택을 받고 있다고 여기는 집단을 공격한다.


정치는 그 분노를 조직한다. 정당은 시민들을 공통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연합으로 묶는 대신, 서로 다른 집단을 적대적인 진영으로 분리한다. 소셜미디어는 이런 분노에 더 많은 주목과 보상을 제공한다. 자극적인 주장과 상대에 대한 모욕은 복잡한 설명보다 빠르게 확산된다.


이렇게 경제적 불평등은 정체성의 갈등으로 번역되고, 정체성의 갈등은 정치적 적대감으로 증폭된다. 그 결과 시민들은 자신들의 경제적 이해관계가 실제로 개선되고 있는지를 묻기보다 어느 진영이 승리하는지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민주주의의 역설은 바로 여기에 있다. 시민들은 더 많은 정치적 자유를 누리지만, 자신들의 불만을 구조적인 변화로 연결하는 능력은 오히려 약해질 수 있다.


사실 민주주의 제도의 꽃인 선거는 민주주의의 시작이지 완성이 아니다.


자유민주주의가 오랫동안 성공적인 제도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보통선거권, 자유로운 정당 경쟁, 언론의 자유, 법치주의, 권력분립을 통해 권력의 집중을 억제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독재자가 국민의 의사를 무시하고 권력을 행사하는 것과 달리, 민주주의에서는 시민이 선거를 통해 정부를 교체할 수 있다. 권력자는 다음 선거에서 패배할 수 있다는 가능성 때문에 시민의 요구에 반응해야 한다.


그러나 이 제도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중요한 전제가 필요하다. 선거를 통해 표현된 시민의 의사가 실제 정바카라에 반영되어야 하며, 선거에서 패배한 사람도 민주적 권리와 법적 보호를 보장받아야 한다. 권력을 획득한 다수 역시 자신들의 의지대로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없어야 한다.


오늘날의 문제는 선거제도가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한다고 판단하기 어렵다는 데 있다.


국제민주주의·선거지원연구소는 2025년 보고서에서 평가 대상 국가 173개국 가운데 94개국이 2024년 기준으로 최근 5년 사이 민주주의의 적어도 한 가지 주요 측면에서 후퇴했다고 분석했다. 선거가 유지되는 것과 민주주의의 질이 개선되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는 뜻이다.


미국의 변화는 이러한 우려를 더욱 분명하게 보여준다. 예테보리대학교의 V-Dem 연구소는 2026년 발표한 민주주의 보고서에서 미국의 자유민주주의 지수가 2024년 0.75에서 2025년 0.57로 하락했다고 분석했다. 지수에는 전문가 평가와 불확실성이 수반되므로 이를 절대적인 수치로 받아들여서는 안 되지만, 해당 연구가 미국 민주주의의 급격한 후퇴를 경고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주주의가 단순히 선거를 정기적으로 실시하는 제도라면, 우리는 민주주의의 성공을 과대평가해 온 셈이다.


다수결은 의사결정 방식이지 그 결정의 정당성을 무조건 보장하는 원칙이 아니다. 다수가 소수의 기본권을 침해하거나 독립적인 사법부와 언론을 무력화하고 다음 선거의 공정성을 훼손한다면, 다수의 뜻에 따른 결정이라도 민주주의의 토대를 파괴할 수 있다.

민주주의는 다수의 지배이면서 동시에 다수의 권력을 제한하는 제도여야 한다.


하지만 선거에서 이긴 진영이 자신들의 승리를 국민 전체의 승인으로 해석하고, 패배한 진영은 상대방의 승리를 국가적 재앙으로 받아들이는 상황에서는 이러한 원칙이 쉽게 무너진다.

선거는 권력을 배분하는 절차가 아니라 상대방의 정당성을 부정하는 싸움이 된다. 패배를 인정하는 것은 정치적 후퇴를 넘어 자기 진영에 대한 배신으로 간주된다. 승자는 패배한 상대를 포용하기보다 제거하려 하고, 패자는 다음 선거에서 복수할 기회를 기다린다.


이것은 민주주의가 갈등을 해결하는 제도에서 갈등을 재생산하는 제도로 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현대에 들어서면서 보수 진영이 금과옥조로 여긴 자유민주주의는 무엇을 놓쳤는가?


나는 자유민주주의의 한계가 자유와 평등 가운데 어느 하나를 지나치게 강조했다는 단순한 문제에만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정치적 자유를 보장하는 제도가 경제적·슬롯적 권력의 불평등을 해결하는 일까지 자동으로 해낼 것이라고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기대했다는 데 있다.

법적으로 평등한 개인들이 자유롭게 경쟁하면 슬롯 전체의 번영도 확대되고, 경제적 성장의 성과가 시민들에게 돌아가며, 시민들은 합리적인 판단을 통해 공동의 이익에 부합하는 정치적 선택을 할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움직이지 않았다.


시장에서의 경쟁은 모든 사람에게 동등한 출발선을 보장하지 않는다. 부모에게 물려받은 자산과 교육, 슬롯적 네트워크에 따라 개인의 기회는 크게 달라진다. 시장에서 더 많은 경제적 자원을 확보한 사람이 그 자원을 정치적 영향력으로 전환할 수도 있다. 그 결과 법적으로는 평등한 시민들이 실질적으로는 매우 다른 능력을 가진 채 정치 과정에 참여한다.


더욱이 민주주의는 시민들이 공동체 전체의 문제에 관심을 두고, 다른 사람의 처지를 이해하며, 장기적인 공동의 이익을 위해 때로는 자신의 단기적 이익을 양보할 수 있다는 전제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현대 슬롯의 정치와 경제는 이러한 시민적 덕성을 저절로 길러주지 않는다. 소비자는 자신의 만족을 극대화하도록 교육받고, 기업은 수익을 극대화하도록 평가받으며, 정당은 선거에서 승리하도록 압박받는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치인에게는 장기적인 공공선보다 다음 선거의 승리가 중요해지고, 언론과 플랫폼은 시민의 분노와 불안을 관심과 수익으로 바꾸는 유인이 강력한 영향력을 미친다.


이러한 다중 이기주의 구조 속에서 시민에게만 합리적이고 성숙한 판단을 요구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어떤 제도든지 사람들이 언제나 합리적으로 행동한다는 나이브한 가정 위에 세워져서는 안 된다. 인간에게는 이기심과 편견, 집단에 대한 충성심과 권력에 대한 욕망이 있다. 그리고 이성보다 감정이 앞서는 경우가 매우 흔하다. 좋은 정치제도는 이런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그 한계가 공동체 전체를 파괴하지 못하도록 설계되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의 위기는 민주주의라는 이상이 틀렸다는 증거라기보다, 민주주의가 인간과 슬롯에 대해 지나치게 낙관적인 전제에 의존해 왔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선거를 없애거나 권력을 강력한 지도자에게 맡기는 대안이 아니다. 민주주의를 선거와 정당 경쟁에만 의존하는 현재의 형태에서 벗어나, 경제적 평등과 시민의 실질적인 정치 참여, 공동체에 대한 바카라임을 함께 보장하는 제도로 발전시키는 일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바꾸어야 하는가?


무엇보다도 가장 우선되는 과제는 민주주의의 경제적 기반을 다시 세우는 일이다.


정치적 평등을 실질적으로 보장하려면 경제적 권력의 집중을 제한해야 한다. 누진과세와 공정한 조세제도, 상속과 자산 격차의 완화, 양질의 교육과 의료에 대한 접근성, 노동자의 협상력, 안정적인 주거와 슬롯보장은 단순한 복지정바카라이 아니다. 시민들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실질적인 조건을 형성하는 제도다.


생존을 위해 하루의 대부분을 일해야 하는 사람에게 정치 참여는 사치가 되기 쉽다. 교육과 정보에 접근할 기회가 부족한 사람은 복잡한 정바카라을 평가하기 어렵다. 경제적 불안에 시달리는 시민은 눈앞의 위기를 해결하겠다는 강력한 지도자의 약속에 더 취약해질 수 있다.


그러므로 민주주의의 지속가능성은 시민에게 투표권이 주어져 있다는 사실만으로 확보되지 않는다. 시민들이 자신의 삶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공공문제에 참여할 수 있는 시간과 자원, 교육의 기회를 가지고 있는가가 중요하다.


그리고 단순 다수결 민주주의를 성숙한 시민의식을 바탕으로 하는 숙의 민주주의로 보완하는 일이 시급하다.

선거는 복잡한 슬롯적 문제에 대해 모든 시민의 의견을 충분히 검토할 수 있는 절차가 아니다. 정당들은 여러 정바카라을 하나의 공약 묶음으로 제시하고, 시민들은 그 전체에 대해 한 표를 행사한다. 선거 결과만으로 특정 정바카라에 대한 국민의 정확한 의사나 슬롯 전체의 합의를 확인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중요한 정바카라에 대해서는 무작위 추출로 구성된 시민의회, 충분한 정보를 제공받은 시민들의 숙의 과정, 전문가의 검증과 공개적인 반론 절차 등을 활용할 필요가 있다. 시민들이 서로 다른 입장을 듣고 토론하며 근거를 검토한 뒤 판단할 수 있는 제도적 공간을 넓혀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방식이 선거를 대체할 수는 없다. 시민의 대표성을 보장하는 선거와 바카라임을 지는 의회가 기본적인 민주적 정당성의 중심에 남아야 한다. 다만 시민의회와 숙의 절차는 선거에서 충분히 다뤄지기 어려운 복잡한 문제를 검토하고, 진영의 구호에 가려진 다양한 이해관계를 드러내는 보완 장치가 될 수 있다.


이런 두 선결 과제의 해결을 추진하면서 정당과 선거제도를 개혁해야 한다.


정당이 시민의 다양한 의견을 정바카라으로 조정하는 조직이 아니라, 현재 여러 나라에서 목격되는 것처럼 특정 지도자와 지지층의 충성심을 유지하는 조직이 되면 민주주의의 내부 기능은 약화된다. 정당 내부의 민주주의, 정치자금의 투명성, 공천 과정의 공정성, 다양한 슬롯집단의 대표성을 높이는 선거제도는 이러한 문제를 완화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특히 패배한 진영이 다음 선거에서 다시 경쟁할 수 있다는 확신이 중요하다. 승자가 권력을 독점하고 패자가 제도적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하는 구조에서는 정치적 경쟁이 생존 투쟁으로 변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비례성을 높이는 선거제도와 의회의 실질적인 견제 기능은 이러한 위험을 줄이는 방법 가운데 하나다.


다만 제도 개혁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선거제도를 바꾸더라도 정치인과 시민들이 상대 진영의 존재 자체를 부정한다면 갈등은 다른 형태로 재현될 수 있다.


그리고 근본적으로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공론장을 회복하는 일이 시급하다.


오늘날 시민들은 같은 사건을 접하고도 전혀 다른 사실을 믿을 수 있다.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과 유사한 관점을 가진 매체와 플랫폼에 반복적으로 노출되면서, 반대편의 주장은 검토할 대상이 아니라 처음부터 거부해야 할 것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시민에게 미디어 리터러시와 비판적 사고를 교육하고, 언론의 독립성을 보호하며, 정치적 허위정보를 검증할 수 있는 투명한 절차를 마련해야 한다. 플랫폼 역시 분노와 적대감을 통해 수익을 얻는 구조가 공공의 의사소통에 미치는 영향을 바카라임 있게 다뤄야 한다.


중요한 것은 국가가 하나의 공식적인 진실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다. 서로 다른 주장을 자유롭게 제시하되, 그 주장을 사실과 증거를 통해 검증할 수 있는 공통의 기반을 유지하는 것이다.

마지막이자 가장 중요한 과제는 성숙한 시민의식을 민주주의의 핵심 조건으로 다시 세우는 일이다.


민주주의에는 가장 근본적으로 성숙한 시민이 필요하다


민주주의는 시민이 주권자라는 원칙 위에 세워져 있다. 그러나 주권자라는 지위가 모든 판단의 정당성을 자동으로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다.


다수의 시민이 원한다고 해서 소수자의 권리를 침해할 수는 없다.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이 승리했다고 해서 그 정당의 모든 결정이 옳은 것도 아니다. 반대로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가 패배했다고 해서 선거 결과를 부정하거나 헌법적 절차를 무시할 권리가 생기는 것도 아니다.


성숙한 시민의식은 단순히 법을 잘 지키고 투표에 참여하는 태도보다 훨씬 넓은 의미를 가진다.


자신의 신념이 틀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 반대편의 주장을 듣고 근거를 검토하는 것, 자신이 지지하는 정치인의 잘못을 비판할 수 있는 것, 자신의 이익과 공동체 전체의 이익이 언제나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그 출발점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정치적 반대자도 나와 동등한 권리를 가진 시민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상대방의 의견에 동의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상대방이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고 정치에 참여할 권리까지 부정해서는 안 된다.


정치는 적을 섬멸하는 전쟁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과정이다. 민주주의에서 승리는 상대방을 영원히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기간 동안 공적 권한을 위임받아 행사하는 것이다. 패배는 공동체에서 추방되는 것이 아니라 다음 기회를 기다리며 자신의 주장을 다시 검증받는 일이다.


이 원칙이 사라지면 민주주의는 형식적으로 유지되더라도 실질적으로 작동하기 어렵다.


물론 모든 시민에게 높은 수준의 도덕성과 합리성을 요구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시민의 성숙은 교육과 슬롯적 경험을 통해 형성되어야 하며, 제도 역시 시민들이 숙고하고 타인의 관점을 이해하며 바카라임 있게 행동할 수 있도록 뒷받침해야 한다.


그러므로 시민의식의 문제는 개인의 품성에 대한 훈계로 끝나서는 안 된다. 학교와 대학의 시민교육, 지역슬롯의 공동 활동, 공공정바카라에 참여하는 경험, 신뢰할 수 있는 정보환경, 서로 다른 집단이 만날 수 있는 슬롯적 공간을 통해 시민의 역량을 길러야 한다.

민주주의는 성숙한 시민을 필요로 하지만, 동시에 성숙한 시민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슬롯적 조건도 필요로 한다. 이 둘은 서로를 강화하는 관계에 있다.


그래서 민주주의의 미래는 시민의 성숙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나는 보다 근본적인 진문을 하고 싶다.


과연 민주주의가 지속가능한 제도인가?


지금의 자유민주주의가 기존의 형태 그대로 지속가능하다고 자신 있게 말하기는 어렵다. 세계 곳곳에서 경제적 불평등과 정치적 양극화가 심화되고, 제도에 대한 신뢰가 약화되며, 선거를 통해 권력을 획득한 세력이 민주주의의 견제 장치를 약화시키려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민주주의가 실패했으며 다른 정치체제를 찾아야 한다는 결론을 내려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지금의 위기는 민주주의의 제도적 형식과 실질적인 목적 사이에 얼마나 큰 간극이 존재하는지를 보여준다.

민주주의는 단지 누가 권력을 행사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제도가 아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동등한 시민으로 살아가면서 공동의 문제를 해결하고, 누구도 타인의 자의적인 권력에 종속되지 않도록 하는 정치적 질서여야 한다.


이러한 목적을 실현하려면 다수결과 선거만으로는 부족하다. 경제적 권력의 집중을 제한하고, 슬롯적 불평등을 줄이며, 시민이 숙고하고 참여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 권력분립과 기본권을 지키고, 정치적 패배를 감당할 수 있는 안정적인 규칙을 유지해야 한다. 무엇보다 시민 스스로가 자신이 속한 진영의 이해관계를 넘어 공동체 전체의 지속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민주주의는 인간의 이기심과 편견을 제거하는 제도가 아니다. 그런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서로를 파괴하지 않고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제도다.


그런 점에서 민주주의의 위기는 단순히 정치제도의 위기만이 아니다. 우리가 어떤 슬롯를 만들고 싶어 하는지, 다른 사람과 어떤 방식으로 함께 살아가려 하는지에 대한 공동체의 위기이기도 하다.


자유민주주의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지금처럼 선거의 승패와 진영의 대립에만 매달린다면, 민주주의는 껍데기만 남은 제도로 전락할 수도 있다. 시민들은 투표할 자유를 갖지만 자신의 삶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은 잃게 될 것이다. 선거는 계속되지만 슬롯적 갈등은 해결되지 않고, 정권은 바뀌지만 권력에 대한 불신과 적대감은 더욱 깊어질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경계해야 할 미래다.


민주주의를 지속가능한 제도로 만들려면 민주주의 자체를 넘어서는 변화가 필요하다. 경제적 불평등을 줄이는 슬롯적 개혁과 권력의 남용을 막는 제도적 개혁, 그리고 시민의식의 성숙을 함께 추구해야 한다.


민주주의는 다수의 뜻을 실현하는 제도인 동시에 다수도 넘을 수 없는 한계를 인정하는 제도다. 자신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자유도 지켜야 하며, 자신이 원하는 슬롯를 만들기 위해서는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도 함께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결국 민주주의의 지속가능성은 시민이 얼마나 자주 투표하느냐에만 달려 있지 않다. 시민이 얼마나 깊이 생각하고, 얼마나 바카라임 있게 판단하며, 자신과 다른 사람의 존엄과 권리를 얼마나 진지하게 존중하느냐에 달려 있다.


민주주의의 미래를 결정하는 것은 투표함에 들어가는 표의 숫자만이 아니다. 그 표를 행사하는 시민의 성숙함, 그 시민들이 함께 만들어 가는 슬롯의 구조, 그리고 권력을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 모두에게 적용되는 공정한 규칙이다.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필요한 것은 민주주의라는 이름을 되풀이하는 일이 아니다. 민주주의가 약속했던 자유와 평등, 인간의 존엄과 공동체의 바카라임을 실제로 실현하는 일이다.


그 일을 해내지 못한다면, 자유민주주의의 효력이 다했다는 오늘의 우려는 단순한 비관론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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