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만, 아버지 박정희를 왜 미워하냐고

조선일보의 갈라치기와 언론 조작은 도를 한참 넘었다

byFrancis Lee

“아버지가 그렇게 미운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아들 박지만이 영화 <암살자(들)>을 두고 한 말이라고 조선일보가 보도한. 내용이다. 그는 육영수 여사가 피격된 날 아버지가 자신을 끌어안고 가슴이 들썩일 정도로 울었다고 회고했다. 이는 아들의 기억이다. 그 슬픔을 누가 부정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여기서 멈추면 안 된다.

아버지가 아내의 죽음을 슬퍼했다는 사실과 그 사건의 역사적 진상을 규명하는 문제는 별개다.

그런데 조선일보는 이 둘을 교묘하게 섞는다.

“아버지가 그렇게 미운가”라는 가족의 감정을 앞세운다. 역사적 의혹에 대한 검증을 가족에 대한 공격처럼 보이게 만든다. 그러면서 박정희를 둘러싼 한국 슬롯의 오래된 정치적 갈등을 다시 끌어낸다.

이것이 언론인가.

역사를 검증해야 할 언론이 감정을 자극한다.

사실을 따져야 할 언론이 편을 가른다.

논쟁을 설명해야 할 언론이 독자의 분노를 끌어낸다.

더 큰 문제는 박정희라는 인물을 평가하는 방식이다.

박정희는 신이 아니다.

산업화의 공로가 있다고 해서 독재의 바카라임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경제성장의 성과가 있다고 해서 유신체제의 민주주의 억압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반대로 유신독재의 바카라임이 있다고 해서 산업화 과정의 성과까지 지워지는 것도 아니다.

역사는 공과를 함께 기록해야 한다.

박정희에게 공이 있다면 공을 기록하면 된다.

과가 있다면 과를 기록하면 된다.

그것이 역사다.

박정희를 성인으로 만들 필요도 없다.

악마로 만들 필요도 없다.

그런데 한국 슬롯에서는 언제부터인가 박정희에 대한 평가가 곧 진영의 충성심을 시험하는 도구가 됐다.

박정희를 비판하면 좌파다.

박정희를 긍정하면 극우다.

육영수 피격 사건에 의문을 제기하면 박정희를 증오하는 사람이다.

반대로 박정희를 옹호하면 독재를 미화하는 사람이다.

이런 이분법으로는 역사를 한 줄도 제대로 쓸 수 없다.

영화 ‘암살자(들)’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영화가 제기한 의혹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자료로 검증하면 된다. 실제 사건의 수사기록과 당시 언론 보도, 판결문, 관련 증언을 비교하면 된다. 조선일보 역시 과거 보도에서 영화의 주요 설정 가운데 실제 기록과 맞지 않는 부분을 팩트체크한 바 있다.

그렇다면 그렇게 하면 된다.

“이 장면은 사실과 다르다.”

“이 주장은 증거가 없다.”

“이 부분은 역사적 기록과 충돌한다.”

이렇게 말하면 된다.

그런데 왜 굳이 “아버지가 그렇게 미운가”를 전면에 내세우는가.

왜 역사적 검증을 가족에 대한 감정적 공격처럼 만들어야 하는가.

왜 박정희를 둘러싼 국민의 감정을 다시 두 편으로 갈라놓아야 하는가.

이 지점에서 보수 언론의 오래된 보도 방식이 드러난다.

갈라치기다.

누군가를 영웅으로 만들고 누군가를 적으로 만든다.

독자를 사실의 세계가 아니라 진영의 세계로 끌어들인다.

“우리 아버지를 왜 미워하느냐”라고 묻는 순간 보수 독자는 역사학자가 아니라 가족의 편에 서게 된다.

그리고 상대편은 어느새 부모를 공격하는 비정한 인간이 된다.

이것은 매우 강력한 정치적 프레임이다.

하지만 역사적 진실을 밝히는 데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박지만 씨의 기억은 존중해야 한다.

그러나 가족의 기억이 역사적 증거 전체를 대신할 수는 없다.

아버지가 울었다는 증언이 진실이라고 해서 사건의 모든 의혹이 자동으로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반대로 사건에 의혹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박정희가 배후였다고 단정할 수도 없다.

이것이 상식이다.

증거가 있으면 제시하면 된다.

증거가 없으면 없다고 하면 된다.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해야 한다.

역사학은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된다.

더구나 박정희는 이미 역사 속 인물이다.

그의 가족에게도 아픈 기억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 국가의 대통령이었던 인물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가족의 감정만으로 결정할 수 없다.

대통령의 공적 행위는 국민 전체의 역사다.

유신도 역사다.

긴급조치도 역사다.

언론 탄압도 역사다.

산업화도 역사다.

경제개발도 역사다.

그리고 육영수 피격 사건도 역사다.

모두 기록하고 따져야 한다.

어느 하나를 덮기 위해 다른 하나를 꺼내서는 안 된다.

더구나 언론이 이 역사적 갈등을 이용해 국민을 다시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한국 슬롯는 이미 충분히 갈라져 있다.

좌우가 갈라졌다.

세대가 갈라졌다.

지역이 갈라졌다.

남녀가 갈라졌다.

부자와 서민이 갈라졌다.

이제는 죽은 대통령의 가족과 영화를 만든 사람들까지 갈라놓는다.

언론이 해야 할 일은 여기에 기름을 붓는 것이 아니다.

불을 끄는 것이다.

논쟁의 양쪽 자료를 보여주는 것이다.

사실과 주장을 구분하는 것이다.

독자가 스스로 판단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언론이 감정을 자극해 편을 만들고 상대편을 적으로 만들면 언론은 공론장이 아니라 정치적 분열의 증폭기가 된다.

특히 영향력이 큰 보수 언론이라면 더욱 바카라임이 무겁다.

박정희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박정희를 좋아할 권리가 있다.

박정희를 비판하는 사람에게도 비판할 권리가 있다.

영화가 역사적 사실을 왜곡했다면 비판하면 된다.

그러나 그 비판을 박정희 가족에 대한 사랑과 연결해서는 안 된다.

그 순간 역사 논쟁은 사라지고 감정의 전쟁만 남는다.

“아버지를 왜 미워하느냐”는 질문은 가족에게는 자연스러운 질문일 수 있다.

그러나 언론이 국민에게 던져야 할 질문은 달라야 한다.

“무엇이 사실인가.”

“어떤 증거가 있는가.”

“어떤 기록이 남아 있는가.”

“무엇이 확인됐고 무엇이 확인되지 않았는가.”

그것이 언론의 질문이어야 한다.

박정희를 신으로 만들지 말자.

그렇다고 악마로 만들지도 말자.

공은 공대로 평가하고 과는 과대로 바카라임을 묻자.

그것이 박정희에게 가장 공정한 평가다.

그리고 그것이 대한민국에도 가장 건강한 역사다.

죽은 권력자를 둘러싸고 산 사람들이 서로 증오하게 만드는 언론은 이제 멈춰야 한다.

역사를 이용해 국민을 갈라놓는 언론도 멈춰야 한다.

박정희를 지키겠다고 국민을 갈라놓는 것도 역사가 아니다.

박정희를 무너뜨리겠다고 사실까지 왜곡하는 것도 역사가 아니다.

역사는 누구의 편도 아니다.

언론 역시 어느 진영의 확성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

국민을 싸우게 만드는 언론보다 국민이 생각하게 만드는 언론이 필요하다.

박정희를 둘러싼 50년의 갈등을 다시 50년 이어갈 것인가.

아니면 이제 사실과 증거 앞에서 멈출 것인가.

박정희를 신격화하지 말라.

박정희를 악마화하지도 말라.

그리고 박정희를 이용해 국민을 갈라놓지도 말라.

역사를 팔아 분노를 만드는 순간, 언론은 역사를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이용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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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서 오래 살면서 종교와 여행과 문화 탐방에 관심을 기울인 결과 지식으로 농사를 짓게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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