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한 편이 한국 슬롯를 다시 두 편으로 갈라놓았다.
이번에는 육영수 피격 사건이다.
영화 <암살자(들)>이 1974년 사건에 영화적 상상력을 덧붙였다는 이유로 역사 왜곡 논란에 휩싸였다. 정치권에서는 상영 중단과 불매운동을 요구하고 제작진을 고발했다. 영화에 대한 별점 테러가 벌어졌고 학교 단체관람을 둘러싼 민원까지 등장했다.
그런데 이는 참으로 익숙한 풍경이다.
한국 슬롯는 역사를 토론하지 않는다.
역사를 진영의 소유물로 만든다.
내가 믿는 역사에 질문하면 모욕이다. 내가 싫어하는 역사 해석이면 왜곡이다. 내가 기억하는 희생자는 성역이고 상대편이 기억하는 희생자는 정치적 선동이 된다.
이것이 정말 민주주의인가.
영화에 문제가 있다면 비판하면 된다. 역사적 사실과 다른 부분이 있다면 자료를 제시해 반박하면 된다. 감독에게 질문하고 평론가와 역사학자가 논쟁하면 된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쉽게 고발부터 한다.
상영 중단을 요구한다.
불매운동을 조직한다.
학교에 민원을 넣는다.
심지어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까지 별점을 던진다. 실제 관람객 평점과 비관람객도 참여할 수 있는 평점 사이에 큰 차이가 나타났다는 보도까지 나왔다.
이것은 역사 논쟁이 아니다.
집단적 심판이다.
더 심각한 것은 정치권이 이 심판의 한복판에 뛰어들었다는 사실이다. 국민의힘에서는 영화 상영 중단과 불매운동, 감독의 국정감사 출석까지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일부에서는 다른 역사 사건에 적용되는 법과 비교하며 역사왜곡 처벌법까지 주장했다.
여기서 반드시 물어야 한다.
누가 역사의 최종 심판자인가.
정부인가.
국회인가.
정당인가.
유족인가.
아니면 국민인가.
민주주의에서 역사는 권력의 소유물이 아니다.
박정희를 좋아할 자유도 있다. 박정희를 비판할 자유도 있다. 육영수의 죽음을 애도할 자유도 있다. 그 사건에 다른 의문을 제기할 자유도 있다.
그 모든 자유는 동시에 존재해야 한다.
물론 자유에는 바카라임이 따른다.
실제 역사적 사실을 허위로 단정했다면 비판받아야 한다. 특정 인물에 대한 명예훼손이나 허위사실 유포가 법적으로 성립한다면 법원의 판단을 받으면 된다.
그러나 ‘의문을 제기하는 것’과 ‘그 의문을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다르다.
현재 영화 제작진은 특정 인물을 사건의 배후로 규정한 적이 없으며 기존 역사적 사실을 부정하려는 의도도 없었다고 밝히고 있다. 허진호 감독 역시 박정희가 육영수의 피격을 지시했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고 직접 밝혔다.
그렇다면 이제 영화 자체를 놓고 논쟁하면 된다.
그 장면이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는가.
그 장면은 어디까지가 기록이고 어디부터가 상상인가.
영화가 관객에게 특정한 오해를 유발할 가능성이 있는가.
이것을 토론하면 된다.
그런데 한국 슬롯에서는 이상하게도 토론보다 퇴출이 빠르다.
상대방의 주장을 반박하기보다 상대방의 입을 막으려 한다.
이것은 보수와 진보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 정치 전체의 오래된 병폐다.
어제는 저쪽이 역사적 성역을 만들었다고 비판하면서 오늘은 내가 성역을 만든다.
어제는 표현의 자유를 외치면서 오늘은 표현의 자유를 불편해한다.
어제는 역사적 상처를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말라고 하면서 오늘은 또 다른 역사적 상처를 정치적 무기로 사용한다.
이런 슬롯에서는 역사적 진실에 가까워질 수 없다.
왜냐하면 역사적 사실을 찾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자기 진영의 기억을 지키는 것이 목적이 되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젊은 세대에게 무엇을 가르치느냐이다.
역사는 정답지를 외우는 과목이 아니다.
기록을 비교하고 증거를 검토하고 서로 다른 증언을 대조하면서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가’를 판단하는 훈련이다.
그런데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보여주는 것은 무엇인가. 선동과 갈라치기만 한다.
“이 영화는 보면 안 된다.”
“저 영화는 보면 안 된다.”
“저 사람의 역사 해석은 위험하다.”
“우리의 역사를 의심하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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