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셜미디어는 어느새 인민재판의 장이 되었나?

소셜미디의 선전선동이 이미 도를 넘었다

byFrancis Lee

미국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야구 경기장에서 한 가족의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다. 짧은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 몇 초짜리 영상은 인터넷을 뒤집어놓았다.

화면 속에는 아기를 안은 여성이 있었다. 그런데 그녀의 손에는 음식까지 들려 있었다. 그 옆에는 남편이 앉아 그 음식을 받아 혼자 먹었다. 여성이 아이를 돌보는 동안 남편은 편안하게 음식을 먹는 모습이었다. 누가 보더라도 남편보다 아내가 훨씬 더 고생하고 있는 장면이었다.

중계진은 이 장면을 보고 여성을 ‘올해의 엄마’라고 치켜세웠다. 반면 남편에게는 농담 섞인 비난을 던졌다. 시청자들도 같은 장면을 보았다. 그리고 인터넷은 순식간에 결론을 내렸다.

‘저 남자는 도대체 뭐 하는 인간인가.’

‘아내가 아이와 음식을 모두 들고 있는데 혼자 먹고 있다.’

‘저런 남편과는 헤어져야 한다.’

영상은 수천만 회 이상 퍼졌다. 한 남자의 인격과 한 부부의 결혼생활이 불과 몇 초의 영상으로 인터넷 법정에 올라갔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영상 속 여성 에리카가 직접 입을 열었다.

그리고 카메라가 보여주지 않은 이야기를 설명했다.

남편 램세스는 처음부터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고 앉아 있었던 사람이 아니었다. 에리카가 화장실에 다녀오면서 음식을 사오겠다고 했고, 아이를 자신이 계속 돌보겠다고 한 것도 에리카 자신이었다. 남편은 아이를 맡겠다고 했지만 에리카가 아이를 계속 안고 있겠다고 했다.

에리카가 음식과 아이를 함께 들고 돌아왔을 때 남편은 자리를 정리해주었고 아이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에리카에게 먼저 먹겠느냐고 물었다.

에리카는 남편에게 먼저 먹으라고 했다. 자신은 경기 전에 이미 식사를 했고, 남편은 그날 제대로 먹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남편은 음식 용기를 들어주겠다고 했다. 자신의 샌드위치를 나눠주겠다고도 했다. 심지어 에리카에게 먹여주겠다는 제안까지 했다. 그러나 에리카가 괜찮다고 했다.

그래서 남편은 먹었다.

바로 그 장면이 카메라에 잡혔다.

이 사실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인터넷의 문제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영상이 거짓이었다’고 말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영상은 거짓이 아니었다.

남편은 실제로 앉아서 음식을 먹었다.

아내는 실제로 아이를 안고 있었다.

아내가 아이를 돌보는 동안 남편이 음식을 먹는 모습도 실제였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문제는 그 장면에 없는 나머지 이야기를 사람들이 자기 마음대로 채워 넣었다는 것이다.

‘남편이 음식을 먹었다’는 사실에서 ‘남편은 육아를 하지 않는다’는 결론으로 넘어갔다.

‘아내가 아이를 안고 있다’는 사실에서 ‘남편이 아내를 방치한다’는 결론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거기서 다시 ‘저런 남자와는 헤어져야 한다’는 결론으로 넘어갔다.

몇 초의 관찰이 한 인간에 대한 판결문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소셜미디어가 만들어내는 가장 위험한 현상이다.

사실과 해석의 경계가 무너지고 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사람들은 사실을 본 다음 자신이 이미 가지고 있던 편견을 그 위에 덧칠한다.

남성의 육아 참여에 불만이 있는 사람은 이 장면에서 ‘무바카라임한 남편’을 본다. 여성의 희생을 강조하고 싶은 사람은 ‘혼자 고생하는 엄마’를 본다. 남녀 갈등에 민감한 사람은 또 하나의 성별 갈등 사례를 발견한다.

그리고 알고리즘은 사람들이 가장 강하게 반응하는 해석을 더 널리 퍼뜨린다.

그 순간 영상은 더 이상 영상이 아니다.

하나의 선전물이 된다.

‘아내는 고생하고 남편은 놀고 있다’는 단순한 서사가 반복되고 또 반복된다. 사람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영상을 보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짧은 영상과 댓글을 다시 본다. 처음의 맥락은 사라지고 자극적인 해석만 살아남는다.

그렇게 한 인간이 인터넷에서 악인이 된다.

이번 사건에서 그 과정은 실제 공격으로 이어졌다. 에리카의 설명에 따르면 일부 사람들은 가족의 신원을 찾아내고 남편의 연락처까지 알아내 공격했고, 남편에게 죽으라는 메시지까지 보냈다.

도대체 우리는 언제부터 남의 결혼생활을 몇 초짜리 영상으로 재판할 권리를 갖게 되었는가.

더 놀라운 것은 사람들이 자신이 재판을 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는 저 남자가 잘못했다.”

여기까지는 개인의 감상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저런 남자는 최악이다.”

로 바뀌고,

“저런 남자와는 헤어져야 한다.”

로 바뀌는 순간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것은 감상이 아니라 타인의 삶에 대한 도덕적 판결이다.

수십만 명이 그 판결에 동참하면 집단적 낙인이 된다.

과거의 인민재판에는 광장이 필요했다. 군중이 한곳에 모여야 했다. 이제는 스마트폰 하나면 된다.

누군가의 모습이 몇 초 동안 화면에 잡히면 수십만 명이 순식간에 판사가 된다. 피고에게 변론할 기회는 없다. 증인을 부를 수도 없다. 사건의 전후를 설명할 수도 없다.

판결부터 내려진다.

그리고 판결이 내려진 뒤에 사실을 찾는다.

이번 사건에서 가장 아이러니한 것은 정작 아내가 남편을 공격한 사람들에게 “당신들이 틀렸다”라고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에리카는 남편이 자신에게 도움을 주지 않았다고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남편이 아이를 맡겠다고 했지만 자신이 아이를 계속 안겠다고 했다고 설명했다. 남편이 음식을 들어주겠다고 했지만 자신이 거절했고, 남편이 먹어도 된다고 자신이 말했다고 했다.

그런데 인터넷은 당사자인 아내보다 자신들이 본 몇 초를 더 믿었다.

이것이 얼마나 기묘한 일인가.

남의 결혼생활을 당사자보다 더 잘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남편이 실제로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하면서 남편을 평가한다. 부부가 평소 어떻게 육아를 분담하는지 알지 못하면서 결혼생활을 평가한다. 그날 남편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하면서 인간성을 평가한다.

심지어 그날 남편은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낸 친구를 잃은 슬픔 속에 있었다고 에리카는 설명했다. 두 사람이 그날 야구장을 찾은 것도 그 친구를 기억하기 위한 것이었다. 에리카는 남편이 제대로 식사하지 못한 것을 알고 음식을 챙겨주려 했다고 했다.

카메라는 남편이 그날 무엇을 먹고 있는지는 보여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남편이 그날 무엇을 마음속에 짊어지고 있었는지는 보여줄 수 없었다.

바로 여기에 인간에 대한 이해의 한계가 있다.

카메라는 사람의 행동을 찍을 수 있다.

그러나 행동의 맥락까지 자동으로 찍어주지는 않는다.

더구나 인간의 삶은 몇 초짜리 영상보다 훨씬 복잡하다.

누군가는 오늘 무바카라임해 보이지만 어제는 밤새 아이를 돌봤을 수 있다. 누군가는 오늘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며칠 동안 가족을 위해 일했을 수도 있다. 누군가는 웃고 있지만 속으로는 친구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을 수도 있다.

화면에는 나오지 않는 삶이 있다.

그런데 소셜미디어는 그 보이지 않는 삶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즉시 판단하라고 요구한다.

즉시 분노하라고 요구한다.

즉시 공유하라고 요구한다.

왜냐하면 분노가 조회수를 만들기 때문이다.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문장은 잘 퍼지지 않는다.

“저 인간은 최악이다”라는 문장은 퍼진다.

“우리가 모르는 사정이 있을 것이다”보다 “이 영상만 봐도 알 수 있다”가 훨씬 자극적이다.

결국 플랫폼의 알고리즘과 인간의 편견이 서로를 강화한다.

사람들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알고리즘은 사람들이 많이 반응하는 것만 다시 보여준다. 그러면 사람들은 자신의 판단이 더욱 옳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더 강한 표현을 사용한다.

이 과정에서 편견은 의견이 아니라 확신이 된다.

확신은 다시 집단적 분노가 된다.

집단적 분노는 결국 한 사람에 대한 공격이 된다.

이것이 소셜미디어의 역기능이다.

인터넷이 사람들을 연결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사람들을 연결하는 동시에 서로의 편견도 연결했다.

과거에는 내 머릿속에 있던 편견이 내 생각으로 끝날 수 있었다. 지금은 그것을 클릭 한 번으로 수십만 명에게 전파할 수 있다.

과거의 편견은 개인적이었다.

오늘날의 편견은 알고리즘을 만나 집단적 힘을 갖는다.

그래서 지금 필요한 것은 표현의 자유를 없애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표현하기 전에 한 번 멈추는 능력이다.

“내가 지금 알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모르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보고 있는 것이 전체 상황인가.”

“당사자의 설명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이 네 가지 질문만 했어도 이번 사건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보였을 것이다.

물론 화면 속 남편의 모습이 불편하게 보였다는 사실까지 부정할 필요는 없다.

실제로 아내가 아이를 안고 있는 동안 남편이 음식을 먹는 모습은 많은 사람에게 불공평하게 보일 수 있다.

그렇게 느끼는 것 자체가 잘못은 아니다.

문제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그 장면만으로 한 인간 전체를 규정했다는 것이다.

불편함과 판결은 다르다.

의문과 비난은 다르다.

비판과 인신공격은 다르다.

그리고 무엇보다 영상과 진실은 다르다.

에리카가 이 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말을 했다.

자신을 ‘올해의 엄마’라고 불러주는 것은 고맙지만, 그것이 자신이 모든 것을 혼자 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라고 했다. 자신이 아이와 음식을 들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만으로 자신의 남편과 결혼생활 전체를 판단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 말은 소셜미디어 시대의 인간관계에 대한 강력한 경고다.

우리는 너무 적게 알고 너무 빨리 판단한다.

남의 삶을 몇 초 보고 수년의 삶을 재단한다.

한 장면을 보고 인간 전체를 규정한다.

그리고 자신이 만든 이야기에 맞지 않는 사실이 나오면 오히려 사실을 의심한다.

이것이야말로 인터넷 시대의 새로운 인민재판이다.

인민재판의 가장 무서운 점은 판사가 틀릴 수 있다는 사실이 아니다.

판사가 틀렸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이미 피고에게 돌이킬 수 없는 피해가 발생할 수 있다는 데 있다.

한번 인터넷에 퍼진 낙인은 삭제되지 않는다.

한번 악인이 된 사람은 해명이 올라와도 처음의 영상만큼 관심을 받지 못한다.

처음에는 수천만 명이 보았지만 해명은 그보다 훨씬 적은 사람들이 본다.

거짓된 판단이 진실보다 빠르게 퍼지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인터넷에서 가장 중요한 능력을 하나 배워야 한다.

판단하는 능력이 아니라 판단을 유보하는 능력이다.

모든 것을 알아야만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에서는 아무것도 단정하지 않는 것이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

샌프란시스코의 야구장에서 카메라에 잡힌 한 가족의 몇 초는 우리에게 그것을 가르쳐주었다.

그날 화면에 찍힌 것은 아기를 안은 엄마와 음식을 먹는 아빠였다.

그러나 실제 가족의 삶은 그 몇 초보다 훨씬 컸다.

인터넷이 그 가족에게서 빼앗으려 했던 것은 사실이 아니라 맥락이었다.

그리고 맥락을 빼앗긴 인간은 누구나 악인이 될 수 있다.

오늘은 낯선 남편을 심판하지만 내일은 내가 그 화면 속에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지금 인터넷을 통해 정보를 얻고 있는가.

아니면 우리의 편견을 서로에게 전염시키고 있는가.

인터넷이 어느새 인민재판의 장이 된 것이 아니라면, 적어도 우리는 그것을 인민재판의 장으로 만들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제는 멈춰야 한다.

사람을 판단하기 전에 그 사람에게 카메라에 찍히지 않은 삶이 있다는 사실부터 기억해야 한다.

몇 초의 영상은 한 사람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

그러나 한 인간의 인생을 판결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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