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츠와 AI 시대, 유튜브 논객의 권력 붕괴가 보인다
지난 시대에는 사람들이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특정한 사람의 말을 기다렸다. 복잡한 정치 현실을 대신 해석해주고, 무엇이 옳고 그른지 설명해주며, 사건의 본질이 무엇인지 규정해주는 사람이 있었다. 그들은 단순한 논객이 아니었다. 그들은 하나의 세계관을 제공하는 ‘해석자’였다.
한국의 진보 진영에서 유시민과 김어준은 오랫동안 그런 역할을 해왔다. 유시민은 정치와 슬롯를 지식인의 언어로 해석했고, 김어준은 대중적 언어와 강한 서사로 현실을 재구성했다. 두 사람의 말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정치적 판단의 중요한 기준이 됐다. 정치인은 이들의 말을 의식했고, 지지자들은 이들의 해석을 공유했으며, 언론은 다시 그들의 발언을 기사화했다.
그런데 지금 그 구조에 균열이 생기고 있다.
최근 경향신문은 더불어민주당 전당대회를 계기로 유시민·김어준 같은 이른바 ‘장외 스피커’의 영향력이 예전 같지 않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특히 10~20초짜리 쇼츠가 확산되면서 1~2시간에 걸쳐 논리를 전개하던 기존 해설가들의 ‘맥락의 권위’가 약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기존 스피커의 발언을 다른 제작자가 잘라내고 재조합해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이른바 ‘3차 해석’도 중요한 변화로 지목됐다.
경향신문의 분석은 상당히 흥미롭다. 그러나 이 현상을 단순히 ‘쇼츠 때문에 유시민과 김어준의 영향력이 줄었다’고 해석한다면 핵심을 놓치게 된다.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것은 훨씬 근본적인 변화다.
사람들이 더 이상 특정인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이 아니라, 특정인이 자신의 사고를 대신해주는 것을 거부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유시민이 전당대회를 앞두고 이재명 정부의 국정 기조를 ‘재건축 대 증축’으로 규정하고 ‘필연적 실패’라는 강한 표현을 사용했지만, 호남권을 비롯한 당원들의 선택은 그 해석과 반드시 일치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강한 프레임이 유권자들에게 전략적 판단을 자극했을 가능성도 제기됐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현상이다.
과거에는 ‘유시민이 이렇게 말했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의 정치적 사건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유시민이 그렇게 말했는데, 정말 그런가?’라는 질문이 가능해졌다.
바로 이 차이가 중요하다.
해석의 권위가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유시민이나 김어준이 무능해졌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두 사람은 여전히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정치적 콘텐츠 생산자다. 다만 그 영향력이 과거와 같은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과거의 정치 커뮤니케이션은 ‘스피커 → 대중’이라는 일방향 구조에 가까웠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스피커 → 쇼츠 제작자 → 알고리즘 → 시청자 → 또 다른 해석자’라는 복잡한 순환구조가 만들어졌다.
유시민이 한 시간 동안 설명한 내용에서 누군가는 15초를 잘라낸다. 김어준이 두 시간 동안 이야기한 내용에서 또 다른 누군가는 30초만 가져간다. 그리고 그 장면에 새로운 제목을 붙인다. 그렇게 만들어진 영상은 원래 발언자의 의도와 관계없이 독립적인 정치 콘텐츠가 된다.
이 과정에서 가장 먼저 사라지는 것은 맥락이다.
그리고 맥락이 사라지는 순간 권위도 함께 무너진다.
이것이 쇼츠가 가져온 가장 혁명적인 변화다.
쇼츠는 단순히 긴 영상을 짧게 만든 것이 아니다. ‘누가 말했느냐’보다 ‘무엇을 잘라냈느냐’를 중요하게 만든 것이다.
과거에는 발언자가 의미를 결정했다.
지금은 편집자가 의미를 결정한다.
과거에는 말한 사람이 해석의 주인이었다.
지금은 알고리즘과 편집자가 해석의 공동 저자가 된다.
그렇다고 이것을 무조건 민주주의의 발전이라고 평가할 수도 없다.
여기에는 매우 위험한 역설이 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해석 독재에서 벗어난 슬롯가 반드시 더 이성적인 슬롯가 되는 것은 아니다.
유시민의 한 시간짜리 설명을 듣지 않는 대신 15초짜리 자극적인 영상 수십 개를 소비한다면 우리는 권위에서 해방된 것이 아니라 맥락에서 해방된 것일 뿐이다.
이것은 자유가 아니라 또 다른 형태의 종속일 수 있다.
더구나 쇼츠의 알고리즘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계속 보여준다. 내가 분노하면 분노를 자극하는 영상을 보여주고, 내가 특정 정치인을 싫어하면 그 정치인을 공격하는 영상이 계속 나타난다.
결국 사람은 자신이 세상을 객관적으로 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에게 맞는 현실만 반복해서 소비하게 된다.
이것은 유시민이나 김어준의 해석 독재보다 더 위험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과거의 독재자는 적어도 누구인지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알고리즘의 독재자는 보이지 않는다.
더 심각한 변화는 AI 시대에 시작된다.
AI는 인간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수준을 넘어 이제는 정보를 정리하고, 비교하고, 요약하고, 해석한다. 인간이 직접 수많은 자료를 읽고 판단하던 과정의 상당 부분을 대신할 수 있다.
이제 인간은 유시민에게 “무슨 뜻입니까?”라고 묻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AI에게도 “이 사건을 어떻게 봐야 합니까?”라고 묻는다.
여기에서 쇼츠와 AI라는 전혀 다른 기술이 하나의 방향으로 만난다.
바로 ‘사고의 외주화’다.
쇼츠는 생각할 시간을 줄인다.
AI는 생각해야 할 노동을 줄인다.
둘 다 인간에게 편리함을 제공한다.
그러나 그 편리함이 지나치게 커지면 인간은 어느 순간 자신의 판단 능력 자체를 사용하지 않게 될 수 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정말 경계해야 할 문제다.
유시민과 김어준의 영향력이 약해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 자리에 누가 들어가는지가 중요하다.
과거에는 인간의 권위가 인간의 권위를 대체했다.
이제는 알고리즘의 권위가 인간의 권위를 대체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특정 논객의 권위가 아니다.
우리 자신의 판단 능력이다.
정치에서 가장 위험한 사람은 틀린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자신이 틀릴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것은 정치인에게도 해당되고 논객에게도 해당된다.
유시민의 ‘필연적 실패’라는 표현도 그렇고, 김어준이 오랫동안 보여준 강한 정치적 확신도 그렇다.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정치에는 변수와 우연이 존재하고, 인간의 선택은 언제든 예상과 다른 방향으로 움직인다.
그런데 정치 논객은 복잡한 현실을 하나의 문장으로 정리해야 대중의 관심을 얻는다.
‘필연적 실패.’
‘이것이 본질이다.’
‘결국 이렇게 된다.’
이런 문장은 강력하지만 동시에 위험하다.
왜냐하면 인간에게 생각할 여지를 남겨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 문장을 믿으면 판단할 필요가 없어진다.
바로 여기에서 ‘해석 독재’가 시작된다.
해석 독재란 반드시 권력을 가진 사람이 명령하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가 현실을 해석해주고, 대중이 그 해석을 자신의 판단이라고 착각할 때도 해석 독재는 발생한다.
따라서 유시민과 김어준의 영향력이 줄어드는 현상은 반드시 나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건강한 민주주의를 위해 필요한 변화일 수도 있다.
정치가 특정 스피커의 해석에 의존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에서 중요한 것은 ‘누구의 말을 믿을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다.
이것이 지금 한국 정치가 배워야 할 가장 중요한 교훈이다.
유시민의 말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김어준의 말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도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들의 말을 듣고도 다시 자료를 확인하고, 반대쪽의 주장도 듣고, 자신의 판단이 틀릴 가능성을 열어놓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쇼츠와 AI 시대의 새로운 시민성이 시작된다.
우리는 더 이상 한 명의 위대한 스피커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동시에 수많은 쇼츠가 만들어내는 군중의 함성도 진실이라고 믿어서는 안 된다.
유시민의 해석 독재가 무너지는 자리에 알고리즘의 독재가 들어선다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김어준의 권위가 사라지는 자리에 AI의 답변을 그대로 믿는다면 역시 마찬가지다.
결국 우리가 무너뜨려야 하는 것은 유시민도, 김어준도 아니다.
‘누군가가 대신 생각해주기를 바라는 인간의 욕망’이다.
AI 시대에 가장 중요한 능력은 더 많은 정보를 아는 능력이 아닐 것이다.
더 빨리 영상을 소비하는 능력도 아닐 것이다.
오히려 질문하는 능력, 의심하는 능력, 판단을 유보하는 능력, 그리고 자신이 틀릴 수 있음을 인정하는 능력이 더욱 중요해질 것이다.
쇼츠와 AI가 인간에게서 빼앗아가는 것은 시간이 아니다.
어쩌면 그것은 ‘스스로 생각하는 불편함’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인간의 미래는 바로 그 불편함을 얼마나 견딜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유시민과 김어준의 시대가 정말 끝나는 것이라면, 그것은 한 시대의 스피커가 사라지는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다시 자신의 사고를 자신의 것으로 되찾는 사건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단지 한 사람의 해석 독재에서 벗어나 알고리즘과 AI의 해석 독재로 이동했을 뿐이다.
결국 민주주의의 마지막 권력은 말하는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생각하는 사람에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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